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선 회식이 첨단이라고? 부장님, 이건 벌이네요
코로나로 직장 온라인 송년회 확산
‘지방방송’ 못하는 ‘초집중 회식’
“술 강요, 2차 없으니 그나마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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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대리, 왜 화면은 꺼 놓는 거야. 한마디 하지?” 지난 3일 오후 6시 경기도 수원 집에 있는 컴퓨터 앞에 앉은 중소 식품 가공업체 김수현(34) 대리는 컴퓨터에서 흘러나오는 호통에 식은땀을 흘렸다. 팀원 10명이 각자 집 컴퓨터 앞에 앉아 화상으로 진행한 ‘랜선(비대면) 팀 회식’을 하는 중이었다. 팀장이 법인 카드로 족발을 배달시켜준 것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이 족발을 노트북 앞에 차리는 사이 네 살 아들이 자기도 먹고 싶다며 울고불고 난리를 쳤고 김 대리의 무선 이어폰을 냉장고 밑으로 던져 버렸다. 상황 수습을 위해 잠시 줌(Zoom·화상 회의 프로그램) 화면을 끄는 순간을 팀장은 놓치지 않고 지적했다. 이어폰 없이 급한 대로 노트북 마이크에 대고 상황을 설명했더니 이번엔 또 다른 핀잔이 돌아왔다. “아니, 하울링(소리 울림 현상)이 너무 심하잖아!” 김씨는 말했다. “화상 회의 한번 함께 안 해본 팀장이 랜선 회식 하자고 했을 때 느낌이 좋지 않더니만, 결국 제가 표적이 됐네요. 한 시간 반 동안 팀장의 덕담 겸 잔소리를 듣고, 돌아가면서 ‘랜선’ 건배사를 하느라 진이 다 빠졌습니다.”
사회적 거리 두기 강화로 오후 9시 이후 모임이 금지되고 회식도 대부분 취소되면서 송년 회식을 비대면으로 바꾼 회사가 많다. ‘랜선 회식'이라고 하는데, 각자 집에서 술과 음식을 먹으면서 줌(Zoom) 등 화상 회의 프로그램을 통해 온라인으로 만나는 방식이다. 취업 포털 사이트 인크루트가 기업 회원 663명을 대상으로 조사했더니 24%가 “온라인 회식, 종무식 등 비대면 연말 행사를 진행할 것”이라고 했다. 고단한 한 해, 마무리라도 함께하자는 취지는 나쁘지 않지만 정작 랜선 회식을 해본 직장인들 생각은 좀 다르다. 오프라인 술자리에서 느끼지 못한, 강하고 진한 피로를 느꼈다는 이가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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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 방송' 못 하는 랜선 회식 “너무 피곤해”
직장 상사들은 ‘랜선 회식’을 첨단 문화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Mint가 만난 직장인 중 상당수는 랜선 회식을 ‘신종 스트레스'로 여기고 있었다. 대기업 2년 차 사원 최모(29)씨는 부서 막내라는 이유로 ‘랜선 회식 준비위원장’을 맡았다. 보통 송년회는 식당 예약만 하면 끝이었는데 랜선 회식은 썰렁할 수 있으니 사회를 보라고 했다. 최씨는 “팀장의 발언이 이어지는 중에 줌이 무료로 제공하는 ’40분'이 끝나 회식이 중단돼 버렸다. 팀장에게 ‘그런 것도 안 챙기느냐'며 한 소리 들었다”고 했다.
올해 3월 이후 수차례 랜선 회식을 해봤다는 A 밴처캐피털 정모 팀장은 “몇 번 랜선 회식을 하면서 준비된 사회자가 꼭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됐다”고 했다. 알아서 잡담을 나누고, ‘부장님 말씀'을 잠시 경청하면 되는 정도인 오프라인 회식보다 훨씬 정교한 계획이 필요하단 뜻이다. 정 팀장은 “화상 회의 프로그램 특성상 여러 명이 말하면 모두가 겹치는 소리를 듣게 된다. 한 명이 말하고 나머지는 듣도록 규칙을 정하지 않으면 귀가 상당히 괴로워진다”고 했다.
랜선 파티는 사회자 역할을 맡은 참가자가 한 명씩 돌아가면서 발언권을 주고, 나머지는 잡음이 섞이지 않도록 ‘음소거’ 상태를 유지해야 제대로 돌아가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때그때 ‘타이밍’에 맞춘 행동을 일사불란하게 해야 하는 바람에, 회식의 ‘느슨함’이 사라지고 만다는 이가 적지 않았다. 정 팀장 얘기다. “우리 회사에선 발언하고 싶으면 맥주 잔을 들고 사회자가 발언자를 지목하기로 했어요. 그런데 사회자가 수십 명 화면을 어떻게 다 보겠어요. 채팅 창만 불났어요.”
