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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친 구석 없이 그 자체로 온전한 국수 가닥

[아무튼, 주말]

[정동현의 pick] 칼국수

조선일보

서울 서초구 방배동에 있는 일미 칼국수의 '칼국수'. /김용재 영상 미디어기자

충북 음성 생극 시골집 대문을 열면 어깨가 딱 벌어진 할아버지가 있었다. 손이 크고 눈빛이 강했던 할아버지는 따르릉 소리가 나는 자전거 뒷자리에 동생과 나를 태우고 읍내까지 나가곤 했다. 느리고 흔들거렸지만 자전거가 넘어지는 법은 없었다. 일제시대 유도 선수까지 했던 할아버지의 너른 등은 늘 곧게 펴져 있었다.


할머니가 가지고 온 작은 상이 마루에 오르면 할아버지는 늘 국수를 찾았다. 노부부가 사는 시골 살림에 식사가 거창할 리 없었다. 날이 더우면 오이김치에 냉수를 말고 국수를 넣었다. 할아버지는 홀로 반주를 곁들이며 국수 한 그릇으로 식사를 마쳤다. 비가 오면 애호박과 감자 같은 것을 멸치 육수에 넣어 끓였다. 처마 밑으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를 들으며 따끈한 국수를 먹었다. 하얗고 가는 면이 입속으로 들어갔다. 송사리가 손가락 사이를 스치며 빠져나가듯 작고 미끈한 촉감이 입안을 간지럽혔다. 할아버지처럼 대접을 들고 국물까지 마시면 몸이 후끈거렸다. 바위산 곳곳에 쌓인 눈처럼 하얀 수염이 난 할아버지의 수척한 볼에도 비로소 홍조가 들었다.


요즘 국수를 보면 쫄깃하고 두꺼운 것을 상급으로 치는 듯하다. 반죽할 때 물을 적게 섞어 심지가 단단하고 찰기가 높은 면발은 마치 싸움을 하듯이 고개를 숙이고 이를 꽉 깨물어야 한다. 느긋이 앉아 식사를 즐긴다는 마음보다 뭔가를 해치워야 한다는 투쟁심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예전처럼 바람 소리를 듣고 빗방울이 떨어지는 궤적을 보며 하는 식사는 어디에 있는 걸까? 그 마음을 찾아 간 곳은 방배동이었다. 방배동 카페 골목은 늦은 저녁에도 어두워지지 않았다. 좁은 도로 위 공중에는 만국기 같은 조명이 걸렸다.


‘일미칼국수’라는 간판은 2층에 달려 있었다. 흔한 네온이나 조명이 없어서 목적지가 분명한 사람이 아니면 찾기 어려울 듯 싶었다. 자리를 열고 위로 올라가니 창쪽으로 마루 같은 바닥이 깔렸고 반대쪽에는 의자가 있는 테이블이 있었다. 사람들은 짝을 지어 드문드문 간격을 두고 앉았다. 분명 이 집에 처음 온 사람은 없는 것이 확실했다. 메뉴판을 찾는 이들이 없었고 주인장도 굳이 물어보지 않았다. 어두운 저녁이었다. 친구로 보이는 머리가 희끗한 중년 남자 둘은 가운데 있는 불판에 삼겹살을 올렸다. 냉동 삼겹살이었지만 고기의 밝은 분홍 빛깔만 봐도 상품(上品)인 것을 알 수 있었다. 국산 암퇘지만 쓴다는 이 집 삼겹살은 유행하듯 얇은 두께가 아니었다. 살짝 두께를 살려 썰어낸 삼겹살이 낙엽 쌓이듯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삼겹살에 딸려 나오는 찬은 단출했다. 기름장과 김치, 그리고 파무침 정도가 전부였다. 불판 역시 가운데로 기름이 빠지는 옛날 모양새 그대로였다.


달아오른 불판에 고기를 올렸다. 삼겹살이 천천히 녹아내렸다. 냉동은 냉동 나름의 굽는 법이 있다. 센불에 빠르게 굽기보다는 중간 불에 올려 기름을 뽑아내듯 느긋하게 구우면 바삭한 식감이 생긴다. 파의 아린 맛이 남은 파무침을 곁들이니 물리는 감이 없었다. 풍채가 좋고 목소리가 시원시원한 주인장은 손님이 부르면 반가운 소식이라도 들은 것처럼 달려갔다.


몇 번 더 고기를 청하고 나서 식사 주문을 넣었다. 어차피 시킬 수 있는 메뉴는 칼국수와 건짐국수 두 개뿐이었다. 주방에서 칼로 면을 써는 소리가 들렸다. 맥주 두어 잔 마실 시간이 지나 국수가 상에 올랐다. 달걀 지단, 애호박 볶음, 김가루, 고기 고명이 태극기의 건곤감리처럼 그릇을 4등분하여 가득 채웠다. 그 한가운데에 빨간 다대기가 한 숟가락 정도 있었다. 소고기를 우린 육수는 고기에서 우러난 높은 밀도의 풍미가 밀물을 따라 들어오는 해풍처럼 입안으로 밀려들었다. 손으로 썰었다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일정하고 세밀한 간격으로 자른 면은 부드럽고 매끄러워서 무엇하나 거슬리는 구석이 없었다. 국물 또한 너무 뜨겁거나 혹은 건더기가 과하지 않았다. 사진을 찍기 위해서, 어딘가 과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먹는 사람을 배려하고 또 고민한 흔적이 먹는 내내 느껴졌다. 면을 식혀 건져내고 식힌 육수를 곁들인 건짐국수는 그 옛날 부잣집에서 먹었을 법한 화려한 자태와 맛을 지녔다. 그리하여 그 간단한 차림에도 대접을 받는 듯 마음이 풍성해지는 것이었다.


국수 한 그릇에도 눈을 지긋이 감고 입을 꾹 닫은 채 허리를 곧추세우고 식사를 하던 할아버지. 당신이 느끼던 국수의 감촉은 아마 이런 것이었으리라. 이음매도 거친 구석도 없이 그 자체로 온전하고 또 온순한 국수 가닥. 험난한 삶에서 살짝 비켜난 사소한 행복, 그 조그만 자족(自足)에 할아버지는 매번 국수를 청했던 것은 아닐까? 몇 십 년이 지나 이제는 그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다.

#일미칼국수: 삼겹살 200g 1만9000원, 칼국수 1만5000원, 건짐국수 1만5000원.

[정동현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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