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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by 조선일보

스물셋의 사랑, 마흔아홉의 성공, 일흔일곱의 감사… “제일 잘한 일은 결혼”

[아무튼, 주말] 90년대 홍보업계의 전설

조안리와 워킹맘 두 딸들

1990년대 홍보 업계 전설이었던 조안 리 스타 커뮤니케이션 창립자(가운데)가 큰딸인 성미(오른쪽) CJ ENM 아메리카 대표, 둘째 딸인 현미(왼쪽)씨와 함께 한국을 방문했다. 서울 중구의 한 호텔에서 만난 이들은 “워킹맘으로서 삶이 자랑스럽다”고 했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한 여인이 있었다. 열아홉 대학 새내기 때 학장이던 미국인 신부를 만나 사랑에 빠졌고, 스물셋에 미국으로 떠나 신부직을 내려놓은 그 남자와 결혼했다. 당시 남자의 나이는 마흔아홉, 26살 나이 차에 천주교 사제와 제자라는 특별한 관계까지 극복한 결혼이었다.


딸 둘의 엄마가 된 후 그녀는 귀국해 조선호텔에 취직했고, 서른둘에 ‘스타 이그제큐티브 서비스’를 창업했다. 1988년 서울올림픽 홍보, 차세대 전투기 사업, 나이지리아 시멘트 협상 등 굵직굵직한 프로젝트를 성공시키면서 마흔아홉에 ‘국제 비즈니스계의 퍼스트레이디’로 불리며 성공한다. 그가 이때를 회상하며 쓴 ‘스물셋의 사랑, 마흔아홉의 성공(1994)’은 출간 1년 만에 70만부가 팔리며 많은 여성의 롤모델이 됐다. 바로 조안 리(77)다.


그가 최근 한국에 왔다. 모델같이 꼿꼿한 자세, 화려한 드레스, 반짝반짝 빛나는 두 눈. 젊은 날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의 손에는 새 책 ‘감사’가 들려 있었고, 옆에는 워킹맘이 된 두 딸이 서 있었다.

◇일흔일곱의 감사

-베스트셀러를 낸 뒤 거의 30년 만이다.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나.


조안 리(이하 조): “‘스물셋의 사랑, 마흔아홉의 성공’이 베스트셀러에 오르고 정말 바빴다. 책 홍보와 강연 일정에 쫓겨 지내다 휴식이 필요해 둘째 딸과 케냐로 여행을 떠났다. 3주 동안 사파리를 다니고, 킬리만자로 정상에 오르고, 야생동물 수백만마리가 이동하는 것을 지켜봤다. 내 안의 생기가 다시 소생하는 것 같았다. 네팔에서는 히말라야의 산봉우리들 위로 태양이 떠오르는 것을 지켜봤고, 인도의 방갈로르 아슈람에서는 명상을 통해 새로운 우주 안에 있는 나를 봤다. 그리고 나서 이집트 여행을 가려고 했는데,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다.”


-왜 취소됐나.


조: “다낭성 신장 및 간 질환이 급격히 악화되고 있다는 진단을 받았다. 유전성으로, 아버지로부터 세 자녀 중 나 혼자만 물려받은 병이었다. 평생 일주일에 세 번씩 기계에 묶여 꼬박꼬박 투석을 받아야 했다. 사업을 접고 마지막으로 사도 바오로의 발자취를 따라 여행하는 소규모 가톨릭 성직자 그룹에 가담해 3주 동안 예루살렘, 이스탄불 등을 다닌 후 2012년 큰딸이 사는 미국 LA로 갔다.”


-발병 소식에 충격받았을 것 같다.


조 : “한 3년 우울증을 앓았다. 화도 나고, 억울하고. 그때 책을 읽은 것이 많이 도움됐다. 특히, 네덜란드 출신 로마 가톨릭 사제인 헨리 나우웬의 책에서 영감을 많이 받았다. 그는 하느님의 사랑을 번지점프에 비유했는데, 우리가 번지점프를 처음 할 때는 엄청 두렵지만, 일단 믿고 놔버리면 엄청난 스릴이 오고, 그다음부터는 무섭지 않다는 것이다. 많은 경우 우리는 두려움 때문에 뭘 하지 못한다.”


