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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속초·영덕·제주… 코로나에 지친 삶 ‘한달살기로 리셋’

[아무튼, 주말] 코로나 속 다시 부는 한 달 살기 열풍


‘여행은 살아보는 거야!’라고 했던가. 다시 ‘한 달 살기’ 열풍이다. 이미 한 달 살기 성지로 자리 잡은 제주뿐 아니라 남해, 통영, 강릉, 속초, 부산 등 전국 각지엔 요즘 한 달 살기 하는 이들이 늘었다. 노트북을 들고 거리 두기가 가능한 한적한 지역을 찾아 은둔하듯 생활한다. 일상을 벗어나 한 달간 느린 숨을 쉬며 관광 대신 ‘탐색’을 한다. 낯선 지역에서 살아보는 한 달 살기는 코로나 시대 집콕에 시달린 이들의 새로운 생존법이자 처방전이 된 듯하다. 무한 재생되던 일상의 쳇바퀴에서 잠시 멈춤한 후 한발 떨어진 곳에서 삶을 ‘리셋’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겨울방학·휴가 앞두고 ‘한 달 살기’ 정보 사냥 戰


‘코로나 피해 한 달 쉴 곳 찾고 있습니다’ ‘집콕 생활에 지쳐서 올 겨울방학엔 아이들과 한 달 살기 계획 중입니다’ ‘해외여행 포기하고 국내 한 달 살기 시작합니다'···.


‘한 달 살기’ 정보 창구이자 대표 커뮤니티인 네이버 카페 ‘일년에 한 도시 한달살기’엔 요즘 연일 한 달 살기를 희망하는 이들의 방문이 이어진다. 하루 평균 방문객 수만 2000여 명. 매일 50~60명이 새로 가입하는 중이다. 주로 한 달 살기에 대한 지역 및 숙소, 생활 정보와 한 달 살기 유경험자들의 후기 공유가 활발하다.


연말연시와 방학을 앞둔 이 시기쯤이면 해외 한 달 살기에 대한 글이 주를 이뤘지만, 코로나 바이러스가 강타한 올핸 국내 한 달 살기 글이 대부분이다. 그중 제주가 여전히 강세이긴 하나 비교적 인구 밀집도가 낮은 지방 소도시에 대한 관심과 선호도가 높아진 것도 올해 한 달 살기의 특징이다. 블로그엔 강릉과 속초, 양양, 부산 등 동해를 낀 관광 도시뿐 아니라 경북 문경·충북 단양 등 내륙, 울릉도와 욕지도 등 자발적 고립 생활이 가능한 오지의 섬을 희망한다는 이들도 목격된다.


성남 분당의 집을 떠나 지난달 경북 영덕에서 늦은 휴가 겸 한 달 살기를 했다는 이예리(32)씨는 “편의 시설이나 즐길 거리가 많지는 않았지만, 코로나에 비교적 안심할 수 있는 지역이라는 것만으로도 그저 마음 편한 한 달을 보냈다”고 했다. 한 달 살기를 빗댄 ‘셀프 유배 생활’이라는 말도 등장했다. 집이 아닌 다른 지역의 숙소에서 마치 유배 간 듯 장기 체류하는 것을 말한다. 서울 사는 출판 편집자 송수영(38)씨는 재택근무로 전환하며 경기도 양평 서종면에서 한 달 살기를 시작했다.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지니 집중도가 떨어져 재택근무 환경에 변화를 주려고 한 달 살기에 도전했다”고 말했다. 회사가 있는 서울 강남까지 1시간 이내 오가기 편리한 곳을 택했다. 송씨는 “셀프 유배 생활을 하다 보니 저절로 불필요한 인간관계가 정리되면서 일에 집중도가 높아진 것 같다”며 “겨울 휴가도 이곳에서 보낼 계획”이라고 했다.


◇해외 대신 국내 한 달 살기로 ‘회항’


국내 한 달 살기가 많이 늘어난 이유 중 하나는 코로나로 하늘길이 막히면서다.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못하니 국내 장기 여행으로 눈을 돌린 이가 적지 않다. 전직 교사인 최인호(64)씨도 그중 하나다. 2005년 산골 학교 제자 13명의 수학여행 경비 모금을 위해 620㎞를 걸어 화제를 모았던 최씨는 퇴직 후 책 ‘네팔 히말라야 트레킹'을출간하는 등 트레킹 전문가로 활동했다. 올겨울엔 해외 트레킹 대신 속초살이를 택했다.


