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구채구 일측구, 아름다운 물빛의 향연(전죽해,팬더해,오화해,진주탄폭포,경해)
구채구(九寨沟)가 가장 아름다운 시기는 10월 말에서 11월 초, 즉 형형색색으로 물든 단풍이 그 화려함을 뽐내는 가을이라고 한다. 그래서 나는 비수기로 접어들기 시작한 11월 말의 구채구에 대해 큰 기대를 갖지 말자고 스스로 되뇌이며 여행을 시작했다. 그러나 셔틀버스를 타고 이동하며 차 창 밖으로 만난 구채구는 '관광 비수기이기에 그가 주는 감동이 덜할 것'이라 얕잡아 봤던 내가 부끄러워질 정도로 아름다웠고, 그런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 겨울 산의 차갑고 도도한 자태를 마음껏 뽐내고 있었다.
구(九 jiu), 채(寨 zhai), 구(沟 gou).
'9개의 마을이 있는 호수지대'라는 뜻의 지명이 뜻하는 것 처럼 구채구에는 총 9개의 티벳장족 마을이 있고, 수 많은 호수가 곳곳에 위치해있다. 구채구에는 개인차량이나 패키지 관광차량이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반드시 내부에서 운행하는 구채구 순환버스를 이용해서 둘러봐야한다. 관광객들은 이 순환버스를 이용해서 구채구를 둘러보게 되는데 차를 내린 곳과 타는 곳이 다르기 때문에 정보를 잘 숙지하고 일행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유의해야한다.
구채구는 크게 수정구, 측사와구, 일측구로 나눌 수 있다. 취향에 따라 왼쪽의 측사와구 또는 오른쪽의 일측구 중 한 곳을 선택해서 먼저 둘러보고 나머지를 보면 되는데, 구채구에서 가장 큰 호수인 장해와 가장 아름다운 물빛을 지녔다는 오채지가 측사와구에 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일측구를 먼저 보고 중간의 갈림길에 있는 식당에서 식사를 한 뒤, 측사와구와 수정구를 보며 내려오는 코스로 둘러본다고 한다.
개별여행의 경우에는 일측구의 맨 끝 코스인 원시삼림까지 가는 경우도 있다지만, 보통 나와 같이 패키지로 간 경우에는 전죽해(箭竹海)부터 시작해서 내려간다고 한다. '호수'를 주요 포인트로 하는 구채구에서 원시삼림은 그다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의 이번 여행도 일반적인 코스를 따라 일측구의 전죽해부터 시작했다. 해발 2,601m에 있는 전죽해는 그 높은 고도와 낮은 기온에도 얼지 않는 호수라고 한다. 전죽해보다 낮은 고도에 있는 팬더해는 한 겨울 기온이 많이 낮아지면 호수가 꽁꽁 얼어버린다고 하니 신기할 따름이다.
위, 아래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투명하게 반영이 지는 잔잔하고 아름다운 호수 위를 사뿐히 날아오르며 춤을 추듯 결투를 하는 모습. 바로 2002년 제작된 장이모우 감독의 영화 <영웅>의 한 장면이다. 전죽해는 바로 이 장면의 배경으로 사용되며 유명해졌다. 영화 속에서 장만옥의 시신을 두고 주인공 이연걸과 양조위가 결투를 벌이는 장면에서는 전죽해 가운데 정자가 오롯이 서 있어 운치를 더하고 있었는데 아쉽게도 이 정자는 영화 촬영을 위해 임시로 지은 것이라 촬영이 끝난 뒤에는 철거했다고 한다.
거장 장이모우 감독의 손길을 거친 영상을 먼저 접해서일까? 깊은 녹색의 호수와 그 아래 스러진 삼나무가 투명하기 비치던 전죽해는 분명 아름다웠지만 내 기대만큼, 영화 속 장면만큼 그렇게 신비스럽고 아름다운 느낌은 아니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는데.. 전죽해가 바로 그런 것이었나보다.
전죽해를 스쳐가듯 둘러보고 나서 향한 곳은 팬더해(熊猫海). 셔틀버스에서 내려서 지하도를 건너면 팬더해가 모습을 드러낸다. 시원하게 탁 트인 전죽해와 대비되는 정적인 분위기..주변 풍경이 그대로 비칠 정도로 움직임이 없는 호수지만, 가끔은 그 모습을 보기 위해 몰려온 사람들을 향해 부끄러운 듯 잔잔한 물결을 내보이기도 한다.
