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00명 빠져도 혼란 없었다, 파업에 드러난 '은행의 현실'
KB국민은행 노동조합이 8일 19년 만에 총파업을 했다. 국민은행 측 집계에 따르면 전 직원 1만7000명 가운데 약 30%인 5500명(노조 추산 약 9000명) 안팎이 파업에 참여했다. 하지만 우려와 달리 전국 1058개 지점이 한 곳도 빠짐없이 문을 여는 등 별다른 혼란은 없었다. 소비자들은 은행 파업에 싸늘한 시선을 보냈다. 노조가 성과급과 수당, 비정규직에서 정규직으로 전환된 직군의 처우 개선, 성과가 미진한 직원의 임금 동결 반대 등 자기 목표를 이루기 위해 3000만 명에 달하는 고객을 볼모로 잡았고 사측은 무기력하게 끌려다녔다는 것이다. 전문가들과 금융권 안팎에서는 이번 총파업 사태가 수년간 국민은행이 쌓아올린 브랜드 가치만 깎아내리는 결과를 낳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민은행 파업 하루 전인 7일 허권 전국금융산업 노조 위원장이 총파업 전야제가 열린 서울 송파구 잠실학생체육관에서 머리띠를 두르고 있다. /연합뉴스 |
고객 "내가 낸 이자로 월급 받으면서…"
이날 본지 기자들은 서울 여의도와 마포, 강남 등 서울 시내 10개 지점을 둘러봤다. 지점마다 '파업으로 업무 처리 시간이 지연되거나 일부 업무가 제한될 수 있다'는 대고객 안내문이 붙었지만 실제 분위기는 달랐다. 이미 인터넷 금융 거래가 보편화한 영향으로 보였다. 작년 상반기 기준 국민은행의 모바일·인터넷 뱅킹 비중은 86%에 달한다. ATM 이용까지 합하면 90%가 넘는 상황이다. 시중 금융회사 고위 임원은 "직원 3분의 1이 안 나와도 지점이 멀쩡하게 문을 열고 큰 불편도 없는 상황은 디지털 시대에 은행 지점이 마주한 현실"이라며 "노조가 지금 성과급 갖고 파업 운운할 때가 아니라는 걸 깨닫는 계기가 되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이날 파업을 지켜본 한 노동계 관계자도 "철도노조나 택시노조는 파업을 통해 힘을 과시하지만 KB노조는 파업을 했는데도 아무런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해 오히려 존재감이 없다는 걸 스스로 입증한 꼴"이라고 했다.
"고객 이탈 등 후유증 나타날 것"
전국 지점에서 별 혼란은 없었지만 "국민은행에 실망했다"는 반응은 각계에서 터져 나오고 있다. 이날 동대문패션타운지점에서 만난 봉제업체 대표 김순옥(57)씨는 "국민은행은 이곳 영세 봉제업체들에서 번 돈으로 영업하는데, 파업을 하는 게 이해가 안 된다"고 말했다. 광화문지점에서 만난 초등학교 교사 오모(49·서울 종로구)씨도 "억대 연봉 받으면서 일하는데 시스템은 툭하면 점검 시간이라고 하고 오류도 잦다. 고객 서비스부터 제대로 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서울 영등포 지점에서 만난 자영업자 신상주(52)씨는 "내가 낸 이자로 월급 받으면서 이럴 수 있느냐"며 "'국민'이라는 이름을 달았으면서 밥그릇 챙기기만 나서고 있다"고 따졌다.
전문가들의 반응도 비슷하다. 신세돈 숙명여대 교수는 "현재 자영업자, 서민 생활이 어려운 상황인데 자기들이 낸 이자로 월급을 받는 고임금 근로자들의 파업 소식이 국민의 공감을 얻을 수 없다"면서 "경영진이 단호하게 대처해야 한다"고 말했다. 조연행 금융소비자연맹 회장은 "공공성이 강한 은행의 고액 연봉자들이 임금피크제 등 내부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를 스스로 풀지 못한 채 애꿎은 소비자들을 끌어들인 셈이 됐다"고 말했다.
대형 시중은행의 한 임원은 "국민은 KB 노조만 욕하는 게 아니라 은행원 전체를 싸잡아서 비판하고 있어 안타깝다"며 "파업 부작용이 결국 국민은행 고객층 이탈 등의 형태로 나타날 것"이라고 말했다.
금융 당국도 우려를 나타냈다. 김용범 금융위 부위원장은 이번 사태와 관련한 위기관리협의회를 열고 "일반 기업과 달리 은행은 국민 경제의 핵심 인프라여서 파업으로 인한 국가적 손실도 크다"며 "국민은행은 국내 최대 은행인 만큼 영향도 커 더욱 유감스럽다"고 말했다.
노조, 3월까지 4차례 파업 예고
이날 총파업은 마무리됐지만 국민은행 노조는 앞으로 네 차례 더 총파업을 예고하고 있다. 당장 이달 말까지 노사 협상이 타결되지 않으면 설 연휴를 앞둔 1월 30일부터 2월 1일까지 3일간 2차 파업을 벌일 예정이다. 국민은행 노사는 향후 계속 협상을 벌인다는 방침이다. 박홍배 국민은행 노조위원장은 8일 기자들과 만나 "임단협이 마무리되는 시간까지 24시간 매일 교섭할 의사가 있다"며 직접 교섭, 중앙노동위원회의 사후 조정, 한국노총이나 경제사회노동위원회의 중재를 받는 방법 등을 검토한다는 방침을 밝혔다.
정한국 기자;최종석 기자(comm@chosun.com);문다영 인턴기자(고려대 행정학과 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