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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취 여성과 '추행 논란' 사이....경찰은 고민 중

강남에서 女주취자 머리채 흔든 경찰관 대기발령

주취자 방치할 수도, 흔들어 깨울 수도 없다

일선 지구대 ‘접촉 없이 주취자 깨우기’ 매뉴얼 자체개발


지난달 3일 오전 5시 30분, 동이 튼 서울 강남구 논현동 건물 앞 길바닥에 만취한 여성이 주저앉아 있었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강남경찰서 기동순찰대 소속 이모 경위는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던 이 여성의 머리카락을 움켜쥔 채로 2~3차례 앞뒤로 흔들었다.


현장에 있던 한 시민이 휴대전화로 7초 안팎의 동영상을 촬영, 소셜미디어(SNS)에 올리면서 ‘과잉대응’ 논란이 일었다. 영상을 접한 시민들은 "여성이 경찰을 위협하지 않았는데도 머리채를 잡았다", "이런 행동은 다른 경찰까지 욕 먹게 한다"는 댓글을 달았다.


이 경위는 "귀가 조치를 위해 부른 택시가 도착할 때까지 여성 머리가 바닥에 부딪치지 않도록 붙잡고 있었던 것"이라며 "여성과 신체 접촉을 최대한 피하려다 보니 (피부가 아닌) 머리카락을 쥐었다"는 취지로 해명했다. 그러나 강남서는 이 경위가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것으로 판단하고 대기 발령 조치를 내렸다.


◇주취자, 방치할 수도 없고 직접 만지기도 그렇고…

주취자(酒醉者) 대응은 일선 경찰관들에게는 ‘정답이 없는 난제’다. 주취자의 주관적인 심기에 따라 ‘민원 성취도’가 좌우되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여성 주취자 앞에서는 일단 얼어 붙는다는 경찰관도 있다. 서울지역에서 근무하는 경찰 관계자는 "여성 주취자 신체에 손이 잘못 가면 성추행 혐의로 고소당할 수도 있다는 ‘공포 심리’가 있다"고 말했다.


2016년 7월, 서울 마포구 홍익대 부근에서 술에 취한 30대 여성이 출동한 순경 A(25)씨에게 "나랑 사귀자", "키스해 달라"고 추근덕댔다. 그는 A씨가 자신의 말을 무시하자 4~5차례 따귀를 때리기도 했다. 경찰 관계자는 "현장에서 남성 경찰관이 성적 수치심을 느낄만한 일도 심심찮게 벌어진다"며 "여성 주취자를 보호하는 데에 중점을 두다 보니 (경찰관이) 참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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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일 기자가 서울 마포경찰서 홍익지구대에서 주취자 매뉴얼 체험을 했다./홍익지구대 제공

주폭(酒暴)도 문제다. 청와대 청원게시판에는 자신을 파출소에서 근무하는 일선 경찰관이라고 소개한 청원인이 "3년간 근무하면서 (주취자에게) 이유 없이 맞은 사례가 스무 번이 넘는다"면서 "저의 피 멍을 본 어머니가 다치기만 하는 경찰 일은 관두라 하신다"고 쓰기도 했다.


사정이 이렇지만, 일선 경찰서에 제시되는 주취자 대응 매뉴얼은 따로 없다. 결국 주취자가 특히 많이 몰리는 지구대에서는 자구책 차원으로 해법을 만들어내고 있다. 전국에서 112신고 처리건수가 가장 많은 서울 마포구 홍익지구대가 대표적이다. 홍익지구대가 관할하는 지역은 유흥업소가 밀집한 서울 지하철 2호선 홍대입구역 부근으로 지난해 처리한 112 신고만 3만5000여건에 달한다. 하루 평균 95건 꼴로 신고가 들어온 셈이다.


작년 1월 부임한 손병철(49) 홍익지구대장은 술에 취해 길바닥에 잠든 주취자들을 귀가 시킬 방법을 고민하던 끝에 나름의 대응 매뉴얼을 고안(考案)했다. 매뉴얼 요점은 접촉을 최소화하되, 선량한 시민들에게 피해가 없게끔 주취자를 깨우는 것. 손병철 홍익지구대장은 "홍익지구대는 주취자 대응이 주요업무 인만큼, 자체적인 대응수칙 개발이 필요했다"며 "지구대 자체적으로 ‘주취자 깨우기’ 매뉴얼을 현장에 적용하고 있는데 꽤 효과적"이라고 말했다.


