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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by 조선일보

대기업 첫 출근날 사표쓰고 유엔으로 날아간 남자

[아무튼, 주말]

20년째 굶주림과 싸우는

세계식량계획 임형준 소장

“시내에서 아침 먹고 돌아가려는데, 갑자기 총성이 울렸죠. 하필 사무실 방향이 그쪽이라…. 귀가 쩌렁쩌렁 울리는데도 걸어 들어갈 수밖에 없었어요.”

낯선 나라에 도착한 지 45일 만에 쿠데타가 일어났다. 굶주린 사람들을 도우러 간 곳이었다. 하루아침에 대통령이 축출되고 군부가 정권을 잡았다. 기아 문제 해결을 위한 논의도 원점으로 돌아갔다. 아프리카 기니공화국에 파견된 유엔 세계식량계획(WFP) 임형준(50) 소장에게 벌어진 일이다. 임 소장은 한국 사무소에서 지난 10년간 소장으로 활동하다, 지난 7월 기니로 발령났다.


유엔에서만 20년 넘게 활동한 임 소장의 이력이 독특하다. 스무 살에 배낭을 메고 미국으로 날아간 뒤 80국을 여행했다. 돌아와 ‘나는 지구를 콱 삼켜버렸다’는 제목의 책을 냈다. 26세에 대기업에 합격했지만 입사 첫날 퇴사했다. 이유는 출근길 ‘좀비 부대’의 일원이 되기 싫어서! 그가 결국 선택한 곳은 유엔. 뉴욕 본부 인턴으로 시작해 빈곤 국가의 기아 종식을 책임지는 자리에 올랐다. 기니로 출국하기 전 임 소장을 만났다. 출국 후 한 차례 더 화상으로 만났다.

◇“쿠데타 일어난 나라에서 일합니다”

-영화에서나 보던 총격이 눈앞에서 벌어졌다고.


“지난 9월 5일 오전 8시, 사무실로 돌아가는 길에 군인들이 총을 쐈다. 민심이 안 좋은 줄은 알았지만, 쿠데타는 생각지도 못했다. 카톡에 불이 났다. 충격이 컸지만 두려워하고만 있을 순 없었다. 사무실로 돌아가기 위해 총성이 나는 쪽으로 걸었다. 3년 임기 동안 시간만 때울 순 없으니, 빨리 정신줄을 붙잡아야 했다.”


-기니 사무소에선 어떤 일을 하나.


“한국 사무소에서는 모금과 홍보를 주로 했다면, 기니에선 실제로 배고픈 사람을 상대한다. 이곳엔 당장 굶주린 사람이 40만명 정도 된다. 올해는 코로나뿐 아니라 에볼라와 마버그 바이러스까지 발생하면서 상황이 더 심각하다. 우리 사무소는 주민들이 쌀농사를 짓도록 논을 확장하고, 쌀을 팔 수 있도록 저장 시설과 판로를 만든다. 그리고 추수한 쌀을 제값에 사서 학교 급식으로 납품하는 일을 한다.”


-원해서 간 나라인가.


“우리는 UN 본부에서 하라는 대로 한다. 그리고 나는 꼭 현장 소장이 되고 싶었다. 기니와 우리나라는 1964년에 똑같이 유엔 세계식량계획이 지원을 시작했다. 우리나라는 20년 만에 수원국을 졸업하고 현재는 10위권 공여국이 됐다. 반면 기니는 6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도 원조를 받고 있다. 보크사이트라는 지하자원도 많고 가능성이 많은 나라인데, 곳곳에 만연한 부정부패 때문에 지원을 받아도 어려운 사람에게 돌아가지 않는다. 그래서 배고픈 사람에게 직접, 지속 가능한 도움을 주고 기아를 끝내는 게 세계식량계획의 역할이다.”


-가족을 지구 반대편에 두고 와 마음이 편치 않겠다.


“아내와 아홉 살 난 아들은 내년 1월에 기니로 올 예정이다. 아들은 구독자 300명을 거느린 유튜버인데 ‘아빠, 기니 소개 영상 찍으면 구독자 100만도 넘을 거야’라며 들떠 있다(웃음). 아내는 그림을 그리는데, 이곳에서 전시회를 열어 수익을 기부하고 싶다고 했다.”


조선일보

2019년 케냐의 소말리아 국경에서 식량 배급 후 난민들과 함께 웃는 임형준 소장. /WFP

◇풍경보다 가난이 먼저 보였다

-20대 초반에 80국을 다녔더라. 원래 고민보다 행동이 앞서는 성격인가.


“어머니 배 속에서부터 그랬다. 오죽하면 머리가 아니라 발부터 나왔겠나(웃음). 갓 스무 살 때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 고민을 안고 2만5000원 쥐고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왔다. 돈이 없으니 서울역에 머물렀는데, 감옥에서 갓 출소한 사람부터 노숙자, 사기꾼까지 만났다. 별의별 사람 만나는 게 좋았던 나는 번민의 돌파구로 해외여행을 택했다. 경비를 마련하려 방법을 찾은 것이 여행사 가이드 아르바이트였다. 한국인 30명을 데리고 유럽 곳곳을 다녔는데, 여비는 물론 팁도 쏠쏠했다. 그때 모은 돈으로 80국을 여행했다.”


-책도 냈더라. 여행 작가를 꿈꿀 수도 있었을 텐데.


