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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 경험" 학교는 자퇴, 유학은 펀딩... 반짝이는 비주류, 이길보라

김지수의 인터스텔라

반짝이는 비주류, 다큐멘터리 감독 이길보라

"밑져도 경험… 세상은 가보고 만지고 부딪혀봐야"

농인 부모의 당당함이 천혜의 환경 "안들려도 행복"

내 경험은 사회의 것… 여행도, 유학 자금도 ‘펀딩’으로

"학교 안과 밖 안 중요해, 울타리 자유롭게 넘어야"

교수는 평가자 아닌 멘토, 질문과 피드백 잇는 사람

조선비즈

다큐멘터리 감독 이길보라. 농인 부모를 둔 청인 자녀라는 정체성으로, 독창적인 자기 이야기를 쓰고 있다./사진=고운호 기자

‘사진과 축구를 좋아하는 소년이 있었다. 달리기에 재능이 있는 소녀가 있었다. 소년은 소녀에게 첫눈에 반했다. 입술 대신 손으로 사랑을 속삭이는 일은 그 표정만큼이나 솔직한 것이어서 둘은 금방 아이를 갖게 되었다. 침묵의 세계는 아이를 낳으면서 말의 세계와 정면으로 부딪쳐야 했다… 두 세계를 넘나들며 살아온 나는 잘 알고 있다. 엄마 아빠의 들리지 않는 세상은 너무나 반짝인다는 것을.’


이길보라 감독의 자전적 다큐멘터리 영화 ‘반짝이는 박수 소리'는 햇살 아래 반짝이는 두 손으로 시작한다. 두 손을 반짝이는 모양이 박수 소리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이길보라는 1990년, 농인이었던 이상국과 길경희 사이에서 코다로 태어났다. 코다(CODA, Children Of Deaf Adult의 약어)는 청각장애인 부모 밑에서 자란 비장애인 자녀들을 칭한다.


고요한 농인의 길과 시끌벅적한 청인의 길을 오가며 이길보라는 가장 빛나는 자기만의 갓길을 찾았다. 길을 찾아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오직 두 개의 사인에만 집중했다.


‘괜찮아, 경험' 그리고 ‘보라는 보라의 속도대로'.


이길보라는 고교 1학년 때 자퇴 후 8개월간 동남아 배낭여행을 했으며, 그 후 스스로 삶과 공부의 방향을 정하는 ‘로드스쿨러(road schooler)’가 되었다. 길 위에서 3권의 책을 출간했고, 3편의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들었다. 그 사이 한국예술종합학교를 졸업하고 네덜란드 필름 아카데미에서 석사를 마쳤다. 배낭여행 비용, 유학 비용은 크라우드 펀딩으로 마련했다. 얼굴도 모르는 수많은 사람이 그의 배움길에 노잣돈을 보탰다.


"학교를 그만둔 게 너무 좋아서 친구들도 선생님도 다 그만두라 권하고 싶었다"는 이길보라. 생생한 배움을 담은 자신의 스토리를 얼마 전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어서'라는 책으로 냈다. ‘참교육’이 절실한 코로나 시대, 달라진 세계의 대안을 고민해보고자 ‘빡센' 경험주의자 이길보라를 만났다.


인터뷰에서 그가 가장 많이 한 말은 ‘경험과 ‘배움'이었다. 숟가락을 덥혀내듯 목소리는 따스했고, 손가락은 춤추는 듯했다. 그는 다시 태어나도 농인의 자녀로 태어나고 싶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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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천적이고 긍정적인 경험주의자 가족. 이길보라와 그의 아버지, 어머니, 남동생. 농인 둘, 청인 둘이 조화롭게 반짝이는 세상이다.

-부모님께서 참 아름다우세요. 반짝반짝 빛이 납니다.


"네. 특히 어머니. 어릴 때 수화 통역하면 "어머니 예쁘다고 전해드려~." 백이면 백 다들(웃음). 저는 속으로 ‘치~ 직접 얘기하지.’ 엄마는 당연한 듯 "응. 나도 알아. 감사". 하고는 끝~."


