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라이프]by 조선일보

김성근 “내 인생은 파울, 파울, 파울…끈질기게 다음 기회 노렸다”

[아무튼, 주말]

[박돈규 기자의 2사 만루]

약팀을 강팀으로 바꾼 ‘野神’

야구장의 철학자 김성근 감독

프로 통산 1384승 1202패를 거둔 김성근 감독은 “비상식으로 싸워온 벼랑 끝 인생이었다”고 회고했다. “혹사 논란에 비난도 숱하게 들었지만 악조건 속에서 문제를 돌파하려면 새로운 길을 찾아야 했다.” /장은주 영상미디어 객원기자

프로야구에서 김성근(81) 감독보다 많이 잘린 사람은 없다. 그런데 별명이 ‘야신(野神)’이다. 알쏭달쏭한 일이었다. 한국 프로야구 감독직에서 일곱 번이나 퇴출당한 사람이 어떻게 ‘야구의 신’으로 불릴 수 있을까.

지난 11일 서울숲 근처 카페에서 김성근 감독을 기다렸다. 주룩주룩 비가 내린 날이었다. 질문을 30개쯤 준비했다. 직구와 변화구를 이쪽저쪽으로 섞어 던져야지 마음먹었다. 그 질문들을 야신이 어떻게 받아칠지 궁금했다.


인생은 순간이다. 김 감독이 지난달 펴낸 책 제목이었다. 띠지에 “죽었다 깨어나도, 나이를 먹었다 해도 계속 성장하지 않으면 자리가 없다”는 문장이 쾅 박혀 있었다. 15일 현재 교보문고 베스트셀러 종합 15위. 책장이 술술 넘어갔다. 여러 군데 밑줄을 그으며 ‘김성근은 야구장의 철학자’라고 생각했다. 진지한 표정으로 나타난 팔순의 감독에게 초구를 던졌다. 좋은 인생이란 무엇입니까?


“나는 ‘어차피 (안 될 거야)’ 속에서 ‘혹시 (될까)’라는 조그만 희망을 만드는 것, 그게 좋은 인생이라고 생각해요. 최악의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해 어떤 결실을 보는 일을 여지껏 해 왔습니다. ‘김성근에게 맡기면 반드시 새로운 야구를 한다’는 불문율을 만들어냈지요.”



조선일보

김성근은 좌완 정통파 투수였지만 부상으로 선수 수명이 짧았다. 그가 좋아하는 별명은 ‘잠자리 눈깔’이다. 더그아웃에서 투수들 그립이 다 보인다고 해서 붙은 것이다. 노(老) 감독은 "보이는 것이 아니라 봐야 하는 것"이라고 했다. /다산북스

◇김성근을 만든 건 시행착오


‘야신’은 작년 말에 지도자 은퇴를 선언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야구 예능 프로그램의 감독직을 맡았다. 갈매기가 물가를 떠날 수 없듯이, 그라운드 바깥의 삶에 적응하기 어려웠던 것 아닐까.


-은퇴했는데 왜 또 감독직을 맡으셨나요.


“프로 지도자를 안 한다는 것이었지 야구를 떠난다는 뜻은 아니었어요. 예능 프로 안 했다면 요즘도 전국을 돌아다니며 아마추어 선수들을 봐주고 있을 거요. 이제 프로야구에서는 김성근을 안 쓰잖아요?(웃음)”


-별명이 ‘야신’인데 감독과 코치를 합쳐 13번 잘렸다고 들었습니다.


“(눈이 휘둥그레지며) 13번이나? 하도 많아 셀 수가 없어요. 그런데 잘렸다는 건 바깥에서 하는 이야기지, 실제로 내가 잘렸는지 내 발로 나갔는지는 모를 거요. (반반인지 묻자) 내 선택이 더 많았어요. 미련이 남지 않을 만큼 전념했기 때문에 그렇게 끝나는 게 두렵지 않았고요. 내가 노상 하는 말이 있어요.”


-그게 무엇인가요?


“나만의 인장(印章), 무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어딜 가도 산다. 세상이 다 외면해도 누군가는 그 사람을 보고 있다는 뜻이에요. 나는 프런트하고 자주 싸우는 말썽꾸러기였어요. 그런 감독이 왜 필요하겠습니까? 김성근을 데려가면 팀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인장을 가지고 있으면 찾아오고 결국 데려가는 거요.”


