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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봄볕 화사한 옛집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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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장둘레길에서 본 강릉선교장. 아름드리 소나무와 고택의 기와가 어우러진 풍경이 운치가 있다./ 김성환 기자

아시아투데이 글·사진 김성환 기자 = 옛집 마당에 봄이 살포시 내려 앉았다. 사랑채 누마루에 앉아 보는 신록의 풍경에 눈이 즐겁다. 순한 볕은 몸을 개운하게 만든다. 오래된 담장을 따라 소나무, 비자나무 울창한 오솔길을 산책하면 마음이 들떠 봄꽃 생각도 안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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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여년의 전통을 간직한 강릉선교장/ 김성환 기자

강원 강릉선교장

강릉선교장은 운정동에 있다. 조선 상류 사대부가의 가옥이다. 효령대군 11세손인 이내번(1703~1781)이 지었다. 세종대왕의 형이 효령대군이다. 10대에 걸쳐 증축을 거친 끝에 현재의 모습이 됐다. 300여년이 지났지만 원형이 잘 보존 된 덕에 국가민속문화재(제5호)로 지정돼 관리되고 있다.


강릉선교장은 송강 정철의 가사 ‘관동별곡’으로 유명해졌다.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한 정철이 관동팔경(관동지방의 여덟 절승지)과 금강산 등을 두루 유람한 후 풍경과 소감, 풍속 등을 노래로 읊은 것이 관동별곡이다. 이게 당시 선비들의 애를 태웠다. 관동지방을 유람하는 것은 선비들의 로망으로 자리잡았다. 여정의 베이스캠프로가 바로 강릉선교장이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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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선교장의 활래정/ 김성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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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선교장은 규모가 크다. 그만큼 구경하는 재미가 있다. 건물 중에서 활래정과 열화당이 유명하다. 활래정은 외별당이다. 본채 앞마당에 인공연못을 파고 세운 누각이다. 연못과 누각이 어우러진 풍경은 이곳의 상징이 됐다. 연꽃 활짝 피는 여름에 멋지지만 볕발 순한 봄에도 운치는 있다. 열화당은 사랑채다. 한옥과 서양식 테라스가 합쳐진 형태가 눈길을 끈다. 조선후기에 러시아공사관 사람들이 이곳에 머물렀단다. 이들이 감사의 표시로 동판 테라스를 선물했는데 이것을 원래의 건물에 결합했단다.


‘선교장둘레길’도 좋다. 뒷산을 에두르는 길인데 길 주변에 자라는 아름드리 소나무가 멋지다. 하룻밤 묵을 수도 있다. 한옥스테이가 가능하다. 다식만들기, 한복만들기 같은 체험 프로그램도 운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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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동마을 무첨당/ 김성환 기자

경북 경주 양동마을

경주 강동면 양동마을은 봄볕 즐기며 산책하기 좋은 마을이다. 여강(여주) 이씨, 월성 손씨 집성촌이다. 마을 역사는 600년 가까이 된다. 월성 손씨 입향조이자 ‘이시애의 난’(1467)을 평정해 공신 반열에 오른 손소(1433~1484)가 살았고 영남학파의 선구자로 꼽히는 회재 이언적(1491~1553)이 태어난 마을이다. 마을의 원형이 잘 보존됐고 문화적 가치도 인정받아 2010년 안동 하회마을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도 지정됐다.


봄볕 내려 앉은 풍경이 좋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양동마을이 자리잡은 곳을 전형적인 배산임수형 길지로 꼽았다. 마을 앞으로 내(川)가 흐르고 설창산, 문필봉이 배후를 에둘렀다.


오래된 가옥들을 찾아 기웃거리는 재미가 있다. 기억해야할 곳을 추리면 마을 들머리의 향단(보물 제412호)은 이언적이 어머니를 돌보기 위해 지은 집인데 끊어질 듯 이어진 기와 지붕과 돌담이 인상적이다. 향단 옆 관가정(보물 제442호)은 600년 가까이 된 양동마을 최고(最古)의 건물이다. 정자에서 보는 풍경이 좋다. 무첨당(보물 제411호)은 여강 이씨 종가다. 1508년에 지어졌다. 이언적이 생활했고 흥선대원군이 집권하기 전에 머무르기도 했단다. 서백당은 월성 손씨 종가다. 월성 손씨는 이언적의 외가다. 그가 태어난 곳이 서백당이다. 사랑채 마당의 우람한 향나무가 볼만하다. 서백당, 무첨당에는 지금도 자손들이 거주한다.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제한될 수 있다. 그러나 고택의 품격이 담장을 훌쩍 뛰어 넘으니 실망하지 않아도 된다.


