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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by 조선일보

‘사자머리’ 미스코리아 줄줄이 배출한 代母… “87세 현역입니다!”

마샬 미용실 하종순 회장

60년동안 명동 지킨 이유

‘저를 이 자리에 있게 해주신 원장님께 감사드립니다.’


1970~80년대 미스코리아 입상자들에겐 부모나 가족보다 미용실 원장에게 먼저 수상의 영광을 돌리는 게 ‘국룰’(일반적 규칙)이었다. 당시 이 단골 멘트를 가장 많이 받은 주인공이 이른바 ‘사자머리’로 미스코리아 무대를 평정한 하종순(87) 마샬 미용실 원장. 김성희(1977년)·고현정(1989년)·서정민(1990년)·이영현(1991년)·염정아(1991년) 등 마샬에서 그가 길러낸 미스코리아만 120여 명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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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87세인 하종순 마샬 미용실 회장은 가위와 빗을 손에 든 채 30분 넘게 서서 촬영을 하자 “헤어 디자이너로 뛸 때가 생각나 즐겁다”고 했다. 하 회장은 프랑스 명품 브랜드 샤넬 매장 인테리어에 영감을 받아 미용실 한쪽 벽을 금색으로 칠했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그로부터 수십년, 미스코리아는 이제 케이블TV에서도 대회 중계를 하지 않을 정도로 위상이 크게 떨어졌다. 미스코리아 배출을 두고 치열하게 경쟁하던 서울 명동의 유명 미용실들도 자취를 감췄다. 1970년대 명동 번화가에는 마샬을 비롯해 윤희·세븐·스왕 등 18개 미용실이 있었는데 이 중 지금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는 건 마샬뿐이다.


지난해가 창업 60년. 1962년 3월 명동 중심가 건물 2층에서 이렇다할 직원 없이 단출하게 시작한 하종순은 마샬을 14개 지점, 직원 200명 규모의 국내 최대 미용 브랜드로 성장시켰다. 미수(米壽)를 앞둔 나이에도 그는 매일 아침 미용실에 출근한다. 더 이상 가위는 들지 않지만 후배 디자이너 양성은 60년째 이어가고 있는 것. 지난 11일 찾은 마샬 명동 본점 1층 입구에는 마샬이 ‘명동을 상징하는 장소’로 서울미래유산에 선정됐다는 내용이 담긴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시어머니 몰래 한복 싸들고 미용실 출근


-이른바 청담동 시대에 왜 명동을 지키고 있나.


“우리도 논현점을 냈지만 명동이 가지는 상징 때문에 본점만은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물론 부담은 컸지만, 부동산 붐을 따라 매장을 옮긴 미용실들은 결국 자취를 감췄다. 본점은 마샬에 있어 일종의 플래그십 스토어다. 세계 미용협회 간부들도 명동점을 둘러보고 ‘마담 하(Ha)는 비싼 다운타운에서 어떻게 매장을 유지하느냐’며 놀라워한다.”


-오랫동안 살아남은 비결이 뭘까.


“이번 월드컵으로 ‘중꺾마’(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라는 말이 유행했는데 난 평생 ‘남지마’(남에게 지지 않으려는 마음)란 각오로 일했다. 작은 거 하나부터 다른 미용실들과 다르게 하려 노력했다.”


-미용실 이름이 ‘마샬’인 것도 그런 노력 중 하나일까.


“가게 이름부터 치열하게 고민했다. 1960년대에 주인 이름을 따지 않은 미용실은 우리가 처음이었다. 매장 이름이 곧 얼굴인데 성의 없이 지어선 고객 눈에 띌 수 없고, 살아남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당시 인기가 높았던 고데기 브랜드 ‘마샬’에서 이름을 땄다.”


-팔구십년대 잘나가던 미용실 브랜드들이 체인점으로 세를 확장할 때도 마샬은 직영점을 고집했다는데.


