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聖地가 된 사형장… 도시인의 고단한 삶 위로하네

'서소문 역사박물관' - 조선시대 사형장이던 곳 새단장

교황도 방문한 천주교 순교지… 지하엔 예배당·미술관 등 설치

"특정 종교색 강조하기보다 범종교적 추모 공간으로 재구성… 예수像도 웅크린 노숙자 형상"


조선 태종 16년(1416년). "예조에서 아뢰기를 '사람을 동대문 밖에서 사형하는 것은 미편(未便)합니다. 서소문 밖 성밑 10리 양천 지방, 예전 공암 북쪽으로 다시 장소를 정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는 기록이 실록에 나온다. 서소문은 사형장이었다. 19세기 천주교 박해 때 순교한 44명이 훗날 성인(聖人)으로 선포되기도 했다. 1973년 공원으로 지정된 이곳을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이 찾으면서 이목이 쏠렸지만 철로에 가로막혀 평소엔 찾는 발길이 많지 않았다.


잊혀 가던 공원은 지난 6월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으로 거듭났다. 지하 주차장 공간에 전시장과 종교·추모 시설을 만들고 지상의 공원도 새로 디자인했다. 억새가 일렁이는 공원은 가을빛을 즐기는 직장인들 명소가 됐다. 건축사무소 인터커드(윤승현 중앙대 교수), 보이드아키텍트(이규상), 레스건축(우준승)이 함께 설계했다. 최근 이곳에서 만난 윤승현 교수는 "설계 지침은 천주교 성지를 만드는 사업에 가까웠지만 점차 (특정 종교색보다) 공공적 가치를 발휘할 수 있는 쪽으로 방향이 설정됐다"고 했다. 재조성 과정에서 논란이 계속됐다. 서소문에서 천주교 신자들만 목숨을 잃은 게 아닌 만큼 특정 종교의 전유물이 돼서는 안 된다는 지적이었다. 이를 감안, 천주교에 국한되지 않는 보편적 추모 공간으로 조성하고자 했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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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에 전시 중인 조각가 배형경의 ‘암시’. 성별도 표정도 분명하지 않은 군상(群像)에서 허물을 벗어던진 인간의 원초적 모습이 엿보인다. ‘하늘과 대지 사이에 인간이 있다’는 문구와 함께 설치돼 있다. /이태경 기자

건축가로선 설계의 초점이 흐려지는 일이기도 했다. 지상 공원 곳곳에 고심의 흔적이 있다. 전부터 있었던 순교자 현양탑 외에 성모상이나 십자고상(十字苦像) 같은 상징이 없다. 눈에 띄는 건 티머시 슈말츠의 조각 '노숙자 예수'. 멸시받던 예수를 벤치에 웅크린 모습으로 형상화했다. 예수가 예수임을 짐작게 하는 건 발등의 못 자국뿐이다. 과거 이 공원에 드나들었던 노숙인들도 떠오른다.


지하에 조성된 건축은 전모를 한 번에 드러내지 않는다. 엄격하게 층을 분절하지 않고 순례하듯 경사로를 따라 내려가며 차례로 공간을 마주하는 구조다. 로비는 미술품 등을 전시하는 공간이다. 더 내려가면 서소문 순교자 정하상의 이름을 딴 작은 성당이 있고 램프가 끝나는 곳에서 '콘솔레이션 홀(위안의 공간)'에 다다른다. 한 줄기 자연광 말고는 조명을 극도로 억제함으로써, 스러져간 생명들을 묵념하듯 기리도록 한 추모의 공간이다. 문 없이 천장에 매단 철제 벽체만 바닥에서 2m 높이까지 내려와 있다. 윤 교수는 "이곳에 들어올 땐 마음의 태도를 살짝 바꾸자는 의미에서 드나들 때 고개가 살짝 숙여질 만한 높이를 선택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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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야외 공원에 설치된 티머시 슈말츠의 ‘노숙자 예수’. ②붉은 벽돌만으로 강력한 공간을 연출한 하늘 정원. 설치된 작품은 조각가 정현의 ‘서 있는 사람들’. ③작품을 관람하는 방문객들.

하이라이트는 '하늘 정원'이다. 보이는 것은 하늘뿐. 뻥 뚫린 하늘에서 햇빛이 눈부시게 쏟아져 들어온다. 다른 무언가에 구애받지 않고 초월적 존재인 하늘과 일대일로 마주하고 있으면 겸허해진다. 온통 붉은 벽돌로만 둘러싸인 높이 18m, 사방 33m의 공간에서는 서울 도심에서 맛보기 어려운 위압감이 느껴진다. 폐목을 활용한 조각가 정현의 '서 있는 사람들'이 설치돼 있다.


묘하게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가 떠오른다. 도심 동쪽의 DDP는 외국 건축가가 동대문운동장이라는 맥락을 지우고 파격적인 형태를 취했다. 서쪽의 이곳은 국내 건축가들이 역사적 의미를 살리면서 최소한의 조형적 몸짓에 머물렀다. 콘텐츠가 관건이라는 점은 비슷하다. DDP는 초창기 화려한 건축에 비해 콘텐츠가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곳 역시 천주교·천도교·실학 등 조선 후기를 아우르는 상설 역사 전시와 미술 기획전이 동시에 열려 박물관과 미술관을 합쳐놓은 듯한 느낌을 준다. 윤 교수는 "개장 전 축성 미사 때 시험해보니 마이크 없이도 콘솔레이션 홀의 음향이 상당히 풍성했다"면서 "음악과 미술, 역사가 어우러진 공간이 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했다. 콘텐츠를 어떻게 채워 나갈지가 과제로 남아 있는 셈이다.


[채민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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