-마음이 공주시구나.


"태생적으로 엄마 아빠가 두 분 다 밝아요. 외가 친가 보면 조부모님들이 다 그러시진 않은데… 엄마 아빠가 유난히 낭만적이고 밝아요. 농인들이 다 그런 것도 아닌데. 신기하죠."


-그런데 왜 딸 이름을 보라라고 지으셨대요? 눈으로 ‘보라’ 직접 ‘해보라’ 이런 의미인가요?


"저도 물었는데, 까먹으셨대요. 그런데 어느 순간 글을 쓰다 알게 됐어요. 우리 엄마 아빠가 내 이름을 ‘소리'가 아니라 ‘보라'라고 지으신 건 당연한 거 아닌가. 소리를 귀로 ‘듣는’ 사람이 아니라 ‘보는’ 분들이니까, 명료하게 ‘보라'라고 하셨구나.


게다가 제 이름은 이상국, 길경희의 성 두 글자를 따서 ‘이길보라’예요. ‘이 길을 보라!’니 얼마나 좋아. 하하. 그런데 또 어떤 분은 성이 ‘이길'이라니, 그렇게 이기고 싶냐고, 묻더라고요."

남을 이기고 싶지 않다

-이기고 싶은 적 없어요?


"글쎄요. 저는 이기고 싶다는 마음으로 살아본 적 없어요. 고교 1학년 자퇴하고 나서는 한 번도 없었어요. 학교 다닐 때는 ‘이번 시험, 쟤 이기고 싶어' 그런 적 있지만, 나와서는 없어요. 순위가 아예 없으니까. ‘내가 하고 싶은 걸 어떻게 할까’만 생각했어요."


-‘이기고 싶은 마음이 없다'는 게 구체적으로 어떤 상태지요?


"단순해요. 좋은 영화를 만들고 좋은 글을 쓰고 싶어요. 베를린영화제 은곰상이 목표가 아니라(웃음). 물론 베스트셀러 1위가 작가가 싫지는 않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우선순위는 아름다운 삶을 사는 것, 그 삶을 지속가능하게 만들어가는 것"


올해 4월에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 ‘기억의 전쟁’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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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인의 시각으로 베트남 전을 다룬 이길보라의 다큐멘터리 ‘기억의 전쟁'.

"가령 ‘기억의 전쟁'도 프로듀서는 ‘조금만 더’를 원했어요. 더 편집할수록 완성도가 높아지니까. 그런데 어느 순간 ‘이 영화는 여기까지'라는 느낌이 드는 거예요. 더하면 해외 영화제 가고 상 받고, 그럴 수 있겠죠. 그러려면 누군가의 몸과 시간을 갈아 넣어야 하는데, 그렇게 가면 우리는 서로를 갉아먹고 옭아맬 것만 같았어요."


-그래서요?


"지금의 이길보라, 지금의 프로듀서를 지켜서 잘 끝내고 다음 작품을 즐겁게 하자고 했어요. 지속가능성을 고민하자고. 여기서 손을 떼자고."


가수이자 화가인 백현진도 비슷한 말을 했다. 완성은 없고 손을 뗄 뿐이라고. 발전과 완성의 강박으로 나도 남도 박해하지 않고 오로지 변화와 확장을 도모하는 예술가의 삶. 그것이 저성장시대, 개인의 선택이라고. 문득, 위대한 제품은 마감의 치열함에서 나온다는 생각, ‘탁월함’이라는 언어조차 재조정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선을 다하는 거 중요하죠. 그런데 이젠 그 ‘열심의 선’이 어디까지인지 아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망설임이 없는 또렷한 말이, 겨울 아침 고드름처럼 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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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반짝이는 박수 소리'의 한 장면. 나레이터 이길보라의 반짝이는 손가락.

