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님 잔과 수저 준비” 어긋난 자식사랑이 만든 축구부 ‘술자리 지침서’
감독님 오시면 전원 기립·학부모들은 입구에서 대기
신입생 학부모들이 먼저 대기·자리 배정도 3학년 먼저
감독 "학부모들에 지시한 적 없어…삭제하라고 조치"
'감독님이 오시면 전원 기립 후 감독님 착석 후 자리에 앉습니다.' '각 학년 부회장들은 입구에서 대기하세요.' '감독님 오시기 전에 술병을 따면 안 됩니다.'
경기지역 한 고등학교 축구부 학생의 부모들에게 공유되고 있다는 '술자리 지침서'가 외부로 유출되면서 파문이 일고 있다. 학생들의 대학 진학 등에 절대적 권한을 가진 일부 운동부 감독들이 '갑질'을 일삼는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지만, 문서로 정리된 이 지침서는 그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케 한다.
15일 한 온라인 축구커뮤니티에 올라와 공분을 사고 있는 '모 고교 축구부의 선수 학부모용 술자리 지침서'를 보면, 이 학교 축구부 감독에 대한 술자리 의전 방법이 구체적으로 기술돼 있다. 지침서는 감독과의 술자리에 참석하는 학부모들에게 '감독이 오기 전 술병을 먼저 열면 안 된다'고 조언한다.
감독이 입장하면 '전원 기립'해야 한다는 조항도 있다. 각학년 학부모 대표들은 술에 취한 학부모를 밖으로 데리고 나가 술이 깨도록 유도해야 한다는 내용도 담겨있다.
지침서에 따르면 학부모들은 자녀의 학년에 따라 서열이 나누어지기도 한다. 신입생 부모들은 먼저 장소로 가서 대기하고, 감독이나 선배 부모보다 늦게 자리에 참석하는 것을 금한다는 내용이 대표적이다. 3학년 학부모들과 감독의 자리배정을 우선시하고 2학년, 1학년 학부모 순으로 자리를 배정하는 조항도 있다.
이 지침서는 술자리 의전 등을 중시하는 감독의 취향을 감안해, 학부모들이 그 내용을 정리하고 후배 부모들에게 전달하려는 목적에서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이런 지침서가 있게 된 배경을 해당 감독 A씨에게 묻자 그는 "학부모들에게 뭘 하라고 지시한 적도, 강압한 적도 없다"고 했다. 그러나 A씨는 "한 학부모가 임의로 작성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해, 지침서 존재 여부는 인지하고 있었다.
A씨는 이어 "감독과 학부모 간 신뢰를 갖고 존중하는 모습이 있어야 아이들도 따라하지 않겠냐는 취지였던 것 같다"며 "결과적으로 좋지 않게 보여 바로 삭제하도록 조치했다"고 덧붙였다. 해당 지침서를 작성한 학부모 B씨도 "신입생 학부모들이 첫 회식 때 지켜야 할 예의 같은 것이 있어서 작성했다"며 "감독이나 코치의 지시가 있었던 건 아니다"라고 했다.
축구부 운영비 횡령과 성폭력 의혹으로 대한축구협회에서 영구제명 징계를 받고 재심 청구를 한 정종선 전 한국고등학교축구연맹 회장이 12일 오후 서울 송파구 올림픽문화센터에서 열린 스포츠공정위원회에서 소명을 마친 뒤 회의실을 나서고 있다. [이미지출처=연합뉴스] |
이 학교의 '지침서 해프닝'은 학원 체육계의 고질적 병폐를 보여주는 한 사례이기도 하다.
지난해에는 정종선 전 한국고등학교축구연맹 회장이 서울 언남고 축구부 감독 재임 시절 자행한 갑질이 사회 문제로 대두됐다. 정 전 회장은 감독 시절 학부모들로부터 수천만원을 받은 혐의로 지난해 5월부터 경찰조사를 받았다. 학부모를 성폭행했다는 의혹도 있다. 학부모들은 정 감독의 식사와 빨래 등도 도맡아 했다고 증언했다.
2016년에도 부산의 모 고교 운동부 감독이 학부모들에게 같은 학교 감독 교사 B씨의 장모 장례식에 조화를 보내도록 강요한 사실이 교육청 감사에서 적발되기도 했다.
이정윤 기자 leejuyoo@asiae.co.kr
유병돈 기자 tamond@asia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