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으로 이사만 60번... 웃음 고팠던 꼬마는 ‘일요일 막내딸’ 됐다
[아무튼, 주말]
[김은경 기자의 쉼표] 전국노래자랑 ‘송해 후임’ 김신영 MC 데뷔 후 첫 단독 인터뷰
‘일요일의 남자’ 송해는 “키가 작아 누구를 만나든 내려다본 적이 없다”고 했다. 전국노래자랑 무대에 세 살 꼬마가 올라오면 무릎을 굽히고 눈을 맞췄다. 그는 그렇게 전국노래자랑을 34년 동안 지킨 ‘작은 거인’이었다.
송해 1주기를 맞은 지난 6월의 어느 날, 서울 광화문에서 김신영(40)을 만났다. 송해의 실로폰을 물려받은 후임자는 더 왜소했다. 그녀의 키는 153㎝. 송해(162㎝)보다 9㎝ 더 작다. 송해의 빈자리에 낙점된 비결을 묻자 김신영은 “문턱이 낮은 사람, 어디 가나 있을 것 같은 편안함 때문인 것 같다. 지난 1년 가까이 촬영을 다녀보니 전국 어딜 가나 김신영 닮은꼴이 나오더라”며 웃었다.
‘뼈그우먼‘ 소리를 듣는 몇 안 되는 개그우먼이다. 김신영 안에 다른 김신영이 득시글하다는 뜻이다. 어렸을 적 가난으로 이사만 60번. 청도 할머니댁에 맡겨져 경상도 사투리를, 외할머니에게는 목포 사투리를 익혔다. 걸걸한 아저씨부터 꼬부랑 할머니까지 실감나게 흉내 낼 수 있는 건 육성회비를 못 내던 어린 시절, 학교 대신 길바닥과 시장통으로 등교해 사람 사는 모습을 구경한 덕이란다. 삶의 그늘과 깊이를 아는 그녀가 운명처럼 ‘일요일의 막내딸’로 등장했다. 이번 주에도 실로폰을 들고 전국 장삼이사의 인생 노래를 들으러 간다.
◇이제는 ‘일요일의 막내딸’
지난해 9월 3일 대구 달서구, 김신영의 전국노래자랑 첫 촬영 현장. / 뉴스1 개그맨으로 데뷔한 김신영은 라디오 DJ, 영화배우, MC 등으로 활동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남의 시선 때문에 하고 싶은 것 못 하고 죽으면 너무 억울하지 않겠냐”며 “눈감기 전 ‘아 좋았어, 나이스!’ 하고 죽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
-지난해 9월 첫 촬영은 어땠나요.
“대구였는데 중압감이 말도 못했어요. 그토록 마이크를 잡아보고, 더 많은 사람 앞에도 서 봤는데 전국노래자랑은 다르더라고요. 한일전에 나서는 축구 대표팀이 이런 기분일까? 그런 생각까지 들었어요.”
-가을겨울봄을 지나 여름에 도착한 소회는 어떤가요.
“어휴, 아직 돌아보고 말고 할 여력이 없어요. 매주 새롭습니다.”
-그래도 촬영하면서 느끼는 게 있을 텐데요.
“송해 선생님께서 전국노래자랑을 정말 사랑하셨다는 거요. 사랑이 아니면 못 해요. 일단 스케줄이 극악무도하고요(웃음). 너무 덥거나 추울 땐 촬영을 못 하니까 요즘 같은 때 일주일에 두 번 촬영하는데, 대본이 전날 오후 5시쯤 나와요. 큐카드(대본이 적힌 카드)나 모니터는 없고요. 그냥 그 현장에 완전히 녹아들어서 같이 울고 웃고. 사랑 말고는 형용할 길이 없어요.”
-송해 시절에 10% 안팎이던 시청률이 5~6%대로 떨어졌습니다.
“(잠시 침묵) 처음 MC 발표가 났을 때 ‘저는 42년 된 큰 나무 옆에 자라나는 작은 나무’라고 했어요. 거목과 떡잎을 비교하는 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요. 기어다니는 8개월 아기한테 ‘너는 왜 못 뛰냐’고 하진 않잖아요. 일단 하나만 제대로 가져가자, 뿌리만 제대로 내리자는 마음이거든요. 그게 송해 선생님이 보여주신 사랑이에요.”
-진행이 예전만 못하다는 혹평도 있습니다만.
“제가 송해 선생님의 입담, 진행력, 인생을 따라잡을 수 있을까요? 자칭 ‘일요일의 막내딸’이고 좀 부족하지만, 가족들 관심 속에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어요. 집에 막내딸이 오면 일단 분위기가 화기애애하잖아요.”
잠깐 뜸을 들이더니 김신영이 말을 이었다.