구어보다 수어를 먼저 배운 이길보라는, 옹알이도 손으로 했다고 했다. 스트레이트한 눈빛과 10개의 손가락만으로 설명되는 말끔한 세상. 침묵 속에 완전체로 사는 부모와 시끄러운 세상 사람 사이에서, 그는 여섯 살 때부터 통역자였다.


-문장 표현이나 화법이 군더더기 없이 깔끔해요. 수어의 영향인가요?


"제 모어가 수어예요. 수어와 음성 언어는 차원이 달라요. 구어가 말해진다면 수어는 보여져요. 이미지 중심이라 표정이 반 이상을 차지하죠. 소리는 톤과 크기가 있지만, 수어는 그 안에 수형(手形손의 모양)과 수향(手向 손의 방향)이 있어요. 가령 3명이 앉아 있으면, 공간 안에서도 손으로 위치를 정하고, 그 안에서 모양과 방향을 만들어 가요. 3차원의 플레이죠."


-은유나 우회가 없겠군요.


"없어요. 농인들은 절대 돌려 말하지 않아요. 그러면 전달이 안 돼요. 직접적이고 직관적이죠. 그래서 청인들에게 ‘막말한다' ‘버릇없다' 소리도 듣죠. ‘왜 눈을 빤히 보고 말하냐'고. 그런데 수어는 눈을 피하고, 고개 돌리면 소통이 안 돼요."


그 일로 중학생 때 선생님께 혼난 적이 있다고 했다. 전교 회장에다 모범생이었기에 학교에서 혼날 일이 없었던 소녀는, 그날 이를테면 본보기로 걸렸다.


"꾸중하시는 선생님 얼굴을 제가 빤히 봤어요. 제 딴엔 열심히 야단을 잘 맞으려고요. 그랬더니 ‘왜 눈을 안 깔고 쳐다보느냐'고 화를 내시는 거예요. 그때 처음 배웠죠. 아, 혼날 때는 고개를 숙여야 하는구나(웃음)!"


-주눅 들어 본 적이 없어요?


"없어요. 누군가 괜히 커 보여서 굴복해본 적이 없어요. "저건 너무 높아, 저 사람은 너무 가진 게 많아" 지레짐작하고 포기해본 적도 없어요. "어, 그래? 그럼 나도 한번 해보지 뭐." 해보고 안되면 할 수 없는 거고요."


-그 기세가 꺾이지 않고 유지되던가요?


"하하. 제가 우리 집에서 제일 똑똑했어요. 부모님과 세상 사이에서 통역자 역할을 했잖아요. 엄마 아빠보다 정보가 더 많았고, 어른들 속을 읽는 눈치가 백 단이었어요. "보라는 항상 잘해" 소리를 듣고 자랐어요. 한편으론 세상인심도 일찍 알아차렸어요. 엄마 아빠가 장애인이라 못하면 두 배로 욕먹고, 잘하면 두 배로 칭찬을 받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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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다(CODA, Children Of Deaf Adult의 약어)의 정체성을 사랑하는 이길보라./사진=고운호 기자

"괜찮아, 경험"의 마법 같은 주문

그걸 머리가 아니라 몸이 먼저 알았다고 했다. 그렇게 어른 비위 잘 맞추는 성적 좋은 모범생으로 살다가, 어느 날 문득 질문이 솟아올랐다. ‘보라야, 넌 무엇을 위해 공부하니?’


-자기 자신에게 물었나요?


"네. 저희 엄마 아빠는 가방끈이 짧아서요(웃음). 저에게 요구하거나 기대하는 게 없으셨어요. 잘 사는 집 친구들이 어른들 실망시킬까봐 긴장할 때, 전 안도했죠. 아, 우리 엄마 아빠는 고등학교만 나와서 다행이다. 나를 가르치는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다(웃음)."


부모님은 어쭙잖게 가르치는 대신, 당신들이 즐겁고 당당하게 사는 모습을 보여주셨다고 했다.


-"들리지 않아… 죄송합니다"가 아니라 "안 들려요. 여기 써주세요!"라고 자신감 있게 자신을 표현하셨다고요.


