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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처]by 조선일보

[송동훈의 세계 문명 기행] [25] 방 4000개, 제국의 궁전… 스스로 세상과 단절된 ‘감옥’이 됐다

송동훈의 세계 문명 기행(25)

스페인의 펠리페 2세가 지은 엘 에스코리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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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8년 9월 12일에서 13일로 넘어가는 내내 거대한 엘 에스코리알(El Escorial)에는 슬픔이 가득했다. 왕이 죽음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왕의 침실 주변을 지키고 있는 고문관들과 고위 사제들은 침묵 속에 임종의 순간을 기다렸다. 드디어 최후가 찾아왔다. 왕은 ‘가톨릭 신앙 속에서 죽는다’는 말을 끝으로 세상을 떠났다. 엘 에스코리알 앞으로 펼쳐진, 황량하지만 광활한 광야 위로 해가 떠오르기 시작하는 새벽 5시였다. 엘 에스코리알 안의 교회에서는 신(神)의 자비를 구하는 성가대원들의 처량한 노래가 울려 퍼졌다. 지금 막 숨을 거둔 왕의 이름은 펠리페 2세(Felipe Ⅱ, 재위 1556~1598년).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의 아들이다. 아버지로부터 아메리카 식민지를 포함한 스페인 제국과 유럽의 금싸라기인 저지대 국가(오늘날의 벨기에와 네덜란드), 지중해의 중심인 이탈리아 반도의 북부와 남부를 물려받았다. 1580년에는 대가 끊긴 포르투갈 제국을 합병해 이베리아 반도를 통일하고, 전 세계의 바다를 지배했다. 42년에 달하는 그의 시대는 스페인의 황금기였다. 그러나 당대의 누구도 알지 못했다. 왕의 죽음과 함께 스페인의 황금기는 끝났다는 것을. 왕이 누렸던 황금기가 사실은 쇠퇴기의 시작이었다는 것을.


궁, 수도원, 영묘의 삼위일체


왕이 죽음을 맞이한 엘 에스코리알은 마드리드 북서쪽이다. 스페인의 저명한 철학자 오르테가 이 가세트(Ortega y Gasset)가 '스페인의 영혼'이라 표현한 시에라 데 과다라마(Sierra de Guadarrama) 산맥 초입에 있다. 완벽한 대칭 구조 속에 4000여 개의 방과 16개의 중정을 포용한 웅장한 건물은 거대한 산맥 앞에서도 기죽지 않고 도도하다. 펠리페 2세가 즉위 직후인 1557년 여름 생캉탱(St. Quentin)에서 프랑스군을 상대로 거둔 승리가 탄생의 계기였다. 예상치 못했던 승리는 왕에게 기적으로 여겨졌다. 마침 승전일이 로렌조 성인(San Lorenzo)의 축일이어서 왕은 성인에게 수도원을 지어 바치겠다고 맹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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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드리드를 제국의 수도로 결정한 직후, 왕은 수도에서 멀지 않은 시에라 데 과다라마의 작은 마을 엘 에스코리알을 수도원 부지로 정했다(1561년). 초석은 1563년 봄에 놓였다. 왕은 처음부터 수도원만 지을 생각이 아니었다. 궁전과 왕실 일가를 위한 대규모 무덤도 함께 계획했고 조성했다. 궁전, 수도원, 무덤. 생뚱맞은 조합이었다. 그러나 펠리페 2세에게는 그가 추구하고 사랑하는 모든 것이 들어간 완벽한 조합이었다.


오만하고 편협한 왕


펠리페 2세는 사명감과 책임감을 가진 왕이었다. 그가 생각하는 통치의 핵심은 공명정대였고, 부정부패에 단호했다. '항상 신을 경외하고, 정직한 참모들의 충고에 귀 기울이며, 분노 때문에 이성을 잃지 말라'는 아버지의 조언을 평생 가슴에 새겼다. 도덕적 오만과 과도한 편협이란 단점조차 사소하게 느껴질 정도로 왕의 자질은 훌륭했다. 단점이 낳은 실수들이 쌓이고, 시대의 흐름과 정면으로 충돌하면서 의외의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는 누구도 예상치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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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리페 2세의 초상화. 엄격하고 절제력 강한 왕은 장식을 배제한 검은 옷을 즐겨 입었다.

펠리페 2세는 르네상스와 대항해시대의 활력이 넘치던 '열린 스페인'을 물려받지 못했다. 아버지 카를 5세가 황제의 책무를 다하기 위해 유럽 전역을 돌아다니는 40년 동안, 야수처럼 성장한 종교재판소가 사회를 옥죄었기 때문이다. 신왕(新王)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일은 닫혀가는 스페인 사회에 자유와 활력을 불어넣는 것이었다.


그러나 펠리페 2세에게는 불가능한 미션이었다. 그의 사명감은 이단을 뿌리 뽑는 것이었고, 그의 책임감은 오로지 가톨릭만을 향하고 있었다. 종교재판소의 힘은 축소는커녕 확대됐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펠리페 2세는 신앙의 순수성에 피의 순수성을 강조했다. 순혈령을 통해 조상 중에 유대인이나 무슬림의 피가 섞인 사람들을 공직에서 내쫓고, 사회에서 고립시킨 것이다. 출판에 대한 검열 강화, 스페인 학생들의 외국 유학 금지, 외국 서적 유입의 금지가 뒤따랐다. 스페인의 지식공동체는 사실상 궤멸됐다. 개종한 이슬람교도인 모리스코를 향한 탄압도 본격화됐다. '나의 종교만이 참되고, 나의 혈통만이 순수하고, 나의 권리만이 정당하다'는 왕의 편협은 일말의 도전도 용납하지 못했다. 왕은 선을 넘고 있었다.


