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물주가 임대료 상승을 마다할 리가 있죠"
[젠트리피케이션, 해법을 찾아라]
당사자들 함께 참여하는 상생구조 짜야 강제력 가진 특별법 제정 필요성도 대두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 문제가 한국 사회의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아직은 우리에게 생소한 젠트리피케이션. 그 개념과 현상을 짚어보고, 실현 가능한 해결 방향은 무엇일지 살펴본다.[편집자주]
젠트리피케이션, 이렇게 진행된다
젠트리피케이션은 왜 발생하고, 어떻게 진행되는 걸까? 이해를 돕기 위해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던 어느 한적한 가상의 지역, 'A리단길'을 머릿속에 떠올려보자. A리단길에는 호주머니가 가벼운 예술가, 자영업자, 사회적 혁신가들이 모여든다. 주변 지역과 비교해 저렴한 임대료가 가장 큰 이유다.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각자 생업에 충실한 생활을 하는 동안 A리단길에는 독특한 분위기가 감돌게 된다. 그리고 향기로운 꽃에 벌이 모이듯 A리단길만의 분위기에 매력을 느낀 사람들이 하나둘 찾아들기 시작한다. 여기에는 A리단길 상권에 합류하려는 자영업 후발주자와 A리단길을 즐기러온 소비자들이 모두 포함된다.
이렇게 사람들이 모여든 A리단길은 요즘 '핫(Hot)'한 거리로 입소문을 타게 되고, SNS, 방송 등을 보고 찾아온 사람들이 다시 사람들을 부르는 '스노우볼(Snowball) 효과'로 인해 거대한 상권으로 성장한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진수성찬에 눈독 들이는 이들로 인해 A리단길의 운명은 바뀌게 된다.
외부에서 유입된 거대 자본이 그 주인공이다. 소위 말하는 '큰손'들이 상가 건물들을 사들이고, 투자 대비 수익률을 극대화하기 위해 A리단길의 상가 임대료 상승에 불을 붙인다. 뜨거운 임대료 상승 열기를 견디다 못한 기존 상인들은 번갯불에 콩 튀듯 다시 임대료가 저렴한 지역을 찾아 이탈한다.
상인들이 빠져나간 자리는 대기업 프랜차이즈들이 채운다. 이들만이 높아진 임대료를 감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유한 분위기를 잃은 A리단길에 사람들은 실망감을 느끼고 발길을 끊는다. 마침내 활기를 잃어버린 상권에는 대기업 프랜차이즈만 덩그러니 남는다. A리단길 잔치는 이렇게 끝난다.
젠트리피케이션, 끝나지 않은 악몽
젠트리피케이션은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가 사랑해 마지않았던 삼청동, 가로수길, 경리단길 등에서 이미 일어난 일이다. 그렇다면 '먹을 것' 떨어진 뒤에도 '소문난 잔칫집'에 남아있는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언론을 통해 젠트리피케이션 사례로 널리 알려진 경리단길을 찾아가 봤다. 망리단길(망원동), 전리단길(부산 전포동) 등 신흥 상권의 이름마다 '~리단길'이름이 붙을 정도로 한때 신흥 상권의 대명사로 불렸던 경리단길. 이곳을 33년째 지키고 있는 세탁소 주인 A씨는 "(이런 불경기는) 나도 여기서 처음보는 것"이라고 말하며 한숨부터 내쉬었다.
그는 "과장하면 (예전에는) 하루에 사람이 만 명 정도는 지나갔다"고 과거의 경리단길을 추억했다. 하지만 이내 "동네가 사람이 많이 줄었다."고 하소연했다.
현재 경리단길 상황에 대해서 "옆집도 2년째 빈집이다. 누가 빈 점포 구경하러 오겠느냐"고 설명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가장 큰 원인은 임대료다. 어디나 마찬가지겠지만, 장사가 잘되면 집주인이 임대료를 올린다"고 하소연했다.
이어 "(임대료 상승분을) 비율로 따지면 (다른 점포들도) 100%씩은 다 올랐다"며 "경리단길에 세탁소가 6개 있었는데 지금은 나 혼자 남았다. 이 정도면 그냥 장사가 안되는 정도가 아니라 전멸한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실제 경리단길에는 '임대문의'라고 써 붙여 놓은 빈 점포들이 가득했다. 일반 점포보다 공인중개사 사무소가 더 많아 보였고, 그나마 문을 열어놓은 점포를 찾는 방문객들의 발걸음도 뜸했다. 홍대, 이태원 등은 지하철역이 가까워 젠트리피케이션 발생 후에도 상권 유지가 가능했지만 경리단길은 이마저도 힘들어 보였다.
젠트리피케이션, 지자체도 해결사 아니다
젠트리피케이션 사례를 접한 많은 사람이 안타까워하고, 해결을 위해 지자체가 나서야 할 사회 문제라고 여긴다. 이에 각 지자체도 주민 여론을 수렴해 젠트리피케이션 문제 해결에 나서고 있지만, 결코 해결하기 쉬운 문제가 아니라는 푸념이 나온다.
서울 성동구는 2015년부터 구청 직영 상가 운영, 대기업 프랜차이즈 업체 입주 관리, 주민협의체 네트워크 구축 등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덕분에 젠트리피케이션 관련 정책 분야에서 우수 지자체 사례로 알려졌다. 하지만 성동구청에서 젠트리피케이션 방지 정책 관련 실무를 맡고 있는 김규식 지속발전과장과 이덕윤 지속가능정책팀장은 "구청이 나서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기에는 어려운 상황"이라고 입을 모았다.