"그러셨어요. 다시 태어나도 농인으로 태어나고 싶다는, 정말 한 치의 의심도 없는 손동작이 나를 ‘믿게' 만들었어요. 제 고교 선배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어요. "너는 왜 다 해보는 거야, 무작정?" ‘밑져도 경험'이라는 생각은 저의 부모님들의 생활 방식이었어요."


-정말 밑져도 경험이라고 생각했어요?


"저는 두려움 보다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더 강한 것 같아요(웃음).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으니까. 그래서 계획도 꼼꼼히 세워요. 네덜란드 유학도 그래요. 출발선이 0이고 성공이 1이라고 해보죠. 비싼 돈과 시간 들여 날아가서 면접 봤어도, 마지막 순간에 제가 떨어질 수 있잖아요. 그런데 불합격이면 그냥 제로, 원점이 되나? 밑지는 건가?


아니죠. 떨어져도 0.9의 경험을 얻고, 그게 내 몸에 쌓이잖아요. 그 믿음을 엄마 아빠가 줬어요. ‘할까, 말까’ 망설일 때, 아빠는 환하게 웃으며 그러세요. ‘보라야, 괜찮아, 경험!’."


"가봐야 알 수 있으니까 무조건 가라."...귀로 들을 수 없고 눈으로 정보를 습득하기 어려운 그의 부모가 할 수 있는 건 직접 가보고 만져보고 만들어보고 몸으로 해내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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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지도, 배움의 경계를 확장하는 이길보라의 당당한 기록 에세이.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어서'.

성공하든 실패를 하든, 돈을 버리든 시간을 버리든 아빠는 딸에게 말했다. "보라야, 괜찮아, 경험."

걱정만 하다 기회를 날려버리는 건 엄마 아빠의 방식이 아니었다. 농인 엄마 아빠의 자랑스러운 딸인 그는 그렇게 ‘경험주의자’가 되었다.


고등학교를 그만두고 여행을 떠나기로 했을 때도 ‘괜찮아, 경험'은 마법 같은 주문이 됐다.


-자퇴는 스스로 결정한 거죠?


"네. 저는 다큐멘터리 감독이나 NGO활동가가 되고 싶었어요. 그런데 어른들이 그래요. 다큐 영화감독이 되려면, 수능 잘 쳐서 좋은 대학 나와서 언론 고시 보고 방송국 들어가고 몇 년간 조연출 빡세게 해야 한다고. ‘세상에! 정말 이상하다. 이 길을 가려면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봐야 되지 않나? 내가 원하는 게 학위나 좋은 명함이 아닌데…’ 좋은 감독이 되려면 어떤 배움, 어떤 능력이 필요한지 알고 싶었어요."


-길 위에서 그 배움을 얻었나요?


"(함빡 웃으며)200% 300% 얻었어요. 인도, 네팔, 중국, 티베트에 이르는 아름다운 8개월이었어요. 죽음을 앞둔 할머니도 만나고 티베트 난민촌에서 봉사활동도 했어요. 너무 벅차고 감사해서 돌아와서는 내 친구들도 다 그만두면 좋겠다고 했어요. 선생님들도 다 그만두시라고. 하하."


스승에게도 친구에게도 이 행복한 배움의 세계를 전하고 싶어서 ‘길은 학교다'라는 책을 냈고 ‘로드스쿨러’라는 다큐멘터리를 찍었다. "저 같은 고민을 하는 누군가의 손을 잡아주고 싶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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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어느 순간에서건 “괜찮아, 경험"은 그에게 마법 같은 주문이 됐다./사진=고운호 기자

‘로드스쿨러'는 이길보라가 ‘홈스쿨링'이라는 말 대신 고안해낸 말로 자기 주도 학습자다. 진도에 맞춘 기계적인 공부가 아니라, 내가 정한 커리큘럼 속에 나 스스로를 던져보는 공부. 그렇게 영화 만들고 글 쓰는 사람으로 살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붙었다.