“며칠 전에 서울 도봉구 촬영이 있었어요. 비가 쏟아졌어요. 방청 오신 분들이 하나둘 자리를 뜨니까 회색 플라스틱 의자가 점점 많이 보이는 거예요. 녹화 중단하고 내일 다시 하자는 얘기가 나오고…. 그래도 아직 앉아 있는 분들이 계시니까 마이크를 수건으로 감싸고 비트박스도 하고 ‘남행열차’도 불렀어요. 어떤 분은 따라 부르고, 비옷을 갖다 주기도 하시더라고요. 그러다 보니 거짓말처럼 해가 비치는 거예요. 아, 이게 전국노래자랑이구나 싶어요. 남아주신 분들께 말씀드렸어요. ‘비가 세차게 와도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하겠습니다!’”
-김신영만의 전국노래자랑은 장차 어떤 모습일까요.
“김신영의 전국노래자랑을 만들 생각은 없어요. 처음에는 잘하고 싶어 대본이 나오면 밤새 깜지를 쓰면서 외웠어요. 완벽하게 준비하고 싶었죠. 근데 전국노래자랑은 참가자와 방청객이 만드는 무대잖아요? 제가 암만 까불고 구르고 한들 만들어지는 게 아니에요. 혼자 100을 준비하는 건 아무 의미가 없더라고요.”
-기억에 남는 참가자라면.
“광부를 30년 하고 퇴직하신 분이 나오셨어요. 태백의 마지막 광부시래요. 그동안 다른 동료들은 다 이혼을 했다는 거예요. 광산에서 언제 죽을지 모르니까. 그런데 우리 아내만큼은 끝까지 나를 지탱해줬다는 얘길 하셨어요. ‘사랑합니다’ 하면서 손을 바르르 떠시는데, 진짜 인생이 거기 있잖아요!”
◇웃음이 고팠던 어린 시절
김신영은 어릴 적 가난 때문에 부모님과 오빠, 두 동생 등 여섯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 살았다. 전학을 너무 자주 다녀 ‘얘랑은 언제까지 친구할 수 있을까’ 정을 깊게 못 붙였다. 때론 혼자 살았다. “산전수전 다 겪은 ‘덕분에’ 코미디언이 됐다”고 했다.
-이사를 정말 많이 다니셨더군요.
“최근에 동사무소에서 주민등록등본을 뗄 일이 있었어요. 별 생각 없이 주소 변경 이력을 포함해 뽑았는데 세상에, 무슨 등본이 끝도 없이 나오는 거예요. 책 한 권처럼. 매니저랑 같이 갔는데 부끄럽기도 하고 웃기기도 하고. 코미디가 별 게 아니에요(웃음).”
-어린 나이에 고생을 너무 많이 했네요.
“고생인 줄 몰랐어요. 초등학교 때 2년 정도 서울 은평구 역촌오거리 달동네에서 혼자 살았는데 옆집, 그 옆집에 저처럼 혼자 사는 아이들이 있었어요. 특별하단 생각은 안 했어요. 그런 아이들은 불행하단 생각도 못 해요. 하루하루가 생사의 갈림길이니까요. ‘오늘 먹느냐, 못 먹느냐’예요. 당장 내일 학교에 가야 되는데 버스 회수권이 하나도 안 남았잖아요? ‘어떡하지. 새벽 5시에 일어나서 걸어갈까?’ 그 생각만 하다 잠드는 거예요.”
개그맨으로 데뷔한 김신영은 라디오 DJ, 영화배우, MC 등으로 활동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남의 시선 때문에 하고 싶은 것 못 하고 죽으면 너무 억울하지 않겠냐”며 “눈감기 전 ‘아 좋았어, 나이스!’ 하고 죽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
-그런데 어떻게 코미디언을 꿈꿨나요.
“웃음이 고팠어요. 집에 혼자 있으면 웃을 일도 없고 웃음소리를 들을 일도 없잖아요. 꼬맹이 때부터 학교에서 친구들 한두명 모아놓고 심형래 선배님을 따라했어요. ‘띠리리리리리~’ ‘영구 없~다’ 하면 친구들이 막 와하하 웃는 거예요. ‘신영이 너무 웃겨’ 하는 그게 너무 좋았어요.”
김신영에게는 일곱 살 꼬마부터 백반집 아줌마까지 수많은 보통 사람이 들어있다. 전라도와 경상도를 가로지르고 성별과 나이도 넘나든다. 김신영의 사람 흉내는 극사실주의다. 이를테면 이렇다.
