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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항상 문구 곁에 머물겠어요”.. 문구소녀는 왜 문구에 푹 빠졌을까?

“태블릿 PC에도 종이 질감 필름을 사서 붙이고 애플 펜슬 펜촉도 만년필 느낌이 나게 바꿔 쓰는 사람들이 꽤 있어요. 온라인이 범람하는 시대에서 아날로그 감각은 오히려 더 새롭게 다가올 거라고 믿어요(웃음).”


바야흐로 디지털 시대다. 당장 스마트폰 하나면 못 할 일이 없다. 하지만 이처럼 많은 것들이 빠르게 변해가는 가운데도 여전히 아날로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다. 조금은 느리고 천천히 흐르더라도 손때 묻은 것들에 마음을 두는 이들이다.

‘문구소녀’라는 필명으로 활동하는 문구 덕후 정수연 씨도 마찬가지다. 그는 질감과 패턴이 각기 다른 수첩이나 굵기와 종류가 제각각인 볼펜들을 모은다. 또한 여전히 연필을 칼로 깎아 쓰기도 한다. 그에게 문구는 실용의 영역을 넘어 ‘취향’의 범주다. 국내 문구가 실용성에만 치중된 점이 아쉬워 해외에서 심미적인 문구들을 하나 둘 수입해 직접 온라인 문구점을 창업했을 정도로 문구 수집에 열정적이다. 또한 2017년 개설한 인스타그램 계정 ‘문구소녀’를 통해 1000여 개가 넘는 문구 관련 글을 올리기도 했다. 2021년 12월부터는 국내 유일 문구 뉴스레터 ‘문구구절절’을 운영하고 있다. 지난해 일본 도쿄로 다녀온 문방구 여행을 주제로 책을 출간하기도 했다. 올해 중 2권의 문구 책을 추가로 낼 계획도 있다.


희미해져 가는 아날로그적 감수성을 지켜가는 문구소녀에게서 문구 하나에 집중해 살아온 지난 7년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문구는 어린이들의 전유물?

어린이들에게 문구는 ‘생필품’이다. 등교길에 문구점에 들러서 수업 준비물을 챙기는 것은 물론 하교길에도 참새가 방앗간을 못 지나치는 것마냥 괜히 한번 쓰윽 둘러보곤 한다. 볼펜이 멀쩡한데도 괜히 인기 캐릭터가 그려진 새 볼펜을 한번 딸깍이고 몇 장 쓰지도 않은 공책이 많은데도 괜스레 새 공책을 들춰본다.


문구소녀 역시 보통의 어린이들과 다르지 않았다. 평범하게 문구를 좋아한다고 믿었던 그가 스스로 덕력(!)의 소유자라는 것을 깨달은 건 어른이 됐을 무렵. 생일 선물로 무얼 받고 싶냐는 친구의 말에 ‘문구면 다 좋다’고 답하자 볼멘소리가 돌아왔다. “그게 제일 어려워, 너는 이미 다 가지고 있잖아.” 문구를 사는 데 한 달에 10만 원은 쓴다는 말에 다들 놀라기도 했다. 성인이 되고 난 후에는 문구를 사는 데 한 달에 1000원도 안 쓰기도 하는데 대체 무얼 사냐면서.


그럼에도 끝끝내 덕후까지는 아니고 그저 ‘좋아하는’ 것이라고 믿었던 그가 덕질을 인정한 것은 2017년 10월 온라인 문구점 ‘문구소녀’를 창업하면서다. 당시 한 유튜버의 스튜디오에서 근무하던 그는 계약 만료 전 퇴사를 통보 당하는 등 부당 대우에 이골이 나있었다. 일단 취업은 하려고 이곳저곳에 자기소개서를 쓰면서도 회사에 자신을 끼워 맞추고 있다는 서글픔이 들었다.


이에 좋아하지도 않는 일을 하면서 부당한 대우를 받을 바에야 좋아하는 일을 하겠다고 결심했다. 아이템 선정에 오랜 시간이 걸리지도 않았다. 당장 주변을 둘러봤을 때 가장 많이 있는 것이 문구였기 때문. 물론 문구를 좋아한다는 마음 하나로 창업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국내에 사무용품을 파는 문구점은 많지만 심미적인 제품을 구비한 문구점은 쇠퇴하고 있었다”며 “다꾸(다이어리 꾸미기)와 문구 수집에 관심 많은 ‘나 같은’ 사람들을 위한 문구 브랜드가 필요하다고 봤다”고 말했다.