진정성과 뻔뻔함으로 모은 ‘남의 돈'

-보통 사람이 당신처럼 학교 울타리를 넘어가기 쉽지 않아요.


"학교의 안과 밖은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아요. 저는 로드스쿨링을 했지만, 대학은 또 제도권(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공부했어요. 그 후 현장에서 활동하다가 다시 네덜란드 대학원에 진학했죠. 중요한 건 자기가 그 배움의 과정을 주도해야 한다는 거죠. 자기 배움을 위해서 제도권 안팎을 넘나들면서요."


-일단 보라 씨는 ‘자기 주도성'의 특혜를 입었어요. 부모의 욕구를 책임질 필요가 없다는 것 자체가 청소년으로서 굉장한 특혜죠.


"대신 일찍부터 내 인생을 책임졌죠. 자유에는 책임이 따라요. 책임이 가르쳐줬어요. 프리랜서의 삶은 좋아하는 걸 하기 위해, 싫어하는 것도 잘 참고 해내는 된다는 걸."


-어쨌든 당신이 제안한 ‘로드스쿨러’는 등교 형태의 교육 방식에 질문을 품는 코로나 시대에 새로운 샘플이 될 수 있어요. 꼭 로드가 아니라 온라인에서도 전 세계 지식을 주도적으로 흡수할 수 있거든요.


"특강에서 만난 부모님들은 제게 그러세요. "보라 씨는 자기주도적인 사람이라 되지만, 우리 애는 안 돼요." 그러면 저는 말씀드려요. 윗세대의 경험을 근거로 판단하지 말고 아이들을 믿고 선택의 기회를 더 주라고요. 경험을 쌓고 살아가는 건 아이 몫이잖아요. 원래 아이 거니까, 아이 몫을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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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퇴 후 여행에서 돌아온 후 다큐멘터리 ‘로드스쿨러'를 만들어 세상과 나눴다.

-펀딩 능력도 탁월하더군요. 고교 때 배낭여행 프로젝트나 유학 자금도 다 펀딩으로 해결했습니다. 비결이 있나요?


"하하. 비결은 뻔뻔함? 그런데 저는 정말 믿었어요. 나의 경험이 사회의 자원이 될 수도 있다고요. 그렇게 여행 계획서를 짜서, 어른들 만나 800만 원을 받았어요. 생각해보세요. 어느 날 갑자기 17살 아이가 찾아와서 설득하면 3만 원이든, 5만 원이든 주머니 속 있는 대로 삥을 뜯기지 않을 수 없어요(웃음).


그런데 또 그 경험이 재미있으신지, 또 다른 어른을 만나보라고 소개해 줘요. 저는 계속 모르는 어른을 만나 물리적 자원과 정보를 공식적으로 삥 뜯고 다닌 거죠."


학교 멘토, 신부님, 대안 교육 학부모, 동남아 여행 작가… 그렇게 소개받은 사람을 만나러 지방을 두루 찾아다녔다. 노잣돈보다 사람이 재산으로 쌓였다. "학교에만 있었다면 절대 못 만났을 분들이죠. 그분들에겐 어김없이 돈과 훈계, 정보가 같이 따라왔어요." 이 패턴은 여행지에서도 그대로 이어졌다. "청소년이 배낭여행을 한다니 루피와 바트를 주는 분들이 많았어요. 콜라도 사주고 샌들도 사주시고."


-세상이 주는 호의를 충분히 누렸군요.


"하하. 저는 정말로 굳게 믿었어요. 내가 하는 여행이 사리사욕을 채우는 게 아니라 세상에 도움을 줄 거라고요. 저와 같은 범주의 배움이 늘어나게 할 거라고요. 실제 그렇게 활동했고요. 사실 여행 떠나기 전에는 다녀와서 복학할 생각이었는데, 와서는 안 돌아갔어요. 이 경험을 사회에 환원하려고요. 이후에 네덜란드 유학 자금도 그 자신감으로 공개적인 펀딩을 했고요."