사회자를 세워놔도 돌발 상황은 생긴다. 지난달 판교의 한 IT 기업은 전 사원 70명 비대면 워크숍을 했다. 진행을 맡은 인사팀장은 며칠 전 미리 임직원들에게 3만원 상당 배달 앱 쿠폰을 배포했다. 음식도 잘 차려졌겠다, 그는 준비된 시나리오대로 대표 인사, 신입 사원 소개, 건배사 등을 이어갔다. 하지만 갑자기 인사팀장의 방 안으로 일곱 살 딸아이가 난입했다. 아이가 소리를 지르며 아빠에게 달려들자 착착 돌아가던 워크숍은 그야말로 난장판이 됐다. 당시 참가자인 박모(35) 과장은 “몇몇 직원은 옆에 자식을 데리고 참가했는데 그 아이들도 신나서 소리 지르고 난리를 쳐서 도저히 수습 불가 상황이 됐다”고 했다.
핀테크 스타트업의 팀장급 관리자 A씨는 “남이 발언하면 오프라인 회식보다 훨씬 집중해서 들어야 하기 때문에 피로도가 훨씬 심하다. 자칫 피곤해지기 쉽고, 화제도 금방 떨어져 1시간 정도가 지나니 더 버티기 어려웠다”고 했다. IT기업 4년 차 대리 B씨는 지난달 랜선 회식 중 잠시 스마트폰을 들어 팀 동료와 카카오톡을 하다가 팀장에게 “여자 친구와 연락하느냐”고 핀잔을 들었다. 그는 “일반 회식과 랜선 회식은 근본부터 다르다. 가장 큰 어려움은 일반 회식은 소위 끼리끼리 떠드는 ‘지방 방송’이 가능했지만, 랜선 회식은 모두가 앞만 보고 한곳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더라”고 했다.
◇ “ 사회자와 함께, 소규모로, 1시간 안에”
온라인 커뮤니케이션이 익숙한 테크 기업들은 랜선 파티도 잘 준비해서 제대로 하는 편이다. 넷플릭스코리아는 지난 4일 오후 전 직원 70여 명이 줌을 통해 전 직원 정기 미팅 행사를 가졌다. 전문 사회자를 고용해 경품 퀴즈 행사, 장기 자랑 등 프로그램을 3시간여 진행했다. 원하는 직원에게는 음식을 시켜 먹을 수 있도록 배달 앱 쿠폰을 미리 지급했다. 배달의민족을 운영하는 우아한형제들은 전 직원 1000명이 참여하는 ‘비대면) 송년회’를 열 예정이다. 변연배 우아한형제들 인사총괄 이사는 “각자에 집에서 온라인으로 송년회를 재밌게 즐길 수 있도록 다양한 콘텐츠를 기획하고 있다”고 했다.
랜선 회식엔 장점도 있다. 경험해본 이들은 “코로나 국면 장기화로 쌓인 우울감을 없애는 효과가 있다”고도 한다. 미국 구직 업체 몬스터가 지난달 직장인 1700명을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59%가 ‘회사가 랜선 파티(virtual holiday party)를 주최하면 좋겠다'고 답했다. 이 회사의 커리어 전문가인 비키 살레미는 미 CNBC에 “화상 송년 파티는 동료애를 쌓고 친교하는 데 가장 안전한 방법”이라고 했다. 술 강권이나 ‘2차'가 없다는 것도 랜선 회식의 장점으로 꼽힌다.
기왕 온라인 파티를 해야 한다면 어떤 방식이 좋을까. 기업 인사 담당, 행사 전문가 등이 Mint에 즐거운 랜선 회식을 위해 조언한 내용을 종합하면 ①소규모 ②짧은 시간 ③사회자와 프로그램 등 키워드 셋으로 요약됐다.
편의점 CU를 운영하는 BGF리테일은 지난달 신입 사원 70여 명의 비대면 회식을 6명 이하로 조를 짜 보름간 총 12회에 걸쳐 진행했다. 유억권 BGF리테일 홍보팀장은 “신입 사원끼리 부담 없고 자유로운 대화를 유도하기 위해 한 조에 6명이 넘지 않도록 했다”고 말했다. 사회자와 프로그램도 꼭 필요하다. 비대면 행사 전문 스타트업 세모파이의 이명길 대표는 “자칫 대표의 일장 연설로 이어지는 것을 방지하려면 사회자가 간단한 술 게임이나 레크리에이션 프로그램을 준비하는 것이 좋다”며 “20명 이상 대규모 인원이면 화상 회의 프로그램이 갑자기 중단되는 사태 등을 막는 ‘네트워크 담당'도 지정해두는 것이 좋다”고 했다. 이 대표는 중간중간 경품을 건 퀴즈를 내거나 제기차기 같은 랜선 체육대회를 통해 ‘정면만 응시'해야 하는 피로도를 줄이라고 조언했다. 그런데, 사회자와 네트워크 관리자는 그럼 술을 마시지 말아야 할까. “강제적 혁신엔 어쩔 수 없는 희생자가 나오기 마련 아닙니까. 온라인으로 남들이 취해가는 모습을 보는 재미도 나쁘지 않던데요,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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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형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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