문구소녀가 직접 디자인해서 판매했던 마스킹 테이프 도안.


당시 판매하던 제품들의 사용 후기를 모두 인스타그램 계정에 업로드했다.

문구소녀는 다양한 문구류가 발달한 일본에서 제품을 수입해 판매했다. 이와 더불어 시각디자인을 전공한 경력을 살려 직접 디자인한 스티커와 메모지도 팔았다. 창업과 동시에 인스타그램 계정도 개설했다. 판매하는 제품들을 활용한 다꾸 사진을 올려 홍보하기 위해서였다. 제품 상세 페이지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사용하면 어떻게 보일지, 또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지를 알려주면 소비자들이 더욱 호응할 것이라고 판단해서다. 100여 개가 넘는 제품을 모두 써서 콘텐츠를 제작했고 계정을 개설한 지 1년도 안 돼서 팔로워는 8000명까지 늘어났다. 그렇게 ‘문구소녀’는 승승장구할 것처럼 보였다.

덕업일치의 냉혹한 현실

흔히 덕후의 최전선에 있는 사람은 덕질 대상으로 직접 창업을 하거나 관련 일을 하는, 말 그대로 ‘덕업일치’를 이룬 사람이라고 한다. 하지만 덕질과 ‘업’을 일치시키려면 단지 좋아하는 마음만으로는 부족하다. 문구소녀가 이를 깨달은 것은 온라인 문구점을 창업한 지 1년 6개월이 지났을 때다.

“돈을 버는 것은 좋아하는 마음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더라고요. 결국 수익을 창출해야 좋아하는 것, 즉 덕질에 더 집중할 수 있는 구조가 만들어지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당시에는 좋아하는 마음만 있다면 어떻게든 될 것이라고 막연히 믿었는데 씁쓸한 실패였죠.”


사업의 ‘사’자도 모르고 단지 문구를 좋아하는 마음으로 뛰어든 그는 경영에 대한 이해도가 낮았다. 혼자 문구 수입부터 재고 관리, 배송, 홈페이지 운영 등을 모두 담당하기도 버거웠다. 게다가 문구는 단가가 낮아서 박리다매를 해야 하는 구조인데 실용적인 제품들이 아니다 보니 ‘다매’가 들어갈 틈이 좁았다. 그는 “시장 조사를 철저히 하지 않은 것도 패착 요인”이라며 “대중적인 문구점을 자주 찾아 어떤 제품이 요즘 인기가 있는지 살펴야 했는데 문구점에 가면 반드시 ‘사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방문하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그의 방 한 편에는 팔리지 못한 문구들이 쌓여만 갔다. 그는 돌이켜 보면 늘 집에서 문구점 냄새가 났다며 회상한다. 폐업하고 처분 못한 상품들을 이곳저곳 기부도 많이 했다.


2019년 그는 사업을 정리하고 부동산 개발회사의 마케터로 취직했다. 문구 전문 회사에 지원할 법도 한데 그는 쳐다도 보지 않았다. ‘문구’를 떠올리는 것 자체로 마음이 괴로웠기 때문이다. 그는 “창업에 실패하고 문구와 당분간 거리를 두고 싶었다”며 “특히 다시는 ‘일’로써 문구를 대하고 싶지 않았다”고 덤덤히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문구’

하지만 휴덕은 있어도 탈덕은 없다고 했던가. 문구가 아닌 다른 일을 하다 보니 다시 좋아하는 일, 즉 문구에 관한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스물스물 피어 올랐다. 2020년부터는 손 놓고 있던 인스타그램 계정도 다시 굴리기 시작했다. 노트에 꾹꾹 눌러쓴 손글씨를 사진 찍어 올리고 그날 느낀 감상들을 가볍게 기록했다. 팔로워는 금세 1만 명을 돌파했다. 다시 문구도 사 모으기 시작했다. 여행을 가도 소품샵이나 문구점을 찾아서 독특한 문구들을 구매하곤 했다. 가끔은 시골 동네 초등학교 앞에 있는 작은 문방구에서 단종된 캐릭터 상품이 그려진 샤프펜슬을 구하는 등 의외의 ‘득템’을 할 때도 있었다.