-그러니까 펀딩의 진짜 비결은?


"진정성이요! 저는 예술가로서 질문을 던져요. 그게 사회를 더 성찰하게 만들죠. 유학은 꼭 돈 있는 사람, 기업이 주는 장학금으로만 가냐 되나요? 저는 거기 동의할 수 없어요. 보통 사람들이 십시일반 제 배움을 지원해주면, 저는 돌아와서 책과 영화로 갚아요. 지구를 덜 괴롭히고 덜 아프게 하는 방법으로 돌려드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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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스, 굿패스, 베리굿 패스만 존재하는 네덜란드 필름아카데미에서 ‘베리굿 패스’를 받은 이길보라./사진=고운호 기자

일방적 평가 아닌 피드백 주고받는 네덜란드 학교

-네덜란드 필름 아카데미의 석사 교육이 한국과는 매우 다르더군요. 평가가 아니라 계속 피드백을 주고받는 방식이 인상적이었어요.


"네. 정말 너무 좋아서 다른 분들도 이런 경험을 꼭 해봤으면 좋겠어요. 유학 가서 자전거 안장 위에서 "너무 좋아. 너무 좋아" 울면서 다녔어요(웃음). 미술, 영화, 다큐 등으로 자기 연구 포맷을 선택할 수 있고 계속 피드백을 주면서 보완해 갔어요. 비교는 없어요. ‘너의 질문은 뭐니?’ 어떻게 하면 그 질문을 발전시킬 수 있을까를 함께 고민하죠.


석사를 세 번째 하는 동료에게 제가 물었어요. 한국에서 대개 학사, 석사, 박사 이렇게 단계를 밟아가는 데 너는 왜 또 석사를 하느냐고. 그 친구가 더 놀라더라고요. 자기는 학위가 필요한 게 아니라 이 공부가 필요한 거라고. 석사가 두 번째인 친구도 여럿 있었어요."


-이 책의 최고의 메시지는 ‘괜찮아, 경험'과 ‘보라는 보라의 속도대로'일 듯해요. 그걸 보라 씨가 먼저 실행하고, 부모가 부추기고, 네덜란드의 스승과 석사 동료들이 ‘맞다'고 인정해주는 사이클로 가고 있습니다. 당신은 사람을 믿기 때문에 계속 좋은 사람들만 만나는 것 같아요.


"얼마 전 김민식 PD님이 그러더군요. ‘보라 씨는 남들이 욕할 거라는 생각을 안 하니까’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다고요. ‘유학 자금을 크라우드 펀딩 하면 남들이 욕할까?’ 저는 그런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요(웃음)."


-나쁜 인연은 없었습니까?


"왜요. 제 인생에도 나쁜 사람이 있었어요. 부모님이 장애인이라고 결혼 앞두고 도망간 사람도 있었고요(웃음). 하지만 좋은 사람이 더 많았어요. "안돼!" 보다 "재밌겠다." "같이 해보자"고 힘을 보태는 사람들. 여행도 유학도 그런 사람들, 친구와 스승과 파트너 덕으로 버텼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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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를 좋아했던 아버지 이상국과 달리기를 좋아했던 어머니 길경희. 그들은 현재의 경험을 소중하게 느끼며 살고 있다.

-부모님은 어떤 경험을 해오셨습니까?


"아버지는 가구 만들다가 IMF 때 직장에서 해고당하셨고요. 그 뒤엔 엄마 아빠가 같이 와플이나 호빵을 구워서 지역 축제 다니면서 파셨어요. 엄마는 지금 안성시 농인 협회 지회장이고, 아빠는 노점 일을 계속 하세요. 목걸이, 장난감 지금은 그림을 떼다 팔아요."


-농인과 청인의 두 세계를 오가면서 얻은 특별한 배움은 뭐죠?