“제일 바쁜 여섯시 반에! 소고기 하나, 불백 하나, 짬뽕, 계란말이! 누구야? 메뉴 통일해서 시키란 말이야! 우리 아저씨 아프다니까 왜 자꾸 그래~”
“오야 여보세요, 너거들 안 내려오나? 그라지 뭐 서울살이하므는 바쁘제. 나는 개안타 걱정허지 말어라. 근데야, 콜록콜록! 내가 올해까지는 못 넘기지 싶다. 아이다 너거 올 필요 없다. 항~시 어른들한테 공손히 살고! 아이다 돈 필요 없다! 보내지 마라니까 참. 그라모 농협 439에 7305….”
밥집 아줌마가 메뉴 좀 통일하라고 다그치는 이유는 주방에서 일하는 바깥양반이 아프기 때문. 시골집에 내려올 필요 없다고 손사래치는 ‘K할머니’는 사실 용돈보다 손주들을 그리워한다는 것을 모를 리 없다. 김신영은 짠맛을 약간 더해 더 풍부한 단맛을 낸다.
-애환까지 복사해내는 것 같아요.
“그게 진짜니까요. 초등학교 때 공납금(육성회비)을 못 내면 눈치가 보여 학교에 못 가요. 그럼 낮에 할 게 없으니까 집에선 종이에다 그림 그려서 혼자 상황극을 하고, 지루해지면 밖에 나와 사람 구경을 했어요. 시장 가서 장사하는 분들도 보고 싸우는 것도 관찰하고요. 그럼 시간이 어찌나 잘 가던지.”
-그게 콩트와 생활 연기로 이어졌으니 천직을 찾은 건가요?
“희극 배우라는 직업을 갖게 돼 감사하게 생각해요. 보통 ‘불우한 환경’ 뒤에 ‘탓’이란 말이 붙잖아요. 저는 정반대예요. 환경 ‘덕분’이라고 생각해요. 저처럼 스펙터클한 인생을 누가 살아봤을까요? 김신영은 그렇게 자랐기에 경험 부자, 에피소드 부자예요.”
-부모님이 원망스럽지는 않았나요.
“한때는 부모님도 나도 다 미웠죠. 지금 생각하면 엄마도 아빠도 짠해요. 제일 힘들게 살았을 때 아빠가 30대 초반이었거든요. 제가 지금 마흔인데 저보다 훨씬 젊었던 거잖아요. 어린 딸자식 데리고 셋방 살면서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어디 나가서 술도 못 마시고 집에 들어와서 반주로 소주 반병 하는 게 다였어요. 그런데도 저 꼬박꼬박 도시락 싸주셨어요.”
◇죽다 살아나 보니 인생이 보였다
김신영 안에는 다른 김신영이 득시글하다. 위쪽부터 SBS ‘웃음을 찾는 사람들’의 ‘행님아’ 코너에서 일곱 살 남자아이로 분장한 김신영, 그녀의 부캐(부캐릭터)인 트로트 가수 ‘둘째 이모 김다비’, 형사를 연기한 영화 ‘헤어질 결심’의 한 장면, MBC 라디오 ‘정오의 희망곡’을 진행하는 모습. / SBS ·김신영·CJ ENM·MBC 라디오 |
김신영은 20년 전인 2003년 스무 살에 SBS 공채 7기 개그맨으로 데뷔했다. 대중은 그를 웃찾사의 코너 ‘행님아’에서 포동포동한 얼굴에 콧물을 묻히고 “한이 많아서~” 하며 히끅히끅 우는 아이로 기억한다. 3년 만에 예능상을 휩쓸었다. 타고났다는 얘길 들으며 승승장구하던 2012년 겨울, 김신영은 갑자기 숨이 안 쉬어졌다. 심장이 터질 것 같고 눈물이 차오르는데 ‘이러다 죽겠구나’ 싶었다. 공황장애였다.
-어떤 계기가 있었나요? 악플?
“뭐 하나 때문은 아닌 것 같고요. 한 10년 앞만 보고 달리다 보니 스트레스가 컸던 것 같아요.”
-그때 아버님께서 자책을 많이 하셨다고요.
“안 그래도 미안하단 말을 아주 달고 사시는데, ‘아빠가 너를 아프게 했다’ 그러시면서 웬 약초를 구해와서 짓이겨서 머리에 발라주시더라고요. 머리에 좋은 약초라고. 어릴 때 형편이 안 좋았고 커서는 제가 돈을 벌어다 드리니까 마음에 빚이 있으셨나봐요.”
-공황장애 이후 달라진 게 있다면.
“처음으로 저 자신을 돌아보게 됐어요. 그동안은 끌려다녔어요. 어렸을 때는 제 인생이 아니라 부모님 인생이었다고 생각하고요. 데뷔한 뒤로는 불러주는 예능 프로그램만 나갔어요. 그런데 당장 죽을지도 모른다는 감각을 경험하곤 내가 하고 싶은 걸 찾아서 해야겠단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했나요?
“셀럽파이브도 하고 ‘둘째 이모 김다비’도 만들었죠.”