시옹마오 시옹마오.. 여담이지만 나는 '팬더'라고 부르는 것 보다 '시옹마오'라고 부르는 것이 더 좋다. '고양이곰'이라니. 세상에 없던 동물을 처음 발견했을 때의 당혹감이 가득 담긴 이름 같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구채구 팬더해는 팬더가 이 곳의 물을 좋아해서 물을 마시러 자주 내려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지나가는 말로는 어느 외국 사진 작가가 이 곳에 와서 사진을 찍는데 마침 팬더가 내려와서 물을 마셨고, 그 장면을 찍은 사진이 유명해지면서 팬더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도 하고.. 어쨌거나 한 번 들으면 쉽게 잊혀지지 않는 이름인 것은 분명하다.
팬더해에 막 들어섰을 때에는 아직 해가 들지 않아서 차갑고 새파란 느낌을 받았는데, 잠시 시간이 흐르고 태양빛이 이 곳에 들기 시작하니 팬더해의 색이 따뜻한 녹색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시간, 빛, 수심에 따라 변하는 물빛이 구채구의 매력이다. 어쩐지 팬더가 이 곳을 좋아하는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팬더해에서는 티벳장족의 전통 의상을 입고 사진을 찍어볼 수 있다. 호객하는 이들도 모두 이 곳에 거주하는 장족이다. 중국의 전통 의상과는 확연히 다른 복색이 눈길을 잡아 끌어 호객꾼과 흥적을 한 번 시도했다. 즉석 사진을 찍는 가격은 35元~50元 사이였고, 흥정을 통해 얻은 가격은 5元으로 흥정을 하고 사진을 막 찍으려고 하는데! 가이드가 다음 코스로 이동하자고 했다. 일행에서 빠져 개별행동을 하면 안되기에 호객꾼을 뒤로하고 팬더해를 빠져 나왔고, 결국 그 이후에도 사진을 찍을만한 곳이 없어서 티벳장족 복장을 하고 사진을 찍는 것은 실패로 돌아갔다.
다음 행선지는 '다섯가지 꽃의 바다'라는 뜻을 지닌 오화해(五花海). 전죽해, 팬더해, 오화해, 경해.. 이렇듯 구채구에 있는 호수 이름에는 호수 호(胡)가 아닌 바다 해(海)가 붙어 있다. 평생 바다라고는 구경한 적이 없지만, 산 아래 세상에는 '바다'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들어 알고 있던 장족이 '바다'를 상상하며 이 곳 호수에 하나씩 이름을 붙였다. '전죽의 바다', '팬더의 바다', '다섯가지 꽃의 바다', '거울 바다'.. 바다를 그리던 산중인들의 마음이 서글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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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의상을 입고 기념사진을 찍지 못한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고 셔틀버스에 올라 향한 곳은 오화해(五花海). '다섯가지 꽃'이라는 이름에서 느껴지듯 오화해는 아름답고 화려한 물빛을 가진 호수였다. 앞에서 본 전죽해, 팬더해의 물빛이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화려하고 다채로운 물빛..잠시 핸드폰을 꺼내서 사진을 찍고, 데이터로밍을 이용해 페이스북에 공유했다. 돌아오는 말은 하나같이 똑같다. "이거 진짜에요?"... 마치 컴퓨터 보정툴을 이용해 한껏 멋부린 듯한 색감.. 호수 아래의 지반을 이루고 있는 성분이 각각 다르기 때문에 같은 호수 아래서도 이렇게 물 색이 각기 다르게 보이는 것이라고는 하지만, 한 호수 안에 이렇게 다채로운 색이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이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
평균 수심이 5~8m정도이고 가장 깊은 곳이 11m라는 오화해. 오화해를 비롯한 구채구 호수에는 300만 년 전 녹은 빙하 물이 고여 있다고 한다. 이 빙하침전물에는 탄산칼슘이 다량 포함되어 있는데, 이 때문에 호수에 잠긴 나무도 썩지 않은 채 그 모양을 그대로 유지하고, 투명하고도 신비로운 물빛을 띄게 되었다고 한다. 다시보고, 다시봐도 신기하다.