-’벌떼 야구’부터 떠오릅니다. 인생을 돌아보면 김성근의 인장은 어떤 것이었나요.


“나는 사람들한테 이해가 잘 안 되는 야구를 했어요. 특출난 투수가 없으니 여러 명이 힘을 합쳐 틀어막는 ‘벌떼 야구’도 그중 하나였지요. 돈을 10원 가진 팀이 1000원 가진 팀과 싸우는데 평범하게 하면 절대 이길 수 없어요. 어마어마한 아이디어가 필요합니다. 어떻게 이길지 고민하고 비상식적 승부수를 던지는 것, 그게 김성근 야구였어요.”


-1942년 일본 교토 출생인데 고교 시절에는 어떤 선수였습니까.


“소질이 없었어요. 공이 거의 가지 않는 우익수에 9번 타자를 맡았습니다. 투수 권유를 받고는 강에 가서 하루에 200개씩 돌멩이를 던졌어요. 가난했지만 ‘가졌냐, 못 가졌냐’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무조건 되게 한다’는 방향만 생각했지요.”


-야구 잡지 속 선수들의 연속 사진을 보면서 투구를 흉내냈다면서요?


“아르바이트로 노가다를 했는데, 지붕으로 흙을 던질 때도 ‘어떻게 하면 잘할 수 있을까’ 연구했어요. 버스를 타면 빈자리에 앉지 않고 서서 중심 잡는 연습을 했지요. 우유 배달을 할 땐 시간을 매일 단축하는 게 즐거움이었고요.”


-그야말로 악조건이었네요.


“부모를 원망한 적은 없어요. 누구한테 기대지도 않았고. 그건 악조건이 아닙니다. 내가 지금까지 야구를 할 수 있게 만든 좋은 바탕이었다고 생각해요. 절박하니까 배운 거요.”


-책에 ‘김성근을 만든 건 무수한 시행착오’라고 쓰셨더군요.


“나는 프로 감독이 된 지 25년 만에 첫 우승을 했어요. 태평양 돌핀스, 쌍방울 레이더스 같은 꼴찌팀을 주로 맡아 2~3등으로 올려놓곤 했습니다. (탁자 모서리를 만지며) 나는 늘 이런 벼랑 끝에서 살았어요. 한복판에 있는 사람들, 즉 주류는 도전 의식이나 투지가 약해요. 하지만 나는 내일 어떤 위기가 닥칠지 모르니 살길을 찾아야 했습니다. 시행착오가 많았다는 것은 결국 실패하지 않았다는 뜻이에요. 그만큼 고민하고 도전하고 결과를 냈으니 ‘시행착오가 많은 인생이야말로 베스트’지요.”



조선일보

"야구장으로 가는 길이 세상에서 가장 즐겁다"는 김성근 감독은 선수들에게 직접 펑고를 치며 수비 훈련을 지휘한다. 그동안 OB, 태평양, 삼성, 해태(2군), LG, SK, 한화 등의 사령탑을 지냈다. /스포츠조선

◇인생은 파울볼을 치며 버티는 것


선수 김성근은 1961년 한국으로 건너와 실업야구팀 ‘교통부(국토교통부의 전신)’에 입단하자마자 국가대표로 선발됐다.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에서 호투했다. 하지만 왼팔 통증으로 1966년을 끝으로 투수 생활을 접었다.


-전성기가 너무 짧았습니다.


“이적한 실업야구팀 ‘기업은행’의 마산지점으로 발령받았고 69년에 마산상고 감독으로 야구를 다시 시작했어요. 은행원일 때 도장 찍기와 서류 복사 말고는 일이 없어도 출근해 묵묵히 내 일을 했습니다. 운 탓, 남 탓을 하며 비관했다면 다시 야구할 기회를 얻지 못했을 거요.”


-그래도 참 막막했을 것 같은데.