-아프고 나서 삶에 대한 생각이 많이 달라졌나.


조 : “조금 더 고분고분해진 것 같다(웃음). 사실 미국으로 간 건 그해를 넘기지 못할 것 같아서였다. 내 생의 마지막 크리스마스를 딸과 손자와 함께 보내고 싶었다. 그러나 난 그로부터 13년을 훌쩍 건너뛰어 지금 기적처럼 살아있다. 사랑하는 가족과의 단순한 삶, 화창한 캘리포니아 날씨, 엄격한 요가와 명상 덕분에 10년이 넘는 삶을 덤으로 받은 것이다. 천천히 단순하게 일상을 살다 보니 ‘왜 접니까?‘라는 탄원이 ‘왜 저라고 아니겠습니까’라는 인정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책 제목이 ‘감사’인가?


조 : “모르고 지냈지만 내 일생은 축복이었다. 사람들은 나를 가리켜 ‘팔자 사나운 여자’라고 했다. 어린 나이에 세상과 맞서 격렬하게 싸워야 했고, 마흔한 살에 남편과 사별했다. 그때부터 어린 두 딸과 세상에 홀로 남아 눈코 뜰 새 없이 일에 매달려 살아야 했다. 그러나 나는 ‘지독하게 운이 좋았던 여자’라고 생각한다. 남편처럼 그릇이 크고 훌륭한 사람을 만나 일찍이 삶에 눈을 떴고, 후회 없는 사랑을 나눴으며, 더없이 예쁜 아이를 둘씩이나 낳아 기를 수 있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온갖 역경을 뚫고 국제 비즈니스계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길 수 있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지금 책 ‘스물셋의 사랑, 마흔아홉의 성공’을 다시 보면 어떤가?


조 : “그땐 내가 용기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와서 보니 난 아무것도 아니었고 그분의 용기가 정말 대단하다 싶다. 마흔아홉에 자기가 이뤄온 모든 것을 버리고 새로운 삶을 살았다는 게.” 남편 네스 킬로런 신부는 조안 리와 결혼하기 위해 정신병원에도 감금되는 수모를 당하지만, 결국 로마 교황청의 사면과 허락을 받는다.


-가장 후회하는 것은?


조 : “바쁘다는 이유로 아이들과 시간을 많이 못 보낸 것. 아이들의 입학식 등 중요한 순간에 내가 없었다. 그런데 큰딸은 그 바쁜 와중에서도 출장 갔다 와서 아들을 챙기고, 주말에도 놀아주고, 쉬지 않고 가족을 챙기더라. ‘얘가 어렸을 때 엄마를 많이 못 봐서, 저렇게까지 하는구나’ 하는 짠한 생각이 들었다.”

◇남편 같은 큰딸, 나 같은 둘째 딸

조안 리를 잘 아는 사람들은 “그가 지금까지 살아 있는 건 두 딸 덕분”이라고 한다. 두 딸이 엄마의 보호자이자, 친구로 항상 함께하기 때문이다. 큰딸인 성미(앤젤라)씨는 미국 콜롬비아대를 졸업한 후 현재 CJ ENM 아메리카 대표로 영화 ‘기생충’ 홍보와 K팝 관련 비즈니스를 앞장서 지휘했다. 둘째 딸 현미(에이미)씨는 미국 브라운대를 졸업한 후 스위스에서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다.

조안 리 스타 커뮤니케이션 창립자(가운데)와 큰딸인 성미(오른쪽) CJ ENM 아메리카 대표, 둘째 딸인 현미(왼쪽)./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어머니가 제일 후회하는 게, 두 딸과 함께 시간을 못 보낸 것이라고 하더라.


