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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드]by 조선일보

바삭 촉촉한 ‘왕돈가스’의 귀환… 겁날 것 없던 사춘기 추억 떠오르네

서울 대흥동 '정든그릇'의 정든카츠./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점심 종이 울리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고등학교는 부산 사직운동장을 내려다보는 산 중턱에 있었다. 가파른 경사를 구르다시피 내려왔다. 분식집 문을 열면서 동시에 주문을 넣고 자리를 잡지 않으면 그 돈가스를 먹을 수 없었다. 소스를 흥건히 뿌리고 얇게 자른 돼지고기에 튀김옷을 두껍게 붙인 그 돈가스는 어릴 적부터 경양식이란 이름으로 익숙한 음식이었다. 고등학생들은 고기를 써는 게 아닌 갈기갈기 찢어 입에 넣기 바빴다. “그리 배고프나? 밥 좀 더 주까?” 아주머니는 또 우리가 괜히 안쓰러운지 한마디씩 건넸다. 후식으로 옆 가게에서 파는 핫도그를 먹으면 숨 가쁜 점심 시간이 끝났다. 벌써 20년도 훨씬 전 추억이다.


미국에서 들어온 패밀리 레스토랑과 햄버거 체인의 기세에 옛 경양식집들이 사라졌던 것이 얼마 전이다. 시대는 돌고 돈다. 청바지 바짓단이 20년 주기로 넓어졌다 좁아지듯, 경양식집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근래 땅값이 제일 많이 올랐다는 서울 용산 아모레퍼시픽 사옥 뒤편에 가면 그 현장을 목격할 수 있다. 가게 이름은 ‘북천’, 오전 11시 문 여는 시간에 맞춰 줄 서는 ‘오픈 런’이 필수다.


한정식을 팔 것 같은 예스러운 이름이지만 좁은 주방에서 내놓는 대표 메뉴는 소스가 듬뿍 올라간 ‘브라운 돈가스’다. 경양식 돈가스라 하면 우선 얇은 두께가 떠오르지만, 이 집은 다르다. 손가락 마디 하나 두께의 고기를 썰어 한입 넣을 때마다 입안이 가득 찼다. 고기의 두께만큼이나 소스의 질감과 무게감도 두터웠다. 굵직한 붓으로 덧칠한 유화처럼 짙은 갈색으로 빛나는 소스는 밀가루를 볶아 넣은 듯 구수한 풍미가 났고 산미는 상대적으로 적었다. 뜨거울 때 끼얹어 돈가스에 달라붙듯 스며든 소스 덕에 맛에 빈틈이 없었다. 하얗게 눈이 내린 듯 소스를 얹은 ‘화이트돈가스’는 돼지고기의 고소한 맛을 몇 배 증폭시켰다.


서울 서쪽 화곡동에는 주인장 본인의 이름을 내건 ‘김희라 한국식왕돈까스’가 있다. 1996년 문 연 이래 단 한 번도 냉동고기를 쓴 적 없다는 자부심을 내건 이 집에 들어서니 넓은 실내와 또 그만큼 넓은 주방이 눈에 들어왔다. 요리사는 하얀 옷을 입고 작은 팬을 붙잡고 있었다. 깍두기와 풋고추, 쌈장이 먼저 상에 올랐다. 되직한 수프와 장국도 1인당 하나씩 마련됐다.


정식에는 함박스테이크, 돈가스, 생선가스가 함께 나왔다. 고기 두께는 얇았지만 씹는 맛이 적당히 살아 있었다. 고기에 잡내는 없었고 살짝 묵직한 소스는 가랑비처럼 촉촉히 고기에 스며들었다. 스파게티를 시키니 주방에서 작은 팬이 바쁘게 돌았다. 삶은 면을 버터에 가볍게 볶고 그 위에 미트소스를 올렸다. 버터 향이 은은히 밴 스파게티는 옛 추억으로만 먹는 음식이 아니라 숙련된 기술이 들어간 요리였다.


서강대 근처 대흥역에 가면 ‘정든그릇’이라는 집이 있다. 오전 11시 30분 식당 문이 열리기 전부터 사람들이 주변을 서성였다. 문 여는 시간에 맞춰 가게에 들어가기 위해서였다. 원목으로 깔끔하게 마감된 이 집은 손님을 우르르 받지 않았다. 주방에 조리가 밀리지 않게, 한 팀씩 차분히 가게 안으로 들였다.


경양식이란 수식이 붙은 ‘정든가츠’는 돼지 안심과 등심, 간 소·돼지고기를 뭉쳐 튀긴 ‘멘츠가스’가 하나씩 총 세 덩이가 나왔다. 크림을 넣은 듯 색이 밝은 소스는 유지방 특유의 감칠맛이 강하게 돌았다. 굵은 튀김가루를 써서 만든 돈가스는 넉넉히 부은 소스에도 바삭한 식감을 잃지 않았다. 동그랗게 담은 밥, 양배추 샐러드, 토마토 초절임, 따라 나온 장국까지 구색 맞추기용은 없었다.


‘돈가스 덮밥’은 돈가스 위에 가쓰오부시 향기가 듬뿍 나는 국물과 달걀을 끼얹었다. 라멘 국수에 산초·후추·고추기름 등으로 양념한 간 돼지고기, 가쓰오부시(가다랑어포) 분말, 수란, 김가루, 파를 올려 비벼먹는 ‘마제소바’는 매콤한 맛이 기분 좋게 올라왔고 면발은 탄력을 끝까지 잃지 않았다. 남은 양념에 딸려 나온 밥까지 비벼 먹었다. 한 그릇 비우기가 사탕 한 알 까먹는 것처럼 수월했다.


깔끔하게 차려진 상을 비우고 나자 뒤늦은 포만감이 찾아왔다. 저녁 식사량을 줄여야겠다는 생각도 동시에 들었다. 예전에는 점심을 한껏 먹고도 저녁이 되면 다시 배가 고팠다. 나이가 들수록 위장도, 혈기도, 감정의 진폭도 줄어든다. 변하지 않는 것은 그때의 기억뿐. 그 기억을 좇아 지금도 경양식집을 들락거린다. 그곳에는 세상이 만만해 보였던 사춘기 소년의 체취가 여전히 남아있다.

# 북천: 브라운 돈가스 1만2000원, 화이트 돈가스 1만5000원. (02)796-2461


# 김희라 한국식왕돈까스: 정식 1만1000원, 스파게티 8500원. (02)2601-0636


# 정든그릇: 정든카츠 1만3000원, 돈가스 덮밥 9000원, 마제소바 1만원. (0507)1371-2179

[정동현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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