"중재! 교차로에 동그라미 쳐서 전셋집 월셋집을 찾고, 아빠의 노점상 재료를 묻고 통역했어요. 친척들 사이에 돈 문제가 생겨도 제 말과 손으로 전달이 됐어요. 영어 한국어 통역과는 달라요(웃음). 집안 문제를 가장 먼저 들었어요. 농인은 정보에서 소외되고 농인 자녀인 코다는 부모의 보호자 역할을 하게 돼요. 내 부모의 지식과 정보권을 고려하고 감정을 지켜줘야죠."


코다로서 얻은 최고의 능력은 ‘소통’이라고 했다. "그래도 제 파트너는 저더러 눈치 없다고 하지만요(웃음)" 이길보라는 현재 ‘파트너’라고 지칭하는 일본인 남자 친구와 살고 있다. 네덜란드 유학도 그와 함께였다. 배우자가 아닌 파트너로 사는 삶, 자유와 책임이 황금률을 이루는 관계에 더없이 만족하고 있다.


-양가 부모가 함께 만나는 상견례 자리에서 파트너의 부모님이 ‘우리는 정말 아름답고 닮았고 또 다르다고 생각했다’는 말이 인상적이더군요. 결혼이라는 형식보다 더 진정성 있는 ‘합가'라고 느꼈어요.


"저도 감동했어요. 상대 부모가 농인이라는 걸 알아도 실제 보면 놀라요. 표정에서 다 드러나죠. 상대를 무시하는 경우, 깜짝 놀랐지만 교양있는 척 연기하는 경우, 놀란 감정을 다 드러내는 경우. 충분히 안 좋은 상황이 벌어질 수 있어요. 그런데 그분들은 우리 가족 다큐멘터리인 ‘반짝이는 박수 소리' 영화를 보고 오셨어요. 저희 부모님을 자연스럽고 평범하게 존중해주셔서 감사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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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별짓기는 그만두고 개인의 행복에 집중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하는 이길보라./사진=고운호 기자

-감사했군요!


"사실 감사할 일은 아니죠. 하지만 사회적으로 농인과 청인은 대등하지 않다고, 다들 차별에 단련돼 있으니까. 서로 대등하게 존재하는 거지, 누가 누군가를 받아들여 주는 건 아닌데 말이죠."

"모르면 물어보라" 비주류, 다양성이 삶 반짝이게 해

-동정과 공감은 어떻게 다른가요?


"심퍼시와 엠퍼시의 차이죠. 머리로만 아는 척하는 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남의 신발을 신어보는 것'. 다들 제게 청각장애인을 만나면 어떻게 대해야 하느냐고 물어요. 프랑스어를 모르면 구글 번역기에 물어보잖아요. 수어를 몰라도 똑같이 물어보고 배워야죠. 장애인을 대하는 자세를 보면 그 사람의 교양, 인격, 문화적 스타일이 다 느껴져요."


그의 목소리가 잠시 격앙되었다 잦아들었다.


-여성이고 장애인의 자녀, 라는 당신의 비주류 성분이 ‘다양성의 시대’를 맞아 더욱 빛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네. 실제로 다양해야 더 빛나고 아름다워요. 아버지는 다시 태어나도 농인으로 태어나고 싶대요."


-다시 태어나도 농인으로?


"네. 엄마는 ‘소리를 한번 들어보고 싶긴 해’ 정도예요. 아버지는 청인들이 입만 움직여서 큰 소리를 내는 게 예쁘지 않대요(웃음). 표정을 풍부하게 움직이는 게 더 흥미롭다고요. 소리를 갖고 싶다는 생각은 진심으로 안 한대요. 결핍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대요. 저도 누군가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청인이 될래? 코다가 될래? 묻는다면 진심으로 코다가 되고 싶어요."


-다시 태어나도 코다가 되고 싶군요!


"제가 코다가 아니었다면 지금의 소통 능력, 이야기 능력은 갖추지 못했을 거예요. 저의 선천적 배경은 이야기를 만드는 데 너무나 귀중한 바탕이 됐어요."