“워낙 많은 나라를 다니다 보니, 보고 느낀 것들을 일기로 썼다. 그런데 하필 외환 위기가 터졌다. ‘나라 망하게 생겼는데 해외여행이 웬 말이냐’는 눈총이 두려워 책은 2년 뒤에 냈다(웃음). 여행을 전업으로는 삼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한 것도 그맘때다. 동대문 부근에서 70대 외국인 할아버지를 알게 됐는데 평생 여행만 해온 분이었다. ‘여태 집이나 가족이 없어 허무하다’고 하더라. 여행은 해도 ‘목표 없는 방황’은 하지 말아야지 생각했다.”


-그 목표가 왜 ‘굶주림 문제 해결’이 된 건가.


“좋은 곳, 좋은 사람 만나는 게 여행의 전부가 아니었다. 스마트폰도 없던 1990년대 초, 론리플래닛이라는 종이 책자를 참고하며 인도 카슈미르에 도착했다. 아름다운 관광지로 소개됐지만 내 눈에는 주민의 ‘가난’ ‘굶주림’이 먼저 보였다. 이들은 호수 위 ‘보트하우스’에서 살았는데, 당시 나는 하루 1달러를 내고 9~10명의 가족이 사는 배에서 묵었다. 방값을 아낄 의도도 있지만, 이들의 실상을 더 알고 싶었다. 떠날 때가 되자 그들이 ‘제발 하루만 더 있어 달라’며 내 손을 붙잡았다. 가난한 대학생 여행자에게 희망을 걸어야 하는 지독한 가난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됐다.”


-그래서 유엔으로 간 건가.


“곧바로 원하던 삶을 산 건 아니었다. 대학 졸업이 다가오자 취직의 압박에 지고 말았다. 여의도에 위치한 대기업에 지원해 합격했다. 첫 출근 날, 버스 안에서 고민했다. 도저히 내 길이 아닌 것 같아 결국 사표를 냈다. 일명 ‘여의도 회군’이었다(웃음). 그 뒤로 국제기구에서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100통 가까이 지원서를 냈다. 뉴욕에 있는 UN 본부와 알바니아에 있는 유엔개발계획(UNDP)에서 인턴을 하게 됐고, 외교부의 JPO(정규 국제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뒤 2002년부터 세계식량계획에서 일하게 됐다.”

◇ 도전하라, 결국 이루어진다

-작년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세계식량계획이 선정됐더라.


“빈곤국들이 코로나 직격탄을 맞아 식량 사정이 나빠졌는데, 이들을 도왔던 우리 노력이 빛을 본 것 같다.”


-수상 직후 반기문 전 유엔총장이 전화를 했다던데.


“얼떨떨한 와중에 반기문 전 총장이 직접 전화를 주셨다. 세계식량계획 중점 과제인 ‘제로 헝거(zero hunger)’는 2012년 브라질 리우에서 반 전 총장이 선언하면서 처음 알려진 캐치 프레이즈다. 총장님은 본인도 활동하면서 어려움을 많이 느꼈는데, 이렇게 대외적으로 인정받게 돼 기쁘고 축하한다고 하셨다.”


-반기문 전 총장과는 원래 아는 사이였나.


“총장 재임 당시 잠시 귀국하시면 나를 포함해 한국의 유엔 관계자들을 꼭 만났다.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꽉 찬 일정에 바쁘실 텐데도 꼼꼼하게 궁금한 점을 묻고, 친절한 말씨로 대해주셨다.”


-한국도 어려운데, 왜 해외 나라들을 돕느냐는 시선도 있다.


“우리나라도 한때 수혜국이었다. 전쟁 직후 우리는 국가 예산 70%에 해당하는 금액을 식량 원조로 받았다. 그 덕분에 나라를 꾸려온 것이다. 우리에게 원조를 준 나라에도 가난한 사람이 있었다. 그럼에도 더 어려운 국가에 도움을 줬고 우리나라가 성장할 수 있었다. 외국을 돕는 문제도 똑같이 적용해야 한다.”


-곧 세계식량계획에서 근무한 지 20년째다. 도움 줬던 이들 중 누가 먼저 떠오르나.


“2002년 세계식량계획에 입사한 뒤 처음으로 발령난 곳이 온두라스였다. 가뭄이 심한 지역에서 긴급 급식소 운영하는 일을 했다. 현지 복지부 공무원과 주변을 둘러보는데, 영양 상태가 특히 나빠 보이는 아이가 있었다. 야디라라는 이름을 가진 아이였는데, 엄마와 형제들이 영양 부족으로 전부 실명한 상태였다. 뼈만 앙상한 야디라를 병원에 데려가 치유식을 먹이고, 보살폈다. 기적처럼 2달 만에 보통 체격으로 돌아왔다. 지금까지 잘 살아있다면 바랄 게 없겠다.”


-어떻게 하면 유엔에서 일할 수 있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을 것 같다.


“동문서답일 수 있지만, 내 답변은 ‘결국은 된다’는 것이다. 막연하고 불안한 20대 초반, 투덜거린다고 변하는 건 없으니 당장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했다. 등교하면서 영자신문을 읽기 시작했고, 영어 회화 서클에 가입했다. 결국 전 세계를 여행하는 용기까지 낼 수 있었고, 유엔에도 도전하게 됐다. 막막한 길이라도 일단 시작하면, 결국은 된다.”


-쿠데타 후 3개월이 지났는데, 요즘 상황은 어떤가.


“지금은 잠잠해졌다. 당시 기억은 평생 잊히지 않을 것 같다. 총성은 머리 전체가 울리는 굉음이었다. 그런 와중에 사무실을 지키러 혼자 걸어 들어갔다니. 나 혼자서 전쟁 영화 한편을 찍었다. 만약 다시 그런 일이 벌어져도 사무실로 갈 거냐 묻는다면, 그건… 생각해봐야 한다. 하하!”


신지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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