이들은 "처음 서울숲길, 성수동 카페거리에 온 예술가, 사회혁신가 등은 젠트리피케이션 방지 정책에 참여율이 아주 높다"면서도 "그 뒤를 이어 (상권에) 들어온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경제 논리를 많이 가지고 있고, 아무래도 정책 참여율이 낮다"고 정책 추진의 어려움을 설명했다.
이 팀장은 "임차인들은 '임대료를 안정적으로 가져가자'는 목적에 동의하고 정책에 잘 참여하지만, 임대인들의 경우 설득이 힘들다"며 "특히 외부에서 유입된 건물주들은 설득을 위해 만나는 것조차 힘들다"고 고충을 토로했다. 지자체에서 제정한 조례에는 강제력이 없어, 관계자 설득을 통한 정책 추진에는 구조적으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임대료 상승이 반갑지만은 않은 '갓물주'
젠트리피케이션 문제의 또 다른 당사자인 건물주들의 생각은 어떨까. 한국에선 조물주만큼이나 권위가 높다는 의미에서 소위 '갓물주'로 불리는 이들.
하지만 동시에 건물주들은 젠트리피케이션 문제에서 대중의 비난을 한몸에 받기도 한다. 정말 그들은 자신이 소유한 건물의 임대료를 높이는 것만 혈안이 되어 있을까.
성동구에는 건물주, 임차인, 지역활동가 등 젠트리피케이션 당사자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협력 방안을 논의하는 '상호협력 주민협의체'가 있다. 이곳의 대표를 맡고 있는 송규길 주민협의체위원장은 성수동에 위치한 한 상가의 건물주다. 그런데 송 위원장은 "사실 성수동 땅값이 많이 올라가는 게 아쉽다"고 말했다.
건물주가 땅값 상승을 마다하다니. 일견 이해되지 않는다는 말에 송 위원장은 "우리는 계속 성수동에서 살아야 하는데 이렇게 땅값이 올라도 되나"라는 의문이 든다고 답했다. 땅값 오르면 건물 팔고 나가면 되는 외부 건물주와 달리, 이 동네가 곧 삶의 터전인 건물주들은 물가 상승 등의 이유로 땅값 상승이 마냥 달갑지만은 않다는 뜻이다.
송 위원장은 "주변 건물주들과 이야기해 보면 임대차보호법으로 정해놓은 9% 임대료 인상도 하지 않는 건물주들이 많다"고 성동구 일대 분위기를 전했다. 이어 "임대료를 올리지 않아 손해라는 생각은 안 한다. '천천히 같이 가자'는 의미가 있기 때문에 이를 손해로 여기지 않는다"고 공존을 위한 협력을 강조했다.
젠트리피케이션, 출구는 상생과 지원
심각한 사안인 동시에 해결도 어려운 젠트리피케이션 문제. 한국 사회의 탈출구는 어디에 있을까.
우선 주민들에게는 관(官)의 도움이 필요하다. 송 위원장은 "모든 주민이 모여서 활동할 수는 없다. 주민들에겐 생업이 있다"며 "(지자체가) 주민들 모아놓고 '이건 너희들이 결정해야 할 사안이야'라고 떠넘기면 아무것도 못 한다"고 주민들이 처한 현실적 어려움에 관해 설명했다.
하지만 주민들에게는 먹고사는 문제와 직결된다는 절박함과 문제 해결을 향한 의지가 있다. "어느 정도는 관이랑 같이 가야 한다. 관에서 어느 정도 서포터 역할을 해줘야지만 (주민협의체도) 잘 운영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는 송 위원장의 말처럼, 주민 모임 조성과 운영에 지자체의 지원이 더해진다면 주민들 스스로 지속 가능한 젠트리피케이션 문제 해결에 한 걸음 다가설 수 있다.
주민들에게 칼자루를 넘겨받은 지자체 입장은 어떨까. 특별법 제정이 필요하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김 과장은 "대기업 프랜차이즈 7군데에서 (영업 허가) 신청이 왔는데 구 조례를 들어서 막은 사례가 있다"면서도 "조례가 있다고 하더라도 지자체가 (젠트리피케이션 방지 정책을) 직접 하기는 어렵다"고 털어놨다.
신흥 상권 내 대기업 프랜차이즈의 입점을 막거나 급격한 임대료 상승, 임차인 재계약 등 산적한 문제 해결에 있어 강제성이 없는 구 조례로는 한계가 명확하다. 젠트리피케이션 방지 정책을 장기적으로 추진하기 위해서는 강제력을 가진 특별법 제정이 반드시 필요하다는게 지자체 실무자들의 견해다. 이 팀장 또한 "젠트리피케이션 정책에 관한 특별법 제정이 있어야 그에 기반해서 (정책을 추진)한다. 법을 통해 지방 정부의 한계를 극복해야 한다"고 특별법 제정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젠트리피케이션 문제는 추리소설이 아니다. 특정한 범인 한 명을 찾아내려는 노력은 헛수고에 그치기 쉽다. 비난의 화살을 건물주에게만 돌릴 일도 아니고, 문제 해결의 칼자루를 두고 민과 관이 '폭탄 돌리기' 할 일도 아니다. 상투적으로 들리겠지만, 해결 방법은 모두가 힘을 합치는 것뿐이다. '같이 가야 멀리 간다'는 오래된 금언(金言)을 다시금 새겨볼 때다.
배민주 기자 mjbae@bizwatch.co.kr, 송승현 기자 shsong@bizwatch.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