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탄' 확보 나선 최태원의 SK, 야구단·유전 팔고 수소·바이오 투자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지난해 3월 개최한 수펙스추구협의회에서 계열사 경영진에 "각사는 스스로 생존을 위한 자원과 역량 확보에 힘써달라"고 주문했다. 코로나 사태와 미·중 무역분쟁 장기화 등으로 전례없는 위기를 맞이한 기업들이 변화에 발빠르게 대응하지 못하면 순식간에 도태될 수 있다는 위기 의식이 담긴 발언이었다.
최근 SK그룹이 자회사 지분 매각과 기업공개(IPO), 회사채 발행 등으로 현금 마련에 속도를 내고 있다. 최 회장의 주문대로 성장 가능성이 높은 신사업에 투자하고, 필요하면 그룹의 근간이 되는 사업도 과감하게 매각하는 사업개편 전략 ‘딥체인지(Deep Change)’를 추진하기 위한 실탄 확보에 나선 것으로 분석된다. 지난해 3분기 연결기준 SK그룹의 보유 현금은 11조8800억원에 달했는데, 올해 예정된 자회사 지분 매각과 상장 작업이 순조롭게 진행될 경우 최대 8조원의 유동성을 추가로 확보할 수 있을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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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탄 쌓는 SK…SK바이오팜 지분 팔아 1조원 확보
SK그룹의 투자전문 지주회사 SK(034730)㈜는 지난 25일 SK바이오팜 지분 11%를 블록딜(시간 외 대량매매) 방식으로 매각해 1조1163억원의 실탄을 확보했다. SK바이오팜에 대한 SK㈜의 지분율은 기존 75%에서 64%로 줄었다. 회사 측은 "신성장 동력 확보를 위한 투자금 마련 목적"이라며 처분 배경을 밝혔다. 회수한 투자금은 성장 사업 투자에 다시 활용한다.
SK㈜는 올해부터 첨단소재, 그린, 바이오, 디지털 등 4대 핵심사업을 중심으로 투자 포트폴리오를 재편하기로 했다. SK㈜는 올 들어서만 SK E&S와 함께 미 수소기업 플러그파워 지분 10%를 1조8500억원에 인수했고, 국내 자동차용 전력반도체 제조사 예스파워테크닉스 지분 33.6%를 268억원에 사들이는 등 유망 기업에 잇따라 투자하고 있다.
지난 2018년부터 3년간 SK㈜는 국내외 기업 17곳에 2조5800억원 이상을 투자했다. 이 중 바이오 기업 투자가 5건, 에너지 기업이 4건으로 가장 많았다. 첨단소재(3건)와 물류·인프라(3건), 모빌리티(2건) 등도 뒤를 이었다. SK㈜는 글로벌 물류회사 ESR 지분을 지난해 9월 4800억원에 매각해 2.5배에 달하는 수익을 내기도 했다. SK 관계자는 "적시 회수를 통해 투자 성과를 극대화하고, 수익은 미래 성장 사업에 재투자하는 투자 선순환 체계를 이어나가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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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너지 없는 사업 과감히 처분…체질 개선 속도
SK그룹 주력 계열사들도 미래 성장성이 없거나 기존 사업과 시너지 효과를 내지 못하는 사업을 처분하고 있다. 최 회장은 지난해 6월 확대경영회의에서도 "그동안 우리의 성장을 가로막아 왔던 구조적 한계를 어쩔 수 없는 주어진 환경이 아니라 극복의 대상으로 인식하는 발상의 전환이 이뤄져야 한다"며 경영진에게 사업개편에 총력을 기울여달라고 독려한 바 있다.
SK이노베이션(096770)은 회사의 모태 격인 SK종합화학의 지분 49%를 글로벌 석유화학사에 팔아 글로벌 합작사를 설립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고급 윤활유를 생산하는 자회사 SK루브리컨츠 지분 49%도 다음달 매각이 예정돼 있다. 이를 통해 총 3조원에 달하는 현금을 확보한다는 계획이다.
이는 최 회장이 지속적으로 강조해온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과 궤를 함께한다. SK이노베이션은 전통 석유화학 자산을 줄이고 배터리 등 친환경 사업을 강화해 ESG 경영에 속도를 낸다는 방침이다. 앞서 지난 2019년 추진한 페루 석유 광구 매각 작업이 올해 마무리되면 1조2500억원 상당의 현금을 확보할 수 있을 전망이다. 여기에 상장예비심사가 진행 중인 SK아이이테크놀로지(SKIET)가 상장하면 추가로 1조원을 마련할 수 있다.
SKC(011790)도 기존 필름과 화학제품 중심에서 벗어나 반도체와 모빌리티를 중심으로 사업을 재정비하면서 관련 없는 사업을 매각하고, 성장성 있는 기업의 인수합병(M&A)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SKC는 기존 사업과 시너지가 없다는 이유로 지난해 자회사 SK바이오랜드와 SKC코오롱PI의 지분을 매각했다.
지난 2019년에는 동박 제조사 KCFT(현 SK넥실리스)를 1조1900억원에 인수해 전기차 시대를 맞이할 채비를 갖췄다. SKC는 올해 전기차 배터리 소재회사로 거듭나기 위해 신사업 투자를 지속하고, ESG 경영 강화 차원에서 폐플라스틱 친환경 열분해유 사업에도 진출한다고 밝혔다.
이밖에 SK그룹은 SK텔레콤(017670)이 보유한 야구단 SK와이번스의 지분 100%를 이마트에 1000억원에 넘겼다.
◇ "올해 수소·바이오 투자 본격 확대"
SK가 ‘딥체인지’에 속도를 내면서 그룹의 중심축이 정유·석유화학에서 수소·바이오·반도체로 옮겨가는 추세다. 특히 반도체 분야에서는 조(兆) 단위 규모의 과감한 투자를 단행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SK하이닉스(000660)는 지난해 10월 인텔의 낸드 사업을 10조원에 인수한다고 전격 발표했다. 이는 최 회장의 3번째 대규모 M&A 성공 사례로 꼽힌다. 이번 인수로 SK하이닉스는 키옥시아를 제치고 낸드부문 2위 업체로 올라서게 됐다.
수소와 바이오 사업 육성에도 적극적이다. 최근 수소사업전담조직을 꾸린 SK는 LNG 발전회사 SK E&S, SK이노베이션과 손잡고 2025년까지 28만톤 규모의 수소 생산능력을 갖추겠다고 발표했다. 바이오 부문에서는 코로나 백신 위탁생산으로 알려진 SK바이오사이언스가 다음달 상장을 앞두고 있다. 증권가에서는 SK바이오사이언스의 기업가치가 상장 후 최대 10조원까지 뛸 수 있다고 본다.
김한이 KTB투자증권 연구원은 "앞으로 SK의 투자발표는 계속 이어질 것"이라며 "바이오는 물론 수소 밸류체인(공급망) 관련 기술 보유 기업과 ESG를 강조하는 기업에 대한 투자가 지속될 전망"이라고 말했다.
이재은 기자(jaeeunlee@chosunbiz.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