무적함대의 패배와 몰락의 시작


엘 에스코리알은 펠리페 2세가 추구하는 가치의 건축적 구현이었다. 완벽한 질서와 조화 속에서 궁정(권력), 수도원(하느님), 영묘(왕가)는 삼위일체를 이뤘다. 그러나 그가 통치하는 거대한 제국은 그렇지 못했다. 엘 에스코리알 공사가 한창일 때 저지대 국가에서 문제가 생겼다. 신교의 확산이 용인하기 힘든 수준에 달한 것이다. 펠리페 2세는 이단을 뿌리 뽑기 위해 군대를 보냈다. 악수(惡手)였다. 자유에 대한 열망과 튼튼한 경제를 바탕으로 저지대 국가는 저항했다. 펠리페 2세는 오늘날 벨기에에 해당하는 남부는 가까스로 되찾았지만, 북부가 네덜란드란 이름으로 사실상 독립하는 걸 막을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잉글랜드가 신교의 대의(大義)를 내세워 네덜란드를 물심양면으로 돕는 게 걸림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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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 에스코리알이 완공된 이후 펠리페 2세는 잉글랜드 침공을 추진했다. 엘 에스코리알 깊숙한 곳에 위치한 집무실에서 왕은 무적함대의 건설을 진두지휘했다. 왕은 질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 전쟁은 정의를 위한, 참신앙을 위한 성전(聖戰)이었기 때문이다. 1588년, 무적함대는 위풍당당하게 리스본을 떠나 잉글랜드를 향했다. 그들은 패배했고, 거의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왕과 주변은 '신이 선택하신 민족에게 내린 시련'이라며 자위했지만 패배의 후유증은 컸다. 스페인 제국이 네덜란드와 잉글랜드를 중심으로 한 북구 신교 세력을 상대로 이길 수 없음이 자명해졌다. 왕은 인정하지 않았다. 다시 전쟁을 계획했고 더 열심히 국사에 매달렸다. 그러나 펠리페 2세의 강철 같은 의지와 쉼 없는 노력도 바닥난 재정과 피폐한 국가라는 가혹한 현실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왕이 물려받은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은 나날이 저물어만 갔다. 평생 참된 신앙을 위해 싸워온 왕은, 자신 앞에 던져진 결과에 참담했을 것이다. 스스로도 궁금했을 것이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그 이유를 안다. 펠리페 2세가 엘 에스코리알이란 거대한 우물 안에 스스로를 가두고, 애써 시대의 변화를 외면한 것이 제국 몰락의 근본적인 원인이었다. 펠리페 2세의 제국은 진즉에 사라졌고, 엘 에스코리알만 남아 그 시대를 증언하고 있다. 자업자득이다.


[펠리페2세와 결혼한 여인들 모두 일찍 죽어]


펠리페 2세는 평생 네 번 결혼했고, 네 번 사별했다. 지독하게 배우자 운이 없었다. 왕의 모든 결혼은 제국을 지키기 위한 고도의 정치 게임이었다.


첫 부인은 포르투갈의 공주 마리아 마누엘라(Maria Manuela· 1527~1545). 왕과는 사촌지간이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 두 해양 제국의 동맹 강화가 목적이었다. 공주의 이른 죽음으로 혼인 기간은 3년 남짓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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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부인은 잉글랜드의 메리 여왕(Mary Ⅰ·1516~1558)이었다. 둘의 결혼은 스페인-잉글랜드-저지대국가로 이어지는 강력한 해상 제국 건설이라는 카를 5세의 대전략하에서 추진됐다. 둘은 5촌지간이었고, 여왕이 열한 살이나 연상이었지만 성사됐다. 왕가의 결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국익을 위한 전략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시 여왕의 이른 죽음으로 결혼도 끝났고, 해상 제국도 물거품이 됐다.


세 번째 부인은 프랑스 왕 앙리 2세와 캐서린 데 메디치의 장녀인 엘리자베스(Elisabeth·1545~1568) 공주였다. 이탈리아를 두고 60년 이상 계속된 스페인-프랑스 간의 전쟁을 끝내는 평화의 증표였다. 결혼 생활은 왕비의 이른 죽음으로 10년 만에 끝이 났다.


왕의 마지막 부인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조의 안나(Anna· 1549~1580)였다. 왕보다 22살 연하였던 안나는 심지어 왕의 조카였다. 역시 스페인 합스부르크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간의 혈맹을 강화한다는 정치적 목적 앞에 불가능은 존재하지 않았다. 결혼은 어린 안나의 죽음으로 끝이 났다. 펠리페 2세는 53세에 다시 혼자가 됐다. 지친 왕은 더 이상 결혼하지 않고 18년을 혼자 살았다. 4명의 부인 중 잉글랜드 여왕 메리를 제외한 3명은 엘 에스코리알의 왕가 무덤에 왕과 함께 묻혀 있다.


[엘 에스코리알=송동훈 문명탐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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