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그래스를 먹고 자라는 켄터키 말처럼
[아무튼, 주말]
[한은형의 밤은 부드러워, 마셔] 민트 줄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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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켄터키 프라이드’를 보다가 참을 수 없이 민트 줄렙(Mint Julep)이 마시고 싶어졌다. 민트 줄렙이 나와서가 아니라 나와야 할 것 같은데 안 나와서. ‘켄터키 프라이드’는 켄터키 더비(Kentucky Derby)가 나오는 영화고, 민트 줄렙은 켄터키 더비의 공식 술인데 민트 줄렙이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알고 보니 민트 줄렙이 켄터키 더비의 공식 술로 지정(?)된 게 1938년이라는데 영화는 1925년 작이었다. 물론 내가 부주의해서 놓쳤을 수도 있지만 말이다.
켄터키 더비는 켄터키 루이빌의 처칠다운스 경마장에서 열리는 경마대회다. 매해 5월의 첫 번째 토요일에 열린다. 17만 명이 운집한다고 하니 켄터키주를 넘어 미국의 빅 이벤트라고 할 수 있겠다. 매해 켄터키 더비를 구경하는 게 기쁨이라고 말씀하시는 뉴욕에 사시는 분을 만난 적이 있다. 잠시 이야기했을 뿐인데 그 순간 켄터키 더비라는 세계가 들어왔다. 햇살에 반짝거리는 끝없는 초록 아래 곱게 빗질된 명마(名馬), 한껏 차리고 각양각색의 모자를 쓴 사람들, 또 그들의 손에 들린 민트 줄렙도.
술 관련 이야기들이란 도시 전설이거나 허무 개그 같아서 유래를 따지기 어려운 면이 있다. 술 중에서도 칵테일은 더하다. 엄밀하다거나 적확하다거나 이런 건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이를테면 켄터키 더비의 공식 음료(?)가 어쩌다가 민트 줄렙이 되었는가 같은 거 말이다. 칵테일 세계의 톤앤매너를 이어받아 내 나름대로 사정을 억측해 보자면 이렇지 않나 싶다. 켄터키 하면 버번의 고장 아니겠는가? 켄터키 최대의 축제인 켄터키 더비에서 켄터키 버번을 대대적으로 소비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범지역적 공감대가 형성되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켄터키 프라이드’가 만들어진 1925년에 나온 소설 ‘위대한 개츠비’에도 민트 줄렙이 나온다. 켄터키 루이빌 출신으로 나오는 데이지와 베이커가 즉각적으로 떠올리며 만들어 마시자고 하는 술이 민트 줄렙이다. 술을 꽤 잘 알고 소설도 꽤 잘 쓰시는 분인 피츠제럴드가 민트 줄렙을, 그리고 루이빌을 괜히 썼을 리 없다. 데이지와 베이커에게 ‘루이빌 출신’이라는 정체성을 부여하기 위해 민트 줄렙이 들어가게 되었다고 나는 본다. 이런 걸 보면 켄터키 더비의 공식 음료로 지정되기 전부터 ‘켄터키의 술은 민트 줄렙’이었던 것 같다.
처음에는 이런 맥락을 알지 못했다. 루이빌에 대해, 켄터키 더비에 대해, 민트 줄렙에 대해 알게 되자 이 부분이 다시 읽혔다. 술은 그저 술이 아니라 문화이기도 하고 지역이기도 하고 역사이기도 해서 술을 마시는 일은 이 모든 걸 마시는 일이기도 하다. 물론 이런 걸 모르고 마셔도 무방하다. 하지만 알고 마시면 더 맛있다. 민트 줄렙은 너무 그렇다. 세상에는 분명히 그런 것들이 존재한다. 책과 술을 좋아하기에 이렇게 책과 술이 포개질 때 술이 더 맛있다. 술을 마시는데 책을 마시기도 하는 초현실적인 기분이랄지요.