성미(이하 성) : “사실 나는 엄마가 원망스러웠던 적이 없다. 그냥 생활로 받아들였다. 오히려 엄마가 자랑스러운 순간이 많았다. 우린 이대부속초등학교에 다녔는데, 친구들 엄마는 학교에 자주 왔는데 우리 엄마는 거의 못 왔다. 딱 한 번 엄마가 학교에 왔는데, 사람들이 정말 파도처럼 갈라지더라. 사람들이 다 알아봤다. 그때 너무 자랑스러웠다.”


현미(이하 현) : “우리는 어릴 때부터 엄마를 공유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엄마의 관심을 원하거나, 지도를 원하거나, 엄마와 함께 있지 못해 서운한 적이 없었다. 엄마는 언제나 행사, 모임, 공항, 회사로 가고 있었다. 멋진 실크나 모직의 완벽한 정장 차림에 샤넬 5번 향수 냄새를 희미하게 남기면서. 아빠는 그걸 ‘세상을 이기려고 무장한 엄마의 아름다운 갑옷’이라고 했다.”


-어머니로서, 선배로서 딸들에게 아쉬운 건 없나?


조 : “큰애가 오십이 넘었으니 건강도 걱정되고, 조금 더 새로운 일에도 도전했으면 좋겠고.”


성 : “엄마가 도전하는 삶이었다면, 나는 조금 더 프라이버시를 지키며 회사 일원으로 지원하는 삶이다. 엄마는 그걸 안타까워하지만, 난 이렇게 큰 회사에서 동료들과 함께 협력하면서 일하는 게 너무 좋다. 어릴 때 난 엄마가 너무 혼자서만 다 하는 게 안타까웠다. 엄마는 ‘개척자’였다. 난 지금도 엄마의 인생 스토리가 믿기지 않는다. 난 결혼도 했고, 애도 있고, 회사 생활도 한다. 하나도 잘하지는 못하지만 엄마는 내게 이런 걸 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줬다. 엄마는 내게 미안하다고 하는데, 난 내 아들에게 미안하지 않다. 난 어릴 때부터 아들에게 ‘엄마도 직장이 있고, 너도 직장이 있어. 내 직장은 회사고, 네 직장은 학교야. 우린 자기 일을 찾아 가야 해’라고 말해왔다.”


-딸들이 엄마보다 더 어른스러운 것 같다.


조 : “우리 집은 엄마인 내가 저지르는 성향이고, 딸들이 이성적인 성향이다(웃음).”


-인생 최고의 결정은?


조 : “결혼이다. 지금도 그분께 처음 수영 배우던 날이 떠오른다. 인천 송도해수욕장이었는데, 수영을 배우다 지치면 그분의 목을 감싸고 가만히 있었다. 그러면 그분은 날 데리고 물 위를 수영했다. 고래 위에 탄 기분이랄까. 이대로라면 세상 어디든지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조선일보

1980년대에 찍은 조안 리 가족 사진. 왼쪽부터 둘째 딸 현미, 남편 케네스 킬로렌, 첫째 딸 성미, 조안 리. 가톨릭 성직자였던 킬로렌은 조안 리가 마흔한 살에 세상을 떠났다. /조안 리

◇비즈니스 우먼의 롤모델

조안리는 1세대 비즈니스 우먼이다. 기업에서 일할 때는 동료 남성들이 협조 공문에 사인을 안 해줘 마음고생을 했고, 기업 대표로 나이지리아로 시멘트 협상을 하러 갔을 때 상대는 그를 비서쯤으로 생각했다. 최신예 전투기 FA18의 국내 도입 관련 홍보 당시에는 ‘군수 산업에서는 전통적으로 여성을 금기시한다’는 말까지 들었다. 그런 환경에서 그는 1988년 서울올림픽을 전 세계에 홍보하고, 전투기를 팔며 독보적인 사업을 일궜다. 세계 최대 PR 기업 버슨마스텔러 한국지사장, 전문직 여성들의 국제봉사단체 존타(ZONTA)에서 한국 여성 최초로 아시아 지역 총재 등을 역임했다.


-지금도 유리 천장이 존재할까.