-다큐멘터리 ‘로드 스쿨러' ‘반짝이는 박수 소리' ‘기억의 전쟁'은 다 당신의 ‘사적인' 경험에서 시작됐고, 바로 그런 점이 더욱 ‘공적인’ 울림을 만드는 것 같습니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말이 실감났어요. 더 많은 개인의 역사, 더 많은 도전, 더 많은 기억과 목소리가 복원되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내가 알고 내가 경험한 사적인 세계가 소중한 역사라는 확신을 네덜란드에서 했어요. 그전까지는 사회나 학교가 최고라고 말하는 것과 내 생각이 달랐어요. 무시당하는 게 싫어서 목청을 높였달까요. 그런데 네덜란드에서는 사적인 게 예술이라고 인정해주니, 비로소 긴장을 풀었어요."

조선비즈

다큐멘터리 ‘기억의 전쟁'에서 수어로 증언하는 강렬한 장면.

-‘기억의 전쟁'은 베트남 참전용사였던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듣고 자란 당신이 베트남으로 가서 만난 민간인들의 기억 속의 전쟁을 다루고 있어요.


"네. 영화 속에서 서울에서 열었던 시민평화법정은 이벤트였어요. 거기서 이기고 지는 건 상관이 없었죠. 등장인물인 탄 아주머니가 "그때 그 현장에 있었던 분은 내 손을 잡고 사과해달라"고 했죠. 아무도 나오지 않았고, 그녀는 다시 베트남으로 돌아가 집단 제사를 지냈어요. 괜찮아요. 아주머니는 스스로 무엇을 원하는지 알았고, 그것을 얻고 싶다고 용기 있게 말했잖아요."


-농인인 껌 아저씨의 수화 증언(내 눈으로 봤어)은 백 마디 말보다 힘이 있어 보였습니다.


"껌 아저씨는 수화를 정식으로 배우지 않아서 그건 ‘홈 사인' 정도예요. 자기만의 소통체계죠. 공적인 번역이 불가능한. 그래도 그 사람의 언어가 기록됐어요. 그걸 해냈다는 게 기뻐요."


-당신은 통역자, 기록자로서 정말 특별한 재능이 있네요. 그 능력이 점점 더 확장되는 것 같습니다.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들을 다 해보고 나니, 기분이 어떤가요?


"재밌었어요. 즐거웠고요. 또 하고 싶어요. 그래서 해보고 싶은 건 꼭 해보라고 하고 싶어요."

조선비즈

지지를 받을 때, 경험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이길보라./사진=고운호 기자

-‘경험의 세계'가 줄어드는 코로나 시대에서 경험은 어떤 변화를 맞을까요?


"더이상 하고 싶은 일을 미룰 필요가 없죠. 이러다가는 지구가 2030년에 멸망할 수도 있어요(웃음). 그렇게 생각하면 더더욱 좋은 아파트, 좋은 연봉… 타인과 경쟁하기보다 자기 행복 경험에 집중해야죠.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룰 때문에 장마도 바이러스도 왔잖아요. 그걸 따라가면 답이 없어요. 청년들에게 다른 환경이 오고 있어요. 10대 20대 30대… 더 편견 없는 젊은 피에서 답이 나오지 않을까요. 물리적 세계가 좁아져도 새로운 경험의 출구는 늘 있는 법이죠(웃음)."


-예술가란 어떤 존재죠?


"질문하는 사람. 지금 굴러가는 정상성이 정말 맞는 건지, 질문하는 사람."


-마지막으로 엄마 아빠에게 어떤 점이 가장 감사한가요?


"제가 얼마 전에 운전면허를 땄거든요. 도로 연수받기도 전에 엄마가 차 키를 넘겨주셨어요. "보라가 운전을 잘할 거라 믿어!" 제 인생은 그런 순간의 연속이었어요. ‘괜찮아, 경험'. 저는 뭘 하든 지지를 받았어요. 단언컨데 최고의 선물이었어요."


김지수 문화전문기자(kimjisu@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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