자택인 경북 포항을 떠나 속초에 깃들어 산 지 이제 열흘 남짓. 애초 계획은 한 달 동안 설악산 등산을 즐길 목적이었으나 하필 설악산이 입산 통제 기간에 접어들어 한 달 살기 목표를 조금 수정해야 했다. 아침이면 설악산 대신 동네 주민들이 즐겨 찾는 주봉산이나 청대산을 오르거나 영랑호 둘레길을 산책한 뒤 숙소에 돌아와 글을 쓴다. “설악산 등산에 대한 마음을 접으니 오히려 다른 산이 보이더라”는 최씨는 “한 달 살기를 하지 않았다면 몰랐을 속초의 속살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고 했다.


이따금 속초 시민의 숨은 아지트인 복합 문화 공간 ‘설악산책’에 가 책을 읽거나 노트북으로 글도 쓴다. 이동할 땐 걷거나 대중교통을 이용한다. 한 달 살기를 하려면 가족 동의는 필수. 아내 반응은 예상외로 ‘쿨’했다고 한다. 최씨는 “코로나 사태로 아내와 매일 붙어 있었는데 한 달 살기를 하며 각자 시간이 생기니 더 좋아하더라”며 “아내와의 관계도 좋아졌지만, 낯선 곳에 있으니 방해 요소가 줄어 글을 쓰는 데 오롯이 집중할 수 있다”고 했다.


금융업에 종사하는 직장인 황희정(50)씨도 해외여행 대신 한 달 살기에 눈을 돌린 경우다. 올 초 회사에서 ‘한 달 배낭여행’ 포상을 받아 스페인 순례길 여행 계획을 세웠지만, 코로나 사태로 결국 취소했다. 그냥 넘기기엔 아쉬워 ‘제주 올레길 완주’ 계획을 세우고 지난 10월 24일부터 11월 28일까지 제주 한 달 살기에 도전했다. 한 달 살기를 마무리하는 황씨는 “올해는 특히 지쳐 있었는데 제주 한 달 살기가 특효약이 된 것 같다”고 했다. 황씨는 한 달 사는 동안 올레길 걷기 축제에도 참가했다. 처음 목표는 올레길 26개 코스 완주였으나 욕심을 버렸다. 완주해야겠다는 목표 때문에 오히려 제주의 삶을 즐기지 못하는 것 같아 코스 20개로 만족했다”고 말했다. 그는 “코로나라는 악몽보단 ‘한 달 살기’라는 버킷리스트를 실천할 수 있었던 한 해로 기억될 것 같다”고 했다.


◇코로나 블루 해소하며 진정한 휴식기


진정한 휴식기를 갖고자 했던 이들에게도 한 달 살기가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동갑내기 친구 사이인 채백련·김희진(32)씨는 얼마 전 퇴사 후 강릉 한 달 살기를 시작했다. 스타트업에 다니던 두 사람은 “코로나를 거치며 가치관이나 삶의 방향이 많이 바뀌었다”고 했다. 일의 성과도 중요하지만 오래 달리기 위해선 과감하게 쉼표를 한 번 찍어야 한다는 마음이 무엇보다 강했다. 오랫동안 꿈꿔 왔던 창업도 실행에 옮기기로 하고 휴식 겸 사업 구상을 위해 강릉을 택했다. 강릉은 몇 차례 여행으로 다녀가며 한 달 살기 도시로 점찍어두었던 곳. 창업도 중요하지만, 진정한 휴식을 하는 데 우선순위를 뒀다.


숙박 공유 플랫폼 에어비앤비에서 강릉에서도 비교적 한적한 해변인 송정 해변 인근 숙소를 구했다. 생활에 ‘루틴(routine·매일 반복하는 특정한 행동)’을 정하고 현지인들처럼 강릉에 녹아들어 보기로 했다. 매일 아침 해돋이를 보며 송정 해변을 산책하고, 요가 학원에 등록해 요가를 배운다. 중고 거래 앱인 ‘당근마켓’을 이용해 강릉 주민에게 한 달간만 사용할 자전거도 빌렸다. 적어도 한 달만큼은 ‘강릉 사람처럼 사는 것’이 그녀들의 현재 목표다.


동네 탐험을 즐기다 보니 어느새 단골 맛집도 생겼다. 숙소 부근 ‘송미막국수’는 우연히 발견한 맛집이다. 이곳 주인아주머니에게 강릉 이야기를 듣는 게 재미있어 이틀에 한 번꼴로 들르다 보니 단골이 됐다. “한 달 살기는 일주일, 보름 살기와는 또 다른 방식의 여행이에요. 그동안 여행하면서 강릉이라는 도시를 즐겼다면, 한 달 살기를 하면서 강릉을 알아가고 배우는 중입니다.” 채씨의 말이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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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애월에서 한 달 살기 중인 조혜원(33)씨 역시 그동안 미뤄왔던 한 달 살기 중이다. 두 달 전 퇴사 후 잠시 프리랜서로 활동하고 있는 그는 틈틈이 의뢰받은 작업을 하며 장기 휴식에 돌입했다. 조씨는 “일반 직장인일 때는 꿈도 못 꿨던 한 달 살기였다”면서 “휴식하며 다음 단계를 구상하는 지금이 코로나 이후 삶에 큰 전환점이 될 것 같다”고 했다.