셀럽파이브는 2018년 김신영이 동료 코미디언 송은이·신봉선·안영미와 결성한 4인조 걸그룹(?)이다. 일본의 유명한 고교 댄스부인 TDC(Tomioka Dance Club·도미오카 댄스 클럽)의 무대를 패러디해 1980년대 복고 패션을 하고 디스코 음악에 맞춰 춤을 춘다.
“유튜브에서 TDC 영상을 보고 꽂혀서 일본 오사카에 있는 도미오카고에 직접 찾아갔어요. 매니저도 없이 혼자. 한국에서 온 코미디언이라고 말하고 댄스부에 무작정 춤을 따라 추고 싶다고 했어요. 고맙게도 허락을 해줬고, 돌아와서 의상부터 개사까지 제가 다 기획했어요.”
둘째 이모 김다비는 김신영의 ‘부캐(부캐릭터)’. 서울 망원 시장에서 산 골프복을 입고 빨간 ‘루주’를 과하게 바르다 앞니에 묻히고 다니는 45년생 다비 이모는 전국노래자랑에 나가는 게 평생 소원이다. 전국노래자랑 얘기를 할 때 한마디 한마디 진중하게 내뱉던 김신영은 ‘부캐’ 이야기에 부쩍 말이 빨라졌다.
-굉장히 신나 보이네요.
“평생 코미디만 할 줄 알았는데 서른다섯에 세상에 눈을 떴어요. 셀럽파이브도, 둘째 이모 김다비도 준비하는 과정이 엄청, 너무, 즐거웠어요. 과정으로 족할 만큼요. 사실 결과는 사람들의 판단이지, 내 손에 있는 게 아니에요. 사람들이 재밌어하면 감사하고요. 실패하면…. 나중에 또 소재로 쓰죠 뭐, 하하!”
◇어느 인생이나 결핍은 있다
코미디언만 하다 죽겠지 하던 김신영은 지난해 박찬욱 감독의 영화 ‘헤어질 결심’에서 주인공 해준(박해일)의 후배 형사를 연기했다. 박 감독은 김신영을 두고 “탁월한 천재라는 확신이 있었다”고 했다. 청룡영화상 감독상을 받고 김신영에게 수상 소감 대독을 맡길 정도였다.
-대리 수상 소감이 화제였어요.
“감독님이 감사하게도 제 얘기를 먼저 한 다음에 수상 소감을 읽어 달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인삿말로 저를 ‘희극 배우 김신영’이라고 소개했거든요. 저는 배우예요. 그 앞에 붙은 ‘희극’은 장르일 뿐이라는 걸 말하고 싶었어요.”
-스스로 그 장르에 갇혀 있었다고 고백했죠.
“사람이 살다 보면 가장 무서운 게 편견 또는 선입견과 싸우는 거예요. 저 스스로 ‘코미디언이 영화를? 우습게 보겠지?’ 했어요. 원래 남의 눈보다 내 눈이 제일 무서운 거더라고요(웃음).”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를 쓴 박해영 작가는 ‘겹이 있는 배우’라고 칭찬했는데.
“두고두고 저를 지탱해줄 것 같아요. 탕웨이 배우는 ‘나는 코미디를 너무 하고 싶다. 정말 부러운 재능이고, 리스펙트(존경)한다’고 해줬어요. 제가 누를 끼칠까 봐 걱정했는데 그런 얘길 들으니 정말 힘이 되더라고요.”
-돌파하고 싶은 편견이 또 있나요.
“전국노래자랑 MC가 된 것도 벽을 깬 거라고 생각해요. 전유성 선배님도 소식을 듣고 전화로 ‘너는 항상 고정관념을 깨는 아이구나’ 하시더라고요. 음, 욕심이 있다면 저 혼자만이 아니라 코미디언이라는 직업에 대한 편견을 깨고 지평을 넓히고 싶어요.”
송해는 실로폰으로 인생을 말했다. ‘땡’을 받아보지 않으면 ‘딩동댕’의 정의를 모른다고, ‘땡’을 받고 사정하는 참가자에겐 땡, 땡, 땡을 더 치고는 세 번 합치니 ‘딩동댕’ 아니겠냐고 했다.
김신영도 비슷한 말을 했다. “저뿐이겠나요, 누구에게나 결핍과 시련은 있어요. 봄의 마지막 절기 곡우에 비가 내려야 풍년이듯이 어떤 시련은 인생의 흙과 양분이 돼요. 전국노래자랑 부천 예심에는 1200분이 오셨어요. 무대가 간절하든, 누군가에게 전할 진심이 간절하든, 제일 간절한 열여섯 팀이 본선에 가거든요. 제가 직접 실로폰을 치진 않지만 전국을 돌면서 인생을 넓게 깊게 배우고 싶어요.”
[김은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