“지금과 달리 당시는 그 순간에 모든 것을 바치던 시대였어요. 내가 살겠다는 시대가 아니라 내가 싸우겠다는 시대였습니다. 그런 각오로 덤비지 않으면 결국 선수 수명이 짧았어요. 나는 어딜 가나 이 팀을 위해 모든 걸 바치겠다 생각하고 행동했습니다.”


-책에 ‘요즘은 교과서와 참고서가 없는 세상’이라고 썼는데.


“각자 답을 만들어가야 하니까요. 이런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이 참 대단하고, 한편으로는 포기가 너무 쉬운 것 아닌가 안타까울 때가 있어요.”


-어디서 그런 걸 느끼나요.


“답은 자기한테 있는데 그걸 알면서도 실행하지 못하잖아요. 다음으로 미루거나 남의 아이디어에 기대려고 하죠. 뭐가 막혔다면 당장 이렇게 뚫을까 저렇게 뚫을까 고민하고 시도해야 해요. 야구나 인생이나 ‘져도 그만, 이겨도 그만’이 아닌, ‘왜 졌나, 왜 안 풀렸나’를 연구하면 해결책이 보입니다.”


-경험이 부족한 탓 아닐까요.


“(고개를 흔들며) 부닥치질 않아서 그래요. 일단 부닥쳐야 아이디어가 나옵니다. 인생은 파울볼을 치며 다음 기회를 보는 타자와 같아요.”


-방송을 보니 그 연세에도 하루에 수백 개씩 펑고를 치시더군요. 솔직히 힘들지 않나요.


“지금 왜 펑고를 쳐야 하고 어떻게 쳐야 하나 등을 생각하다 보면 힘들다는 의식이 들 틈이 없어요. 타격이 끝난 다음엔 몸이 힘들지만, 목표가 있잖아요. 세상 살면서 제일 중요한 건 ‘나는 뭘 해야 한다’고 의식하며 사는 겁니다. 열심히 펑고를 쳐서 어떤 선수가 실수를 깨닫고 나아지는 모습을 보는 게 낙이에요.”


-한화이글스 감독을 맡고 김태균 선수에게 ‘너는 3루에서 반쯤 죽었다’고 공개적으로 말한 적이 있지요?


“김태균이든 누구든 이 포지션(자리)이 되면 저 포지션으로도 갈 수 있어요. 여기는 누구 자리다, 이렇게 고착돼 있으면 팀이 옴짝달싹 못 합니다. 반대로 수비 범위가 커지면 그 선수는 앞으로 살아갈 길이 더 넓어지는 거요.”


-한계를 높여나가라는 뜻이군요.


“스스로 한계 속에 들어가 있는 사람은 관짝에서 죽기만 기다리는 것과 같아요. 앞서 가야지 왜 ‘난 이만하면 됐어’ 하면서 뒤처지나요? (스스로 한계를 여러 번 뛰어넘었다고 생각하는지 묻자) 뛰어넘고 말고 그런 문제가 아뇨. 개발하지 않으면 앞으로 못 나간다는 뜻입니다. 만족하는 순간 끝장이에요.”


-한국시리즈에서 마침내 우승했을 때는 어떤 기분이었습니까.


“사람들은 환호했지만 나는 ‘아, 끝났구나’였어요. 기쁘기보다 ‘다음에 뭘 해야 하나’라는 생각부터 했습니다. 늘 그랬어요. 8회에 우리 팀이 홈런을 쳐서 역전하면 만세 부르고 난리가 납니다. 얻어맞은 쪽에서는 ‘이제 어떻게 공략할까’ 전략을 풀가동 하지요. 그럼 나는 어떻게 막을지 고민해야 합니다. 그 자리에서 홈런에 도취되면 역전패를 당하는 거요.”



조선일보

영화 ‘파울볼’은 김성근 감독이 이끈 독립 야구단 고양원더스의 1093일을 기록한 다큐멘터리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버려지거나 방출된 ‘야구 실직자들’의 패자부활전을 담았다. /티피에스컴퍼니

◇나는 비관적 낙관주의자


‘파울볼’(2015)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있다. 김성근 감독이 이끄는 한국 최초 독립구단 고양원더스에서 지옥훈련을 견뎌내며 프로 진출을 꿈꾸는 선수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타자에게 파울은 실패지만 다음 기회가 주어진다는 점에서 완전한 실패는 아니지요.


