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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원하고 칼칼하고 개운한 국물… 고개 처박고 허겁지겁 퍼먹었네

[아무튼, 주말] [정동현의 pick] 김치찌개

김치찌개를 자주 먹게 된 건 근대의 일이다. 한반도는 물산이 풍부한 땅이 아니었다. 김장 김치가 오래돼 도저히 처치 곤란한 지경이 이르렀을 초여름쯤 겨우 김치찌개를 끓여 먹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추론을 하는 근거는 우리 집도 그러했기 때문이다. 봄부터 초여름까지 집에는 김치 특유의 삭은 내가 가득했다. 그래도 “또 김치찌개야?”라는 불평은 없었다. 우리 집 세 남자는 반찬 투정 하는 법이 없었다. 어묵, 돼지고기, 소고기, 제사 지내고 남은 전 등 구할 수 있는 식재료가 모두 들어간 김치찌개는 언제든 좋았다. 한 냄비 가득 끓인 김치찌개를 온 가족이 둘러앉아 바닥이 보일 때까지 퍼먹었다. 다른 반찬 하나 없이 김치찌개로 족했다.


한반도 어디를 가든 김치찌개를 먹을 수 있지만 기억에 남는 것은 드물다. 그 드문 확률을 뚫은 집 중 하나는 서울 종로구 경운동 ‘간판없는 김치찌개집’이다. 점심 나절 인사동길 언저리, 골목길을 따라 흘러드는 시큼한 냄새를 쫓다 보면 간판도 보이지 않는 이 집이 나온다. 어묵을 잔뜩 넣고 멸치 육수로 맛을 낸 이 집 김치찌개는 서울에서 흔한 종류가 아니다.


메뉴는 김치찌개 단 한 종류. 라면과 칼국수를 사리로 추가할 수 있다. 국물이 끓어오르니 주변 모두가 마치 집단 최면에 걸린 듯 모두 고개를 아래로 박았다. 말소리는 사라지고 보글보글, 쩝쩝 같은 의성어만 남았다. 국물은 시원하고 칼칼한 기운이 끝을 찔렀다. 국물을 먹을 때마다 혀 위 미뢰를 쪼개고 식도를 가르는 호쾌한 맛이 났다. 사리를 더하고 밥공기를 비운 끝에는 일 년에 몇 번 안 되는 드문 포만감에 큰 숨을 들이쉬었다.


자리를 강남으로 옮기면 고깃집에서 먹는 김치찌개의 전형을 보여주는 곳이 있다. 청담동 ‘현대정육식당’이다. 이 집은 소고기 차돌박이도 팔지만 100이면 90의 확률로 모든 이가 삼겹살을 굽고 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김치찌개에 달걀말이를 시켜놓고는 주거니 받거니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차림새를 보면 파절이, 콩나물, 고사리나물, 무생채 등 어디를 가든 볼 수 있는 구성이다. 하지만 흔하다고 다 같은 맛은 아니다. 과녁의 정중앙에 화살이 꽂히듯 음식의 간은 정확했고, 어딘가 모자라거나 빠진다는 느낌이 없었다. 붉은색이 선명한 김치찌개는 돼지고기에서 우러난 고소한 기름기가 한 꺼풀, 그 밑으로 김치의 신맛이 또 한 꺼풀, 그리고 저 밑바닥에는 고춧가루와 젓갈 등이 뜨거운 가스불에서 뒤섞여 만들어낸 ‘한국+밤거리+알파’의 맛이 펼쳐졌다.


강남을 떠나 한강을 따라 강서구청 인근 주택가 골목에 가면 일부러 찾기도 힘든 집이 하나 나온다. 김치 저(菹)자를 따서 ‘저-집’이란 이름을 가진 이곳 역시 간판이 없다. 간판 대신 훤히 뚫린 통창을 걸고 어깨가 딱 벌어진 주인장 홀로 가게를 봤다. 스테인리스로 만든 바 카운터 좌석은 종갓집 마루처럼 먼지 하나 없었다. 메뉴는 어린이용 간장계란밥을 제한다면 커다란 솥 하나에 끓여내는 김치찌개 딱 하나다.


주문을 넣으니 주인장은 먼저 후식으로 나올 오렌지를 썰었다. 여기에 솥에서 퍼 담은 김치찌개, 매실액에 담근 깻잎 장아찌, 하얀 쌀밥의 단출한 구성이었다. 뭉근히 끓인 김치찌개는 여러 맛이 쌓이고 쌓여 높다란 지층을 이룬 것 같았다. 맛의 얼개는 상투적인 짠맛과 신맛을 벗어나 국물 자체의 무게감에 초점을 맞췄다. 뻑뻑한 국물에 밥을 비볐다. 김치찌개에 밥 대신 라면을 넣을 수도 있다.


그릇을 비우고 난 뒤 오렌지로 말끔하게 입가심을 했다. 김치찌개를 먹을 때 흔히 겪는 시끄럽고 번잡스러운 경험은 없었다. 대신 초점 잘 맞은 사진을 보듯 김치찌개의 맛만 선명하게 남았다. 오래전부터, 매일 한결같았던 그 맛이 흐릿한 구석 없이 말끔하게 펼쳐졌다. 그 맛이 시작됐던 그때의 기억도 덩달아 밀려왔다. 아버지의 커다란 밥공기, 늘 뒤늦게 밥숟가락을 떴던 어머니, 나와 경쟁하듯 숟가락질을 하던 동생, 김치찌개 하나로도 배부른 나날이었다. 가족과 함께였기에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던 시간이었다.

# 간판없는 김치찌개집: 김치찌개 7000원(2인분 이상).


# 현대정육식당: 삼겹살 1만4000원(180g), 김치찌개 8000원.


# 저-집: 김치찌개 9000원, 어린이 간장계란밥 3000원.

[정동현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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