“(이름만 빌려주는) 체인점 방식으로는 숙련된 디자이너를 보유하기 힘들다. 레스토랑은 뛰어난 셰프가 한 명 있으면 굴러가지만, 미용실은 헤어 디자이너 한명, 한명이 일류여야 한다. 예전에 서울 반포에 첫 지점을 냈을 때 한 고객이 ‘여기 마샬 이름만 빌린 곳 아닌가, 명동에 그 원장님 살아계시나’라고 하길래 ‘제가 그 원장입니다’라고 답한 적이 있다. 여전히 30년 이상 우리 매장을 찾는 단골 손님이 많다.”



하종순은 1958년 성신여고를 졸업한 뒤 곧장 종로에 있는 이모의 미용실에 취업했다. 6·25전쟁 이후 아버지의 사업이 기울면서 생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왜 미용사였나.


“어렸을 때부터 손재주가 좋았고, 친구들 머리 만져주는 걸 좋아했다. 여고 시절 극장에 가는 친구들이 어른처럼 머리를 해달라고 하면 ‘구르프’라 부르던 헤어롤로 웨이브 들어간 머리를 멋들어지게 만들어줬다. 미용사 자격증이 없어 이모 미용실에선 계산대 업무를 했는데 당시 미용사들이 툭하면 결근했다. 그러면 내가 롯드(파마 롤)에 은박지를 씌우고 손님 파마를 해드렸다.”


-한국 1호 미용사인 오엽주 선생의 제자다.


“오엽주 선생이 운영하던 동화백화점(현 신세계백화점 본점) 미용실은 당시 최고였는데 이모 가게에서 일하던 분들이 많이 옮겨갔다. 그 매장에서 우연히 오 선생을 만났는데 ‘손재주가 좋다고 들었다’며 영입 제안을 하시더라. 2년 동안 그분 밑에서 미용 보조를 하면서 정식 디자이너가 됐다.”


-결혼 후에 일을 계속하기 어려웠을 텐데.


“아이 셋 키우면서도 거의 쉬지 않고 일했다. 시댁이 보수적이어서 내가 미용일 하는 걸 좋아하지 않았지만 한창 미용실 일이 즐거울 때라 포기할 수 없었다. 시어머니 몰래 시댁 어른 중 한 분에게 돈을 빌려 권리금 80만원을 주고 명동에 지금의 마샬 본점을 차렸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용기가 대단했다.”


-집안 반대를 어떻게 극복했나.


“남편이 출근하면 나는 한복을 싸들고 미용실로 갔다. 퇴근하기 전 집에 전화 걸어 남편이나 시댁 식구들이 와 있는지 확인한 뒤 ‘친구 만나고 왔다’며 한복을 입고 귀가했다. 그 당시엔 외출할 때 한복을 많이 입었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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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샬 제공 1977 미스코리아 진(眞) 김성희(왼쪽)와 하종순 마샬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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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사자머리’를 한 1989년 미스코리아 선 고현정. /유튜브

“걷는 자세만 봐도 ‘眞 감’ 알아봐”

1970년대 들어 한국 미용실은 미스코리아를 얼마나 배출했느냐에 따라 그 위상이 달라졌다. 마샬에선 1992년 궁선영까지 미스코리아 진(眞)만 15명이 나왔다. ‘미스코리아 산실’이라는 입소문을 타면서 다른 곳보다 1만원 넘게 비싼 가격에도 2030 여성들이 줄을 섰다.


-’사자머리’는 미용 트렌드를 바꿔놨다. 어떻게 개발했나.


“당시 한국은 한복을 많이 입어서 올림머리를 많이 했는데 미스 월드 같은 국제 대회에 가보니 서양 여성들은 머리를 풀어 한껏 부풀리더라. 머리에 볼륨감을 주고 왕관을 씌우니 얼굴이 작아보이고 여왕처럼 우아해 보였다. 그 스타일을 한국에 처음 들여왔더니 모든 미용실이 따라했다. 나는 한 번도 사자머리라고 말한 적 없는데 언론에서 그렇게 이름을 붙였다. 덕분에 유명해졌지만 아리따운 여성한테 사자라니, 하하!”


-미스코리아 지망생들을 어떻게 가르쳤나.


“영업이 끝나면 미용실에서 워킹 교육을 하고, 피부 관리 해주고, 치과 의사가 와서 치아 교정도 했다. 심사위원 앞에서 좋은 점수를 받기 위한 스피치 교육도 했다. 이 과정에 1, 2년 걸렸다. 걷는 자세만 봐도 진이 될지가 보였다. 요즘으로 치면 아이돌 그룹을 키우는 연예 기획사와 비슷한 일을 한 셈이다.”