“그게 야구가 알려주는 인생이에요. 감독부터 선수들까지 다 잘려서 모인 사람들이었어요. 나야말로 파울을 무지하게 친 사람입니다. 누구든 실패를 겪지만 포기하지 않으면 기회가 온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어요.”


-‘야구 실직자들’의 패자부활전 같았습니다.


“그때 선수들에게 말했어요. ‘이 과정을 거쳐 성공하면 다행이고 혹시 그렇지 못한다 해도 너희들이 도전하고 시도했던 정신만큼은 평생 잊지 마라.’ 그래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으니까요.”


-그 다큐에서 ‘너희들은 벼랑 끝에 섰고 뒤가 없어. 여기서 떨어지면 죽는 거야’라고 한 말씀도 떠오릅니다.


“내 밑에 들어온 선수들은 다 키워야 해요. 자식과 똑같아요. 엄격하게 대하고 혹독하게 훈련시킵니다. 부족하다고 자식을 버릴 순 없잖습니까. 미래를 만들어줘야죠. 꼴찌를 일등으로 만드는 비법이 뭐냐고들 묻는데, ‘부모의 마음’으로 대하면 됩니다. 좋은 감독이란 사명감을 가지고 결과를 만들고, 선수에게 대가를 돌려주는 사람입니다. 한계를 넘어서면 선수 자신이 그걸 가장 먼저 알아요.”


-감독님은 비관적 낙관주의자라면서요?


“근본은 비관적이지만 해결할 방법을 찾을 땐 낙관적으로. 내 성격 중 이런 점이 가장 좋아요. 이길 것 같을 때는 비관하고 질 것 같을 때는 오히려 낙관합니다. 뭐가 닥칠지 모르는 인생에서 그게 최선의 준비라고 생각했어요.”


-나만의 위기 관리법이라면.


“한마디로 ‘늘 최악을 가정하고 최선을 준비한다’입니다. 그럼 어떤 위기가 와도 당황하거나 흔들리지 않아요. 역설적으로, 위기 자체가 거의 오질 않지요.”


-2007년 한국시리즈에서 1~2차전을 모두 두산에 졌을 땐 어떻게 하셨나요.


“감독실에서 새벽까지 끙끙 앓다가 ‘2패를 했어도 아직 괜찮잖아?’라는 생각이 떠올랐어요. 나는 그해 우승에 ‘아직’이라는 마음가짐이 큰 기여를 했다고 봐요. ‘벌써’에 사로잡혀 있었다면 우승은 없었을 겁니다. 살아 보니 인생에서는 잘 버리는 게 중요해요. 선입견을, 상식을, 과거를.”


-때로는 위로도 필요하지 않습니까.


“아뇨. 위로를 받아들인다는 건 내 앞길을 막는 행위요. 2009년 SK가 한국시리즈 7차전에서 졌는데 뼈아픈 패배였어요. 그날 최태원 회장이 ‘김 감독, 잘했어요’라고 위로했습니다. 나는 열이 받았고 독을 품었어요. 차라리 ‘김 감독, 똑바로 안 합니까?’ 말해주길 바랐지요. 승부의 세계에서는 위로가 아니라 패기가 필요해요.”



◇리더는 존경을 바라지 않는다


김성근은 가늘고 길게 살려고 하지 않았다. “굵고 짧게 사는 게 오히려 길게 사는 법인데 다들 그 사실을 모른다”고 책에 썼다. 무슨 뜻인지 묻자 그는 “가늘고 길게라는 건 그냥 살겠다는 사람이지 싸우겠다는 사람이 아니다”라며 “세상에는 매번 전력투구를 하는 사람이 필요하고, 그러는 사이에 자기도 모르게 성장하는 것”이라고 했다.


-선수들을 보며 느낀 게 있다면.


“50년 넘게 지도자 생활을 하며 무수히 많은 선수를 만났어요. 내가 느낀 거요? 생각이 바뀌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면 습관이 바뀌고, 습관이 바뀌면 운명도 달라집니다.”


-가장 미련한 짓은 뭡니까.