양동마을을 에두르는 둘레길과 주요 건물을 중심으로 이어진 탐방로가 잘 조성돼 있다. 하룻밤 묵을 수도 있다. 양동마을 홈페이지에서 민박 정보와 체험 프로그램 정보를 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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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재고택 사랑채/ 김성환 기자

충남 논산 명재고택

명재고택은 논산 노성면에 있다. 조선후기 대학자인 명재 윤증(1629~1714)의 호를 딴 고택이다. 윤증이 세상을 뜨기 전 그의 아들과 제자들이 인근 유봉리 초가에서 기거하던 그를 위해 지었다. 정작 윤증은 과분하다며 끝내 들어와 살지 않았다고 전한다. 단아하고 기품 있는 고택은 TV광고의 배경으로도 종종 등장했다.


명재고택은 한옥스테이에 관심이 있는 이들 사이에서는 잘 알려졌다. 정갈한 향촌 사대부가 선비의 집은 하룻밤을 묵으며 ‘힐링’할 장소로 손색이 없기 때문이다. 잠깐 구경함기 위해 찾기도 한다. 특히 사랑채 누마루 창을 통해 보는 풍경이 운치가 있다.


윤증은 평생 벼슬을 마다하고 지역에 남아 후학 양성에 매진했다. 고귀한 선비의 기품은 고택 곳곳에서 발견된다. 형편이 어려운 이들을 배려해 밥짓는 연기가 보이지 않도록 굴뚝을 안채 담장보다 낮게 만들었다. 마당에는 아예 담장이 없다. 소론의 거두였던 자신을 감시하려고 노론파가 향교를 자신의 집 근처로 옮기자 차라리 전부 보여주겠다며 담장을 헐어버렸단다.


고택 주변을 산책하는 재미도 있다. 배롱나무, 향나무가 예쁘고 정갈한 연못도 눈길을 끈다. 고택 옆에 열을 맞춰 늘어선 장독들도 볼거리다. 오래된 나무와 장독대가 어우러진 풍경이 마음을 평온하게 만든다. 이 풍경을 카메라 렌즈에 담기 위해 멀리서 애써 찾는 이들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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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우당/ 김성환 기자

전남 해남 녹우당

녹우당은 조선중기 대문호 고산 윤선도(1587~1671)의 고택이자 해남 윤씨 종가다. 해남 해남읍에 있다. 녹우당은 고택 사랑채의 당호지만 고택 전체를 상징하는 의미로 불린다.


윤선도는 효종의 스승이었다. 효종은 당쟁에 휘말려 해남으로 유배를 가는 스승을 애처롭게 여겨 수원에 집을 하사했다. 윤선도는 이 집의 원재료를 뱃길로 운반해 지금의 위치에 다시 지었단다. 이게 1668년, 윤선도의 나이 82세의 일이다. 특히 녹우당 사랑채는 처마 위에 처마를 덧댄, 한옥에서 흔치 않은 겹처마 양식으로도 유명하다.


녹우당은 호남지방의 학문과 예술의 중심이었다. 시작이 윤선도였고 별당에서 조선후기 대학자 다산 정약용이 태어났다. 윤선도의 증손인 공재 윤두서는 조선후기의 빼어난 문인화가로 이곳에서 학문과 예술을 연마하며 수많은 학자, 예술가와 교류했다.


녹우당은 아쉽게도 후손이 거주하고 있어 현재 개방하지 않는단다. 담장 너머로는 보인다. 주변을 산책하며 아쉬움을 달랜다. 고택 입구에는 수령 500년 된 은행나무가 있다. 뒤에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비자나무숲이 있다. 비자나무 숲은 산책하기 좋다. 바람이 불 때 잎들이 내는 소리가 초록색처럼 맑은 빗소리 같다고 해 녹우당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종가 앞 은행나무가 바람이 불면 잎이 날리는데 ‘초록의 비(綠雨)’가 내리는 듯 해서 붙은 이름이라는 얘기도 있다. 녹우당 앞에 고산유물전시관이 있다. 윤두서의 작품 ‘자화상’(국보 제240호)을 비롯해 고산 관련 자료 등이 보존, 전시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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