‘켄터키 프라이드’는 존 포드의 초기작으로 닭튀김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 원제가 Kentucky Fried인 줄 알았을 때는 미국 음식에 대한 영화인 줄 알고 보려 했는데 Kentucky Pride라는 걸 알고 나서는 ‘켄터키의 자긍심’이라는 이름의 경주마가 나와 결국 우승하는 영화인가 싶었고, 그렇기에 꼭 봐야 했다. 말을 좋아해서 말과 관련된 것에 관심이 있다. 그래서 켄터키 더비 이야기도 인상 깊게 남았겠지만 어쨌든 그렇다.
언젠가 인사동을 걷다가 ‘한국 경마 100년 전’ 전시에 나도 모르게 빨려 들어간 적이 있다. 주로 관계자로 보이는 분들이 위주인 전시회였는데 꽤나 흥미롭게 보았다. 아리랑, 연안부두, 천마총, 당대불패… 전시에서 본 한국 경마사에 이름을 남긴 말들의 이름이다. ‘켄터키 프라이드’의 주인공 말 이름은 ‘버지니아의 미래’다. 딸의 이름인 ‘버지니아’를 따서 마주(馬主)는 ‘버지니아의 미래’라는 이름을 짓는다.
특이하게도 이 영화의 주인공도 말, 화자도 말이다. 그러니까 말의 관점에서 진행되는 영화다. 주인공 말은 이런저런 간난신고를 겪고 사랑하는 말을 만나게 되는데, 초목을 엄청 활기차게 뛰어다니는 것으로 존 포드는 그녀의 사랑을 표현했다. 인간으로 치자면 환호작약하는 그런 몸동작이랄까. 그러고는 말은 신혼을 보내게 되는데 이해할 수 없는 단어가 나왔다. 블루 그래스. 정확히 기억은 안 나는데 ‘신혼은 블루그래스에서 보내길 추천해요’와 비슷한 톤이었다.
블루 그래스? 신선한 풀을 말하는 걸까? 아니면 블루 그래스라는 지명이 있는 걸까? 아니면 풀의 이름일까? 놀랍게도 블루그래스(Bluegrass)는 한 단어였다. 잔디 이름이며, 목초지를 가리키기도 하며, 켄터키의 별명이기도 했다. 아예 켄터키를 블루그래스라고도 하며 블루그래스라는 밴드도 있었다. 또 블루그래스 밴드와 비슷한 음악을 통칭해 블루그래스라고도 했다. 상당히 복잡한 것 같지만 블루그래스가 곧 켄터키 그 자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켄터키 하면 버번이며 민트 줄렙이듯이 또한 블루그래스이기도 하다는 말이었다. 켄터키 말은 켄터키 블루그래스를 먹고 자라며, 그래서 더 우월하다는 의견도 보았다. 버번과 말이 켄터키 경제를 떠받치는 줄 알았는데 블루그래스도 한몫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하, 여기까지 쓰니 더 민트 줄렙이 마시고 싶다. 버번과 민트, 설탕, 약간의 물과 얼음만 있다면 민트 줄렙을 만들 수 있다. 은잔이거나 은잔을 모사한 스테인리스 잔에 마시면 더 그럴듯하겠지만, 유리잔에 만들어도 나쁘지 않다. 어쨌거나 나는 지금 완벽한 민트 줄렙 한 잔이 마시고 싶을 뿐인데 집에는 버번이 없다. 어떤 버번을 써야 입맛에 맞을지도 모르겠다. 지금 떠오르는 묘안은 이렇다. 칵테일바에 가서 민트 줄렙 플라이트를 요청하는 것이다. 네 종의 버번으로 만든 네 종의 민트 줄렙을 마시고 싶다면서. 블루그래스를 먹고 자라는 켄터키 말처럼 민트 잎에 코를 박고 넉 잔의 민트 줄렙을 마시고 싶다는 나름의 포부.
[한은형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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