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컬처]by 조선일보

술을 안 마셨으면 그 돈으로 집을 한 채 샀을 거라고?

[아무튼, 주말]

[부부가 둘 다 놀고 먹고 씁니다]

술꾼의 유쾌한 변명


조선일보

최근에 충남 보령시로 이사한 뒤 차린 소박한 술상. 아내도 술 덕분에 만났다. /편성준 제공

술은 건강의 적이다. 술병에도 쓰여 있다. ‘알코올은 발암물질로 지나친 음주는 간암, 위암 등을 일으킵니다. 임신 중 음주는 기형아 출생 위험을 높입니다’ 등등.


그런데 술을 마실수록 오히려 몸이 좋아지는 일이 일어난다면 어떻게 될까 상상해 본 적이 있다. 좀 웃길 것 같다. 심란한 일이 생겨서 술을 한 잔 하는데 마실수록 몸이 좋아진다면 도대체 감정 조절을 어떻게 해야 하냔 말이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숨어서 술을 마시게 되지 않을까? 아울러 마음에 들지 않는 술주정뱅이를 욕하는 방식도 달라질 것 같다. “저 자식은 젊디 젊은 게 제 몸은 끔찍하게 챙기느라 아주 술고래야, 술고래!” 이런 식으로 말이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얼마 전 전주 여행을 가서 만난 친구가 우리 부부의 주량이 생각보다 적다며 놀란 적이 있기 때문이다. 아내와 나는 둘 다 술을 좋아하는 편이라 술집에도 자주 가고 술이나 안주 이야기를 소셜미디어(SNS)에 많이 올리는 편이다. 심지어 나는 온라인에 ‘음주일기’라는 제목으로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벌어졌던 이야기를 연재한 적도 있다. 하지만 이젠 주량이 예전 같지 않고 오래 마시기에는 체력도 따라주지 않아서 대부분의 술자리는 1차에서 끝낸다. 하지만 한때는 나도 가열차게 술을 마시던 시절이 있었으니, 애초에 내가 왜 술을 마시게 되었을까에 대해 더듬어 보기로 했다.


조선일보

가끔은 이렇게 마신다 /편성준 제공

고등학교 때 최인호 소설의 애호가였던 나는 어른이 되면 ‘별들의 고향’ 주인공처럼 나도 술에 억장으로 취해 자다가 일어나면 옆에 등 벗은 여자가 누워 있을 것이라는 허황된 꿈을 꾸곤 했다. 그러나 스무 살(사실은 열아홉 살) 때부터 음주 생활을 시작하고 술·담배·외박을 인생 3대 지표로 삼고 살아가던 시절에도 그런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았다. 어른이 되는 것은 사람마다 다 방법과 경우가 다른 것 같았다. 그래도 줄기차게 술을 마신 것은 술이야말로 사교의 수단이자 대화의 촉진제였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누군가 할 얘기가 있다고 하면 으레 손을 붙잡고 술집으로 달려갔고 이십대 젊은이들은 연애를 해도 실연을 당해도 군대를 가도 술 한 잔이 빠질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밤마다 술이었다.


한창 이야기가 무르익고 있는데 부모님이 일찍 들어오랬다며 술자리를 박차고 나오는 것은 우정을 저버리는 행위였다. 나는 마음이 약해 늘 마지막까지 앉아 있는 축이었는데 신입생 때는 주량을 몰라 마구 욱여넣은 술에 취해 버스를 타고 잠들어 원당 종점까지 가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택시비도 없는 가난한 학생이었는데 원당에서 구파발 집까지는 어떻게 돌아갔는지 지금 생각해 봐도 알 수 없는 일이다. 독립문역에 서는 막차를 놓치지 않으려고 열차를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가다가 역시 맞은편에서 전속력으로 뛰어오던 남자와 정통으로 부딪혀 안경다리가 부러진 일도 있었다. 그 남자도 막차를 놓치면 큰 낭패였던지 바닥에 나자빠진 나를 0.5초쯤 쳐다보다가 그대로 자신이 타야 할 열차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때는 또 어떻게 집까지 갔는지 모르겠다. 역시 택시비도 없던 시절이었는데.


졸업 후 광고회사에 입사해 보니 술꾼이 한둘이 아니었다. 직장인은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술을 마셔야 한다고 법으로 정해 놓은 것 같았다. 월급을 받는 사람들이라 술이나 안주의 단가도 높아졌다. 학생 때는 김치찌개 하나에 소주를 여러 병 마시며 ‘삼겹살에 소주 한번 실컷 마셔보는 게 소원’이라던 인간들이 월급을 받게 되자 만나면 삼겹살은 기본이고 치킨에 맥주는 입가심이었다. 한 번은 조개구이가 전국적으로 유행해서 어디를 가나 자갈이 깔린 조개구이집을 만날 수 있었다. 조개구이 유행이 지나가고 나자 그 많던 자갈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궁금해졌다.


조선일보

술 좋아하는 부부의 대화 /편성준 제공

아내도 술 덕분에 만났다. 몹시 심란했던 날 혼자 간 단골 바에서 우연히 나와 인사를 나눈 아내는 그날 이후 한 달 반 만에 ‘고노와(해삼 내장)에 소주 한 잔 하실래요?’라는 문자메시지를 보냄으로써 연애의 시작을 선언했다. 술 때문에 맺어졌다고는 할 수 없지만 술집이 배경인 것만은 확실하다.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도 술꾼이 한 명 나온다. 술꾼을 만난 어린 왕자가 “왜 술을 마시냐”라고 묻자 술꾼은 “잊기 위해서”라고 대답한다. 무엇을 잊으려 하느냐는 질문엔 “부끄럽다는 걸 잊기 위해서”라고 대답한다. 뭐가 부끄럽냐고 묻자 “술 마시는 게 부끄럽다”고 대답한다. 도돌이표 문답이다. 우리는 왜 술을 마실까. 지난밤 술을 늦게까지 마신 걸 자랑 삼아 말하는 사람들은 술을 속죄(贖罪)의 의미로 받아들인다는 심리학자들의 해석이 있는데 일리가 있는 말이다. 과음하는 건 ‘내가 어제 나를 이렇게 괴롭혔으니 좀 알아 달라’는 자기 방어 기제가 숨어 있다는 것이다.


내가 술을 안 마시고 그 돈을 다 모았으면 지금쯤 집을 한 채 샀을 것이라 말하는 사람도 있던데 그 말엔 선뜻 동의가 되지 않는다. 내 평생 술값 아껴서 집 샀다는 얘기는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고 나는 술을 꾸준히 마셨음에도 집을 한 채 샀다. 물론 지금은 전세로 내주고 나도 전월세 집에서 살고 있지만, 이건 이보전진을 위한 일보후퇴, 니까.


[편성준 작가]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오늘의 실시간
BEST

chosun
채널명
조선일보
소개글
대한민국 대표신문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