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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에서도 미술관에서도… 나는 '빛'을 갖고 논다

1세대 건축조명 디자이너 고기영

안도 다다오·알바루 시자 등 세계적 유명 건축가들과 협업

"좋은 빛은 좋은 공간을 만든다… 그 점에서 빛은 무엇보다 정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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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조명 디자이너 고기영은 “같은 공간도 빛에 따라 전혀 다른 분위기를 연출할 수 있다”고 했다. /비츠로

"빛은 거짓말하지 않습니다."


비츠로(Bitzro) 고기영(55) 대표는 '빛으로' 말하는 조명 디자이너다. 조명 디자이너라면 램프를 비롯한 조명기구 디자이너만을 떠올리는 것이 한국의 현실. 그 속에서 호텔 연회장부터 경복궁 마스터플랜, 광안대교·부산항대교와 2018 평창동계올림픽 당시 강릉의 경관(景觀) 조명까지 굵직굵직한 작업을 도맡아온 국내 대표 디자이너다. 프리츠커상 수상자 안도 다다오의 한화 인재경영원, 알바루 시자의 경기 안양시 알바루 시자 홀 등 유명 건축가들의 공간에도 빛으로 생동감을 불어넣었다. 앙골라 인터콘티넨털 호텔 등 해외에도 작품이 있다.


근작 중에선 서소문역사공원(건축가 윤승현·이규상·우준승)이 5년 새단장 끝에 명소로 거듭났고, 남양성모성지 대성당(마리오 보타)은 내년 초 완공을 앞두고 벌써 기대를 모으고 있다. 최근 서울 논현동 사무실에서 만난 고 대표는 "빛을 비추는 각도가 조금만 변해도 공간의 표정이 완전히 달라진다"며 "좋은 빛을 쓰면 그만큼 좋은 공간이 만들어진다는 점에서 빛은 정직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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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평창 동계올림픽 당시 디자이너 고기영이 강릉 남대천에 설치한 달 모양 조명이 밤을 밝히고 있다. 하늘, 바다, 경포호, 술잔, 마주 앉은 임의 눈 속까지 강릉엔 달 5개가 뜬다는 이야기를 주제로 했다. /사진가 윤준환

디자이너로서 전환점이 두 번 있었다. 처음은 국립중앙박물관 용산 이전이었다. 역사의 길(전시관 로비)을 햇빛으로 채우고, 그 끝에 전시된 경천사지 10층탑은 주인공처럼 하이라이트를 비춘다는 콘셉트였다. 자연 채광 설계를 맡은 독일 바텐바하사(社)는 이를 위해 햇빛을 밖에서부터 반사시켜 경천사탑에 비추는 장치를 옥상에 설치했다. 인공조명 실무 담당자였던 고 대표에겐 밝은 로비에서 어두운 전시장으로 들어서는 관람객의 암순응(暗順應)이란 과제가 주어졌다. 적정 반사율의 실내 마감재를 찾고, 로비와 전시장 사이에 완충 공간을 둬서 빛의 위계를 순차적으로 낮추는 방법을 찾아내는 등 설계에만 4년이 걸렸다.


서울스퀘어(옛 대우빌딩)를 다음으로 꼽았다. 영국 화가 줄리언 오피의 작품을 올려 유명해진 초대형 LED 캔버스가 그의 작품이다. "LED를 심을 수 있게 구멍을 뚫은 세라믹 타일 1만8000장을 건물 전면(前面)에 붙였죠." LED를 입은 서울스퀘어는 완전히 새로운 건물로 거듭났다. 이 성공을 발판으로 잠실 롯데월드타워 LED 캔버스를 디자인했을 땐 이탈리아의 디자인 거장 알레산드로 멘디니가 그림을 보내주기도 했다. 고 대표는 "LED는 색상·색온도를 자유자재로 조절해 이론적으론 1000만 가지 이상 색을 표현할 수 있다"면서 "LED 시대엔 건축조명의 역할이 더 커질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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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언 오피의 작품이 상영중인 서울스퀘어 LED 캔버스(위 사진). 조명이 설치된 경복궁 경회루. /ⓒERCO GmBH(Photo : Jackie Chan/Sydney)

이화여대에서 공간디자인을 공부한 뒤 미국 파슨스 디자인 스쿨에서 건축조명 석사학위를 받았다. 해외에서 체계적으로 공부한 1세대다. 국내에 건축조명이라는 개념조차 낯설었던 1980년대 후반, 건축 회사에서 아르바이트하면서 유학을 결심했다. "도면을 주면서 사무실이든 복도든 무조건 1m 간격으로 '빵빵이'(동그라미)를 치라는 거예요. 전등 자리라는데, 그렇게 설치하면 어떤 분위기가 되는지 물어도 말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죠. 이건 아니다 싶었어요."


공간의 분위기를 완성하고 도시의 밤을 물들인다는 점에서 조명은 등화(燈火)와 다르다. 고 대표는 "좋은 빛을 연출하려면 디자이너와 조명기구 생산자, 발주처의 삼박자가 조화를 이뤄야 하는데 우리는 아직 뒤뚱거린다"고 했다. 공무원들이 '관리가 어렵다'며 디자이너의 설계를 바꿔버리는 일도 여전하다고 한다. "해외여행 가면 야경 보는 게 필수 코스잖아요. 밤 풍경은 사람의 감각을 예민하게 하고 기억에 오래 남는 힘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루 중 '밝은 12시간'만 중시하고 나머지 '어두운 12시간'의 가치엔 아직도 인색한 게 아닐까요?"


채민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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