◇"아가씨 좀 깨워보겠습니다"...4분만에 끝난 주취자 처리

기자가 마포서 홍익지구대 주취자 대응 매뉴얼을 직접 체험했다. 만취한 상태를 가장하고 지구대 바닥에 드러눕는 것부터 시작했다. 신체 일부를 쥐고 흔들거나, 소리 지르는 않아도 되는 방법이 하나 있었다. 바로 ‘차가운 물’이었다.

①경찰은 주취자(기자)를 발견하자, 들 것으로 몸을 덮었다. 토사물이 기도를 막는지도 확인했다. 다음은 주취자에게 고지할 차례. "아가씨, 좀 깨워보겠습니다." 이후 경찰관이 팔꿈치, 손목, 무릎 등을 툭툭 치면서 대화를 시도했다. 주취자 대다수는 이 단계에서 정신이 든다고 한다.


②그래도 일어나지 않은 만취자(漫醉者)도 있다. 기자도 만취자처럼 꼼짝하지 않고 누워 있었다. 그러자 경찰관들이 500mL 생수병을 들고 오더니 기자의 얼굴에 물을 튀겼다. 눈에 물이 들어갔다. 가만히 있기 어려워졌다. 물을 닦아 내기 위해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손도 저절로 얼굴 쪽으로 향했다. 만취자들도 대개 얼굴에 물을 튀기면 잠에서 깬다고 한다.


"팔의 일부(급소)를 세게 누르는 등 경미한 고통을 가해 깨우는 방법도 있지만 힘을 행사하면 더욱 난동을 부리는 주취자가 있습니다. 시원한 물을 튀겨서, 이들을 자극하지 않고 스스로 정신 차리도록 하는 겁니다." 홍익지구대 관계자 얘기다.


③얼굴에 물이 튀어도 깨어나지 않을 경우에는, 소방당국과 공조해서 병원으로 옮긴다. 매뉴얼에 따르면 이때도 경찰들은 "아가씨, 좀 일으켜 세우겠습니다"라고 여러 번 고지하고 자세를 취해야 한다. 경찰관이 2인 1조로 주취자 양 옆에 자리한 뒤 팔을 겨드랑이 사이에 끼운 뒤, 직각으로 세워 올린다. 신체접촉을 최소화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경찰관 쪽으로 주먹질 못하도록 포박(捕縛)하는 것이다.


④부축으로도 깨어나지 못 할 경우에는 홍익지구대가 자체적으로 제작한 들 것을 활용한다. 이 과정에서도 ‘신체접촉 최소화’ 원칙은 유지된다. 경찰관은 팔목과 무릎 부위의 옷을 위로 끌어 올려 들 것에 옮겨 싣는다. 들 것 위에서 자세를 똑바르게 잡아줄 때에도 손목·발목 등으로 신체 접촉이 제한된다.


여기까지 4분 밖에 걸리지 않았다. 손병철 홍익지구대장은 "자체 매뉴얼은 주취자로 인해 경찰관이나 선량한 시민들이 피해 보는 일은 없게끔 하는 데에 초점을 뒀다"고 말했다.


◇"119 공조 요청이 최선" VS "어디까지 책임져야 할지"

일선 경찰들 사이에선 주취자 대응을 두고 의견이 분분하다. 주취자에 대한 민원신고 때문에 현장에 출동하지만 여러 제약으로 대응의 효율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한 경찰은 "괜한 의협심이 생겨 끝까지 주취자를 (경찰이) 보호하다가 잘못되면 모든 책임은 경찰이 지게 돼 있다"며 "주취자를 깨워서 집에 돌려보내는 게 가장 좋지만 그렇지 않다면 119공조를 요청하는게 경찰이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했다.


또 다른 경찰은 "막상 현장에 나가면 어디까지 (경찰이) 책임지고 나서서 처리해야할지 혼란스러울 때가 있다"라며 "정신이 든 것 같아 두고가면 두고간대로, 119로 넘기면 넘기는 대로 항의도 많이 들어와 스트레스가 크다"라고 했다.


일선 지구대에 있는 한 경찰은 "대개 주취자 처리는 민원 신고로 출동하는데, 만취했을 경우 정신이 들 때까지 ‘기분 나쁘지 않게’ 귀가 시키는걸 반복할 수 밖에 없다"며 "때로는 경찰이 무슨 서비스업 같기도 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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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핸콕’에서 극중 초인 역할을 맡은 핸콕(윌 스미스)이 위험에 빠진 여성을 구해주기 앞서 “몸에 손대도 되느냐”고 묻고 있다. 미국에서 벌어지는 경찰의 성추행 논란을 패러디한 것이다. /영화 핸콕 캡쳐

[전효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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