“실패에 붙잡혀 있든 성공에 도취돼 있든 과거에 매여 있는 거죠. 내가 프로 감독으로 1384승을 올렸지만 그게 오늘의 승리를 보장해주지는 않아요. 세상에서 제일 나쁜 것은 만족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이겼다고 만족하면 내일 어김없이 져요.”


-감독 생활 내내 꼬리표처럼 따라다닌 말이 ‘혹사’인데.


“김성근이 연습을 너무 많이 시킨다고 손가락질했지요. 거꾸로 내가 묻고 싶습니다. 8000m급 에베레스트를 올라가고자 하는 등반가가 그 목표를 이루려고 1000m, 3000m의 산을 훈련 삼아 오른다면 그걸 혹사라고 할 수 있나요? 야구뿐만 아니라 기업도 정치도 모두 열심히 하지 않으면 생존 자체가 어렵습니다.”


-요즘 ‘세대교체’가 유행입니다.


“한국 사회는 경험을 무시하고 베테랑을 괄시해요. 젊은 사람으로 다 바꾼다고 조직이 강해지지는 않아요. 나는 선수가 나이를 먹어도 능력이 있으면 적재적소에 기용했습니다. 물론 노력하지 않는 베테랑은 쓸모가 없고요.”


-야구 예능 개막전 때 이대호를 스타팅 멤버에서 빼자 박수를 받았습니다.


“그런 일로 박수를 친다는 게 우리 사회에 무엇이 부족한지 보여주는 것 아닌가 싶어요. 어느 조직이든 윗사람들이 과감한 결단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대호를 뺌으로써 팀에 충격이 오고 반대로 기회를 잡을 선수가 나와요. 조직을 해친다면 쳐내야죠. 지금 우리나라에서 제일 못하는 게 이런 결단이에요.”


-숱하게 잘리고도 성공한 리더로 통하는 비결이라면.


“나는 파벌이나 연줄이 없고 윗사람에게 아부하는 성격도 아니었어요. 살아남을 길은 하나, 내가 강해지는 것뿐이었습니다. 리더는 사실 고독한 자리요. 흔들려도 흔들림을 보여주면 안 돼요. 감독의 불안이 선수들에게 전해지면 시합을 하기 전부터 진 것이나 마찬가지요.”


-요즘도 강연 요청이 많나요?


“전보다 뜸하지만 불러주면 나갑니다. 국가기관이나 대기업, 정치권에서 강의를 요청하는 걸 보면 야구 감독에게도 배울 게 있는 모양이에요. 진정한 리더는 존경을 바라지 않아요.”


-그럼 무엇을 바랍니까.


“즐거운 야구니 깨끗한 야구니 하는 건 야구를 모르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리더는 모든 식구들의 살림을 책임지는 사람이에요. 내 밑에 선수가 100명 있으면 식솔까지 500명, 그들의 밥줄이 내 손에 맡겨져 있는 셈입니다. 철은 뜨거울 때 때려야 해요. 리더라면 ‘아프냐?’ ‘괜찮냐?’ 묻지 말고 그저 따르도록 해야 합니다. 존경 대신 신뢰를 받아야 해요.”


펑고(fungo)라는 단어는 ‘재미있게 한다’는 데서 유래했다. 노(老)감독은 “실제로 펑고는 즐거움의 경지에 들어가는 일”이라고 했다. 젊은 사람들을 향한 당부는 뭘까. “처음부터 즐겁다는 생각을 가져야지, 고되다거나 힘들다고 생각하면 시작도 못 해요. 무슨 일을 하든 어떤 의식을 가지느냐에 따라 결과가 바뀝니다. 그저 편하고자 한다면 죽어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요.”


후려치는 죽비 같았다. 삶이라는 타석에서 그가 지켜온 철학이었다.



조선일보

김성근 감독의 책 '인생은 순간이다'와 싸인볼. 야구공에 ‘일구이무(一球二無)’라고 적혀 있다. “야구도 인생도 3번 정도 찬스가 옵니다.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기회가 와도 온 걸 모르거나 못 잡아요. ‘지금 이 공을 놓치면 끝’입니다. 놓치면 두 번째는 없어요.” /김용재 영상미디어 기자

[박돈규 기자]

오늘의 실시간
BEST
chosun
채널명
조선일보
소개글
대한민국 대표신문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