구채구에는 호수만 있는 것이 아니라 폭포도 있다. 대표적인 것이 진주탄폭포(珍珠滩瀑布), 낙일랑폭포(落日朗瀑捕), 팬더해폭포(熊猫海瀑捕) 등 인데, 각기 다른 특징과 멋이 있다. 그 중 구채구에 있는 폭포 중 가장 크고 이번에 내가 보고 온 폭포가 바로 163m의 폭을 가진 진주탄폭포이다. 진주탄폭포의 윗 부분 바닥에는 이끼가 많이 끼어 있는데 윗 호수에서 흘러 내려오는 물이 이 이끼에 부딪혀 알알이 흩어지고, 그것이 햇빛에 반사되어 마치 진주 알갱이가 쏟아져 내리는 듯 하다고 해서 진주탄폭포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순환버스에서 내려 진주탄을 가로지르는 길을 따라 걸으며 아름다운 배경으로 사진을 찍다보니 커다란 카메라를 들고 있는 중국인 아저씨가 말을 걸어온다. "거기 말고 여기서 찍어야지!" 예고도 없이 갑자기 말을 걸어와서 당황하기도 잠시, 그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을 따라 가니 빼곡히 눈 쌓인 산 뒷편으로 조각처럼 깎아둔 듯한 설산이 자리잡고 있다. 진주탄 만을 보며 지나쳤다면 놓쳤을 장관이다.
계속해서 길을 따라 가다 보면 진주탄 폭포 아래로 이어진다. 산책로처럼 잘 꾸며진 관람로였지만 전날 내린 눈이 녹지 않아 길이 꽁꽁 얼어있었다. 운동화를 신었는데도 불구하고 바닥은 미끌미끌.. 계단에서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긴장하고 걸었더니 계단을 다 내려갈 때 쯤에는 무릎이 시큰시큰 시리다. 폭포 아래에서 사진을 많이 찍고 싶었지만 폭포에서 날라오는 물방울이 카메라 렌즈 필터에 자꾸 붙는 바람에 몇 번 사진찍기를 시도하다 이내 포기해버렸다.
진주탄 폭포에서 순환버스 승차장까지의 거리는 생각보다 멀었다. 눈꽃이 가득 핀 나무들 사이로 걷다보면 불어오는 바람에 눈 알갱이가 날리고, 청명한 하늘과 부드러운 태양빛이 쌓인 눈 위로 반사되어 상쾌한 느낌을 받았다. 순환버스를 타기 위해 걸어가는 길.. 진주탄에서 작게만 보였던 설산이 어느새 가까이 보인다.
수공예품을 팔고 있는 장사치 앞에 서니 예쁘고 화려한 장신구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이 사람도 장족이라고 한다. 관심이 가는 모양의 팔찌가 있어 잠시 가격을 흥정하다가 흥정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아 자리를 떴다. 그리고 5분 정도 걸었을까? 일측구의 마지막 코스, 경해로 내려가는 순환버스 승차장이 나왔다.
산을 빼곡히 채운 나무에 살포시 앉은 눈꽃이 잔잔한 호수에 비치고 푸른 하늘을 머금은 호수의 물빛은 하늘 보다도 푸르다. 여기는 '거울 바다'라는 이름의 경해(镜海). 구채구에서 가장 고요한 호수라는 이 곳은, 바람 없이 맑은 날씨에는 호수의 물이 작은 물결 하나 없이 잔잔하기에 주변을 감싸고 있는 산이 마치 거울에 반사되듯 호수에 그대로 비친다고 한다. 그리고 운 좋게도 마침 내가 구채구를 찾았을 때에도 그런 평온한 날씨였다.
구채구의 다른 호수들이 그 특유의 투명하고 화려한 물빛을 자랑하며 자태를 뽐낸다면, 경해의 물빛은 호수를 감싸고 있는 주변의 모든 색을 머금은 듯 하다. 카메라를 들어 한 컷, 한 컷 사진을 찍고 LCD창을 통해 확인을 해 본다. 산, 하늘, 나무까지.. 주변의 모든 것들이 한 치의 다름도 없이 호수에 비쳐 어디까지가 실제이고, 어디까지가 반영인지 구분하기가 어렵다.
'경해에서 사진을 찍는 연인은 그 사랑이 변치 않는다'는 속설이 있기에 이 곳은 연인들의 사진 포인트가 되곤 한다. 둘이 하나인 듯 아름답게 반영된 모습을 보고 있자니 왜 그런 속설이 생겨났는가를 으레 짐작할 만 하다. 안타까운 점은 내가 연인과 함께 이 곳을 찾지 못했다는 것..
태산, 황산, 장가계 등에는 있는데 구채구에는 없는 것.. 사람의 손을 탄 흔적이다. 중국의 명승지에 으레 자리잡고 있는 황제를 위한 돌계단이나 절벽을 깎아 붉은 글씨로 당대의 명 싯귀를 적어 넣는다거나.. 하다못해 까마득한 절벽 위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진 정자라도 하나 있을법 한데, 구채구에는 아홉개의 마을과 천혜의 자연 이외에는 그 어떤 것도 없다. 그 자체만으로의 아름다움.. 그것이 바로 구채구가 가진 가장 큰 매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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