방학을 앞둔 학부모들 사이에선 경주나 공주·부여 한 달 살기가 인기다. 등교 수업이 줄어들면서 재택 수업을 했던 자녀를 데리고 집이 아닌 새로운 환경에서 기분 전환 겸 대안 교육이라도 하겠다는 취지다. 12월 겨울방학과 동시에 경주 외곽으로 가 한 달 살기에 돌입한다는 설성경(42)씨는 “감염을 우려하며 여행 다니는 것보단 한곳에 머물며 조용히 도시 탐방하는 계획을 세웠다”며 “오랜 집콕으로 높아진 스트레스도 해소할 겸 알찬 시간을 보낼 예정”이라고 했다.


◇안 되면 일주일 살기, 보름 살기라도…


코로나 대응 상황에 따라 재택근무나 휴직 등으로 시간 융통이 가능해지거나 공백이 생긴 이들도 있지만 일반 직장인이나 자영업자들에게 한 달 살기는 꿈 같은 일. 한 달 살기 차선책으로 남은 휴가나 연·월차 등을 이용해 일주일 살기, 보름 살기(반달 살기)에 도전하는 이들도 있다. 숙박 예약 플랫폼인 ‘위메프 투어’에 따르면 국내 지난 7~8월 7박 이상 국내 장기 숙박 예약은 지난해 같은 기간 대비 1000% 급증했다. 농어촌 국내 여행 전문 관광 벤처 기업인 ‘시골 투어’ 역시 코로나 사태에 바이러스 청정 지역으로 꼽히는 농어촌을 찾아 ‘시골살이’를 하려는 이들의 문의가 대폭 늘었다.


한 달 살기 붐이 일면서 최근엔 일부 호텔에서도 2일 이상 연박하면 숙박비를 할인해주거나 일주일, 보름, 한 달 투숙 관련 프로모션을 진행하고 있다. 아예 ‘호텔에서 한 달 살기’를 내세운 숙박 예약 플랫폼도 나왔다. 관광 벤처 ‘트레블메이커’가 새로 선보인 ‘호텔에삶’은 코로나 후 한 달 살기 열풍과 함께 등장한 서비스다. 호텔에 ‘투숙’하지 않고 ‘입주’하는 개념을 선보인다.


전국의 각 지자체에서도 관광 활성화와 개발, 귀농·귀촌·귀어 인구 유입을 위해 한 달 살기 프로그램을 도입하고 있다. 최소 일주일부터 한 달까지 기간별로 체험단을 꾸려 숙박비와 식비 등을 지원하는 식이다. 한 달 살기를 콘셉트로 했던 tvN의 예능 프로그램 ‘여름방학’ 촬영지 강원도 고성군은 지난 10월 19일부터 11월 15일까지 청년들을 대상으로 한 달 살기 체험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앞서 지난 8월 ‘제주 한 달 살기' 이벤트를 진행했던 제주맥주도 12월 20일까지 한 달 살기 시즌2인 ‘겨울나기’ 편 참가자를 모집한다.


◇사전 답사 필수


한 달 살아보고 싶은 지역을 선정했다면 숙소 예약 전 사전 답사는 필수다. 주부 한혜진(42)씨는 초등학교 5학년인 딸과 강원도 고성에서 한 달 살기를 계기로 3년째 고성에서 머물고 있다. 한씨는 “코로나 사태로 다시 한 달 살기가 유행하면서 답사 한번 안 하고 숙소 예약부터 하는 이들이 많더라”며 “반드시 답사를 가 지역 특성과 주민 정서를 살핀 후 결정하는 게 현명하다”고 조언했다. 한씨처럼 초등학생 이하 자녀를 동반해 한 달 살기를 할 경우 응급실이 있는 병원과 도시 생활과 너무 동떨어지지 않은 인프라를 갖춘 곳을 선택하는 게 좋다. 아이들이 쉽게 지루해할 수 있고 아이들과의 한 달 살기는 생각보다 변수가 많기 때문이다.


자칫 주민 정서에 반하는 행동으로 주민들과 불협화음을 빚는다면 불편한 한 달 살기가 될 수 있다. 최근 두드러지는 문제는 ‘마스크 착용 예절’이다. 공기 좋은 곳에서 한 달 살기 한다고 마스크 착용을 하지 않고 공용 시설을 돌아다니거나 반대로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은 주민에게 마스크 착용을 강요해 마찰을 일으키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한 달 살기를 하더라도 코로나가 유행할 때는 숙소 외 지역에선 반드시 마스크를 착용하는 게 예의라는 걸 잊지 말 것.


[강릉·속초·고성=박근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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