-미스코리아 당선자가 늘면서 고객이 급증했을 것 같다.


“예비 신부들이 새벽에 웨딩 드레스를 입은 채 매장 계단에 1시간 넘게 기다렸다가 들어왔다. 요즘 말로 오픈런을 한 거다. 한창 때는 고객이 너무 몰려 명동 본점에 헤어 디자이너가 40명이 넘었다.”


하종순은 미스코리아 대회 ‘큰손’으로 떠오르면서 각종 미인 대회 심사위원으로 활동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몇 차례 구설수에 올랐다. 1993년에는 미스코리아 선발 과정에서 일부 지망생 부모로부터 돈을 받았다는 혐의로 구속되기도 했다.


-당시 ‘미스코리아계 권력’으로 불렸다. 선발에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의혹도 받았는데.


“항소심에서 무죄로 풀려났다. 그때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 한쪽이 답답해진다.”


-정말 문제가 없었나.


“당시 다른 미용실에서 미스코리아 지망생 부모들이 대회에 우선 출전하게 해달라는 명목으로 청탁성 금품을 준 경우가 있었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마샬에선 일절 부모에게 돈을 받지 않았다. 오히려 나는 사비를 들여 해외 대회에 동행하기도 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미스코리아는.


“미스코리아는 시원한 입매와 가지런한 치아가 중요한데 고현정은 그런 면에서 완벽에 가까웠다. 현정이가 처음 우리 가게에 왔을 때 고3이어서 1, 2년 기다렸다가 대회에 나가자고 했는데 본인과 엄마의 의지가 강했다. 현정이는 그때도 지금도 똑 부러지고 효심이 강하다. 부모에게 평소 ‘내 걱정 말고 엄마, 아빠 90살까지 건강해야 한다’고 말하는 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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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샬 제공 1989년 한 메이크업 행사에 나란히 선 하종순(왼쪽) 마샬 회장과 고현정(오른쪽).

“실력 있는 디자이너 뺏길 때가 가장 고통”


-60년 동안 미용업계는 얼마나 바뀌었나.


“나는 연탄불에 고데기를 데워서 손님 머리를 했지만 요즘은 미용 기기가 엄청 발전했다. 주 52시간 근무도 하고 사내 연애도 하고. 지금은 큰소리 함부로 못 내지만 한창 땐 직원들을 엄청 혼냈다.”


-어떻게 혼냈길래.


“미용실에서 잡담도 못하게 했다. 그렇게 배운 제자들은 나보다 더 혹독하게 가르치더라. 마샬 출신인 헤어뉴스 김인숙 대표에게 ‘넌 직원들 앉아 있지도 못하게 하니’라고 했더니 ‘다 회장님께 배운 거 잖아요’라며 받아치더라.(웃음)”


-미용실 운영하며 가장 힘든 점은 뭔가.


“어렵게 키운 인력을 경쟁 업체에 뺏기는 거. 1998년에 명동 본점에 불이 났다. 가장 먼저 한 게 소속 헤어 디자이너 수십명을 인근 로얄호텔에 머물게 한 다음 ‘세계적인 매장으로 리모델링할 테니 다른 매장 가지 말라’고 신신당부한 일이었다.”


-박승철, 박준 등 스타 미용사들도 배출했다.


“제자들이 독립할 때는 가게 부지를 알아봐 주며 지원했다. 마샬이 잘된 것보다 제자들이 나가서 성공한 게 더 기쁘다.”


하종순은 아흔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자서전이나 미용업에 대한 책을 쓸 생각이 없다. “마샬 문을 연 지 60년이 된 것도 기자 양반이 인터뷰하자고 해서 처음 알았어요. 창립 기념식도 안 했죠. 너무 힘들어서 미용실 일은 내 대(代)에서 끝내려 했는데 딸(김주승 마샬 대표)과 막내 손녀(엄지민)도 나와 같은 길을 걷겠다고 하는 걸 보니 잘 살아왔다는 생각이 드네요, 하하!”


[최인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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