그렇게 문구에 대한 애정을 다시 키워가던 중 덕후라면 한 번쯤 해봤을 법한 고민을 마주한다. ‘남’이 하는 우리 장르 이야기가 듣고 싶어진 것. 자급자족하는 덕질이 아니라 누군가 만들어 놓은 콘텐츠를 소비하는 덕질이 간절할 때가 있다. 오랜 시간 문구 크리에이터로 활동해 온 문구소녀 역시 이 같은 갈망이 있었다. 특히 워낙 뉴스레터 읽기를 즐겼던 그는 문구 뉴스레터가 나오기를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2년 넘게 누군가 문구 뉴스레터를 만들어 주기를 기다렸지만 끝내 감감무소식이었다.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파는 법. 결국 그는 2021년 12월 문구 뉴스레터 ‘문구구절절’을 개설했다. 문구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구구절절하게 많다는 뜻에서 지은 이름이다. 소재는 오직 문구 하나지만 주제는 다양하다. 국내에 있는 독특한 문방구를 다녀온 후기를 푸는가 하면 왜 베트남, 태국, 중국, 유럽 등에서는 파란색 볼펜을 검정색 볼펜보다 자주 쓰는지에 대해 분석하기도 하고 연말에는 ‘문방구 대상’을 개최해서 일년 동안 가장 잘 쓴 문구를 선정하기도 한다.


과연 문구에 관한 이야기만 하는데 사람들이 많이 볼까? 하는 의문은 넣어두자. 문구구절절은 개설한지 2년도 채 안 돼 구독자 1500명을 돌파했다. 가장 많은 호응을 보인 것은 역시나 문구 덕후들이었다. 구독자들은 “나도 한 문구 하는데 이렇게까지 문구를 더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 줄 몰랐다”거나 “내가 알고 있는 문구의 세계가 좁았구나” 등 반가움을 드러냈다.


문구소녀는 지난 6월 독립출판으로 ‘일본 도쿄 문방구 여행’을 출간했다. 일본 여행에서 쓴 일기와 각종 문구 영감이 주 내용이다.

문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자 문구 콘텐츠에 대한 자신감이 붙었다. 지난해 12월 일본 도쿄의 가지각색 문방구를 탐방하는 여행을 다녀온 후 ‘일본 도쿄 문방구 여행’을 펴낸 배경이다. 여행하면서 작성한 수첩을 스캔해 만들었다는 점이 독특하다. 박물관 입장권이나 문방구 영수증들도 모두 붙어 있다. 처음에는 보통의 책 형태로 만들려고 했지만 워드로 하나하나 타이핑을 치니 ‘글맛’이 안 살았다. 그가 인터뷰 내내 말했던 ‘필압에서 느껴지는 영감’을 고스란히 전하고 싶었던 것.


“여행 중에 쓴 ‘일기’를 그대로 남들에게 공개해도 되냐고 묻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실제로 독자들이 ‘누군가의 내밀한 일기를 몰래 읽는 것 같다’는 평을 하기도 했고요. 그런데 저는 누군가의 필압이 느껴지는 노트에서 영감을 받거든요. 다른 사람들도 제가 수일 간 꾹꾹 눌러쓴 글에서 그러한 감흥을 느꼈으면 하는 바람으로 그렇게 출간했어요. 뭐 어때요, 못할 말이 쓰인 것도 아니고.(웃음)”

✍아주 사소한 궁금증

Q. 요즘은 어떤 문구에 관심이 많나.

A.최근에는 기록의 방식에 대해 고민한다. 노트를 필사용, 일상 기록용, 다꾸용 등 다양하게 구비해 두고 있다. 왜 용도별로 다른 종류의 노트를 쓰는지 고민하고 각 용도별로 가장 잘 맞는 노트를 찾아 보면서 나에게 잘 맞는 ‘궁극의 문구’를 찾는 데 빠져있다.


Q. 초보자를 위한 다이어리 쓰기 팁이 있다면?

A. 다이어리를 쓸 때에 가장 중요한 것은 질리지 않고 쓰는 것이다. 그럴려면 처음부터 ‘이 노트에는 이 내용만 담아야 해’ 정해두지 않는 게 중요하다. 나도 용도를 구분해서 다이어리를 쓰기는 하지만 아무거나 마구잡이로 적는 노트도 따로 있다. 회의할 때 메모를 하거나 머릿속에 떠오르는 단상을 흩뿌리듯 써놓고 나중에 또 따로 각각의 노트에 옮겨 담으면 된다. 공 들여 정리할 필요도 없다. 서랍 정리하듯이 시간 날 때마다 정리해 가면서 나만의 카테고리를 쌓는 재미를 들여보자.


