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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시로’ 대신 ‘무시로’… 나훈아는 최고의 작사가

[말모이 100년, 다시 쓰는 우리말 사전] [42] 노래하는 국문학자 장유정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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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심수봉, 남자는 나훈아죠!”


‘트로트 가수 중 최고의 작사가를 꼽아달라’고 하자 장유정(47) 단국대 교수는 주저없이 답했다. “심수봉 노랫말은 단순하면서도 솔직해요. ‘미워요’ ‘사랑밖엔 난 몰라’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처럼 대중이 쉽게 공감하는 가사를 쓰죠. 나훈아는 사람들이 생각지 못하는 걸 노랫말로 써요. 잡초, 땡벌, 홍시···. ‘무시로’의 뜻이 ‘시시때때로, 수시로’인 거 아셨어요? ‘수시로, 수시로’라고 불렀으면 재미없었을 텐데 무시로라고 하니까 너무 멋있는 거죠. 일상에서 뽑아내는 감수성이 어마어마해요.”


장 교수는 “가수 되려다 안 풀려서 대중음악사 연구하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남들은 그를 ‘노래하는 교수’라고 부른다. 어릴 때부터 꿈이 가수였다. 대학가요제 나가려고 피아노·댄스·판소리·기타를 배웠다. 결과는 예선 탈락. 열정만으론 안 되는 게 있다는 걸 깨달았다. “깨끗이 접었죠. 그럼 난 이제 뭘 할까. 노래 없는 세상은 상상할 수 없으니, 노래의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이 되자고 결심했어요.”


2004년 서울대 국문과에서 ‘일제강점기 한국 대중가요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국내에서 대중음악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건 처음이었다. “국문과 수준 떨어뜨린다고 싫어하는 교수님도 있었지만, 지도교수님은 계속 응원해주셨어요. 구비문학이 민요, 설화에서 외연을 확장해야 연구 지평이 넓어지는 것 아니겠냐. 네가 그 문을 열어준 거라시며.”


그는 일제강점기 대중가요 장르를 크게 네 가지로 분류했다. 신민요, 만요(漫謠·코믹송), 재즈송, 트로트. “당시엔 트로트란 말은 없고 유행가라고 했어요. 서양의 영향을 받은 일본 대중음악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유행가가 되는데, 오늘날 트로트의 기원이죠. 음악적으로는 서양, 일본을 거쳤지만 노랫말은 우리 고유의 정서를 우리말로 담으면서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습니다.”


‘타향살이’ ‘황성옛터’(원제 황성의 적) ‘목포의 눈물’ 같은 명곡들이 이때 나온다. 그는 “이 시대엔 노랫말이 정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나라 잃은 아픔을 빗대어 고향에 대한 그리움, 타향살이의 설움을 노래한 곡이 많았다”며 “수많은 사람이 듣고 같이 우는 ‘눈물의 공동체’ 역할을 대중가요가 한 것”이라고 했다. 시인, 극작가 등 문인들이 작사했기 때문에 문학적 형상화가 뛰어난 시기였다.


그는 지난 1월 두 번째 음반을 냈다. 1920~1930년대 국내 대중가요를 재즈로 편곡한 ‘경성야행’. “병이 도져서, 무대에 올라가고 싶은 근질근질한 마음을 이렇게 푼다”고 했다. 대중음악사를 소개하면서 직접 노래도 부르는 강의형 콘서트도 꾸준히 열고 있다. 10월 1일 TV조선이 개최하는 ‘2020 트롯 어워즈’ 엔 심사위원으로 참여한다.



트로트 노랫말에도 시대성이 있을까. 일제강점기 가사에 상실과 결핍의 정서가 짙다면, 1950년대엔 전쟁과 피란의 고통이 사실적으로 반영된다. ‘전선야곡’ ‘단장의 미아리 고개’ ‘굳세어라 금순아’ 등이 대표적이다. “전쟁의 상처를 절절히 위로하면서 트로트가 서서히 토착화하고, 1960~1970년대로 오면 향토적 가사와 도시적 정서가 공존해요. 이미자의 ‘섬마을 선생님’ ‘동백 아가씨’ 등이 전자라면, 배호의 ‘돌아가는 삼각지’ ‘안개 낀 장충단 공원’은 서울의 지명이 본격 등장하면서 도시의 정서가 물씬 느껴지죠.”


1980년대에 ‘성인 가요’로 한정되고, 1990년대 ‘서태지와 아이들’이 등장하면서 주류에서 밀려난 트로트는 2003년 장윤정이 등장하면서 남녀노소 모두가 즐기는 노래가 된다. 가사는 점점 더 단순해지고 직설화법에 속어·신조어까지 등장한다. “하지만 트로트 가사를 비하하는 시각엔 찬성 못 합니다. 트로트는 모든 주제를 다룰 수 있어요. 인생·사랑·우정·효도···. 막걸리 한 잔에 아버지를 떠올리고, 보릿고개 힘든 시절도 이야기하죠. 그래서 성별, 나이, 계층과 관계없이 공감하는 겁니다.”


◇장유정이 꼽은 아름다운 트로트 노랫말


“생각이 난다 홍시가 열리면 울 엄마가 생각이 난다/ 자장가 대신 젖가슴을 내주던 울 엄마가 생각이 난다”


- 홍시(2005년·나훈아 작사, 나훈아 노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홍시의 붉은 이미지를 활용해 정감 있게 표현


“거미줄로 한 허리를 얽고 거문고에 오르니/ 일만 설움 푸른 궁창 아래 궂은비만 나려라”


- 세기말의 노래(1932년·박영호 작사, 이경설 노래): 나라 잃은 아픈 현실을 비유적으로 표현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오늘도 옷고름 씹어가며 산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에”


- 봄날은 간다(1954년·손로원 작사, 백설희 노래): 봄날의 찬란함과 인간의 허무함을 대비한 절창


“님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를 찍으면/ 도로 남이 되는 장난 같은 인생사”


- 도로남(1991년·조운파 작사, 김명애 노래): 점 하나로 달라지는 단어를 인생사와 절묘하게 결합


[천안=허윤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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