조 : “스스로 유리 천장을 만드는 사람들이 있다. 자기 자신의 ‘정신적 유리 천장’부터 부숴야 한다. 난 늘 ‘두려워 말라’고 말해준다. 난 회사에 다닐 때도 ‘뭔가 편해지는 순간은 떠날 때다’라는 말을 많이 했다. 편하면 안주하게 되니까. 난 지금도 무인차 같은 새로운 기술이 나오면 관련 책들을 부지런히 읽는다.”


-오히려 젠더 갈등은 과거보다 더 심해졌다.


조 : “남성을 적대시하면 안 된다. 그들과 같이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함께 저변을 넓혀 가야 한다. 여성 연대의 폭도 넓어져야 한다. 초기 페미니즘은 소외 여성에 대한 배려가 부족했다.”


-워킹맘의 모델로서 엄마 조안 리에게 배운 건?


성 : “어렸을 때 엄마의 출장에 따라간 적이 있다. 그전까지는 엄마가 일하는 모습을 제대로 본 적이 없었는데, 그때는 아빠에 이어 3개월 뒤 할머니까지 돌아가셔서 우리를 봐줄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처음으로 엄마가 일하는 모습을 봤는데, ‘상상하던 것과는 차원이 다르구나!’ 느꼈다. 메시지를 전달하는 법, 타협하는 법 등을 그때 처음 배웠다. 당시 엄마는 외국인들에게 한국을 홍보하고 안내하는 일을 했는데, 지금 나는 미국을 방문하는 한국인들에게 미국을 안내하고, 미국 내에서 한국을 홍보하는 일을 한다.”


-일하다가 엄마에게 도움을 청할 때도 있나?


조 : “안 묻더라. 큰딸이 처음 CJ에 갈 때 이력서 한 번 읽어달라고 한 정도? 그때 놀랐던 게, 한국어로 연봉 협상 같은 민감한 이야기를 잘 풀어놨더라. 한국어 실력이 나보다 낫다고 생각했다. 내가 그래도 엄마로서 잘했다고 생각하는 건, 여름방학 때마다 아이들에게 ‘번역 아르바이트’를 시켰던 거다. 말은 부정확해도, 글은 정확해야 하니까.”


현 : “엄마는 항상 우리에게 자기 자신을 자랑스러워하고, 자기가 어디에서 왔는지 기억하고, 여자요 인간으로서 독립성을 소중히 여기면서 세상이 우리에게 가르칠 수 있는 모든 것에 마음을 열라고 가르치셨다.”


조 : “난 뿌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 뿌리에 대한 자존심, 자긍심이 없으면 위축된다. 자기가 자기를 무시하면 누가 날 존경해주겠나. 내가 처음 해외를 돌아다닐 때 사람들은 한국이라는 나라도 몰랐다. 정말 이 세대가 대단한 일을 한 거다.”


-조안 리를 롤모델로 삼고 있는 여성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조 : “야망에 가득 찼던 젊은 시절 나의 모토는 ‘내 삶의 주인은 나!’였다. 난 남편과 어머니를 잃은 것을 부정하고 싸우려고 했다. 그러나 그건 아무 소용없는 헛된 짓이었다. 내가 삶을 통해 깨달은 것은 ‘나라는 존재의 본질적 속성 앞에 겸허해지는 것’이다. 난 그걸 S로 시작되는 다섯 단어로 표현하고 싶다. 먼저, ‘단순(Simplicity)’. 진정한 사랑은 단순하다. 둘째, ‘침묵(Silence)’. 침묵은 금이다. 셋째, ‘느림(Slow)’. 사람은 기계가 아니다. 속도를 늦추고 삶의 리듬을 즐기자. 넷째, ‘나눔(Share)’. 홀로 섬처럼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섯째, ‘웃음(Smile)’. 난 원래 미소 짓기가 어려운 사람이었다. 그러나 웃음은 사람들을 더 행복하게, 오래 살게 해준다.”

조안리와 딸들./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이혜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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