Q. 노트 첫 페이지를 망치면 그 뒷장을 쓰기 싫어져 방치하는 경우도 있다.

A. 나 역시 그래서 첫 페이지를 ‘아예’ 안 쓰는 편이다. 첫 장을 쓰는 것이 가장 부담스럽다. 예쁘게 써야 할 것 같고 만약 망쳐버리면 이후에는 쓰기 싫어서다. 차라리 두 번째 장부터 하나씩 채우기 시작하면 오히려 나중에 첫 장을 어떻게 쓸지 떠오르기도 해서 그때서야 쓴다.

어른이들을 위한 문방구를 그리다

청개구리 심보일까. 분명 다시는 문구를 ‘업’으로 삼지 않겠다는 당찬 결심을 했지만 문구 뉴스레터도 운영하고 책도 출간하고 인스타그램 콘텐츠로 꾸준히 제작하다 보니 다시 문구 사업에 대한 열망이 자라났다.


단, 다시 하게 된다면 ‘온라인’만 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문구소녀는 “문구는 물성이 있다 보니 직접 만져보고 써보지 않으면 그 가치를 온전히 느끼기 어렵다”며 “예컨대 노트 종이가 서걱서걱한지, 거칠지만 뒷면이 비치지 않는지, 혹은 연필심이 무른지 등은 실제로 보지 않고는 알 수 없다”고 말했다. 문구는 ‘감각’으로 다가오는 것이라는 설명이다. 특히 사용감을 넘어 문구점에서 느낄 수 있는 종이의 톳톳한 향이나 나긋나긋한 분위기에서 문구를 쓸 때에 느껴지는 감상이 다르다는 것. 그렇기에 “문구는 오프라인이 있어야만 매력이 배가 된다”고 덧붙였다.


그가 구상하는 문구점은 조금 특별하다. 바로 ‘심야 문방구’. 늦은 오후에 문을 열어서 새벽에 문을 닫는 어른들을 위한 문구점이다. ‘어른들을 위한 문구’는 무엇이 다를까? 문구소녀는 “어린이에게 좋은 문구는 글씨가 잘 써지고 잘 망가지지 않는 실용적인 문구라면 어른의 문구는 심미적으로 아름다운 것”이라며 “소재도 더 고급스럽고 디테일이 살아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문구소녀는 일본 제품은 다양성이 독보적이라고 말한다. 똑같은 인덱스도 소재, 크기, 색상, 형태가 다양하다는 설명이다. 사진은 문구소녀가 지난해 12월 일본 도쿄로 문구 여행을 가서 발견한 다양한 종류의 인덱스 모음.

특히 국내 문구점은 스티커 상품 위주로 대중을 겨냥한 제품들이 가장 많다. 하지만 일본 등 문구가 발달한 지역에 가면 달력 하나를 팔아도 일러스트의 유무부터 시작해서 색상, 크기 등이 똑같은 종류의 제품이라고 하더라도 다채롭게 출시된다. 그렇기 때문에 국내 문구 제품들의 다양화를 더 이끌어내고 싶다는 것. 다만 “수익화를 고려하면 내가 좋아하는 것보다는 남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더 집중해야 한다”며 “그 사이에서 가끔 판단력이 흐려질 때가 있어서 아직은 준비할 게 많다”고 웃어 보였다.


간혹 덕업일치는 불행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좋아하는 것은 그저 취미로 남겨 놓고 ‘업’으로 삼지 말라는 당부도 종종 듣곤 한다. 하지만 정작 덕업일치를 시도했다 씁쓸한 실패를 맛본 경험이 있는 문구소녀는 이 같은 말에 공감하지 않는다. 결국 좋아하는 일에 온 열정을 쏟았을 때의 달콤한 성취를 잊지 못해 다시 ‘문구’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기 때문. 또, 첫 번째 사업은 실패했을지라도 여전히 문구 크리에이터로 활동하며 문구에 관한 이야기를 자유롭게 떠드는 시간들이 주는 즐거움은 이루 말할 수 없다고 한다. 다시 덕업일치에 성공한 그가 그려낼 신개념 문구점을 기대해 본다.


에디터 조지윤ㅣ사진 문구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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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드로 거듭난 덕후들의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