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서 숨 쉬며 나른하게 쉬어가기
엄마는 항상 바쁘다. 엄마가 들으면 서운해 하실 수도 있지만, 어릴 때부터 나에게 엄마는 ‘바쁜 엄마’였다. 절대로 나쁜 뜻이 아니다. 바쁘고 부지런하면서 모든 일들을 척척 해결하는 엄마니까. 그리고 언제나 엄마를 닮고 싶었다. 주변에 그 누구 하나 놓치지 않는 사람, 그래서 바쁜 엄마라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 휴일, 엄마와 제주도에 다녀왔다. 오래 전부터 같이 여행 가자고 했었는데 이제야 다녀왔다. 비루한 휴학생인 나는 아직까지도 엄마를 “모시고” 여행 다녀올 수 없어 죄송스러웠지만, 바쁜 엄마에게 휴식을 주고 싶었다. 우리의 코드는 당연히 ‘힐링’. 사람들 북적이는 곳에서 항상 시끄러운 소음에 시달려왔다면, 제주도에서는 탁 트인 넓은 바다를 바라보며, 잔잔하지만 야무진 파도소리를 듣고 싶었다. 빡빡하고 치밀한 일정보다는 그 날의 기분에 따라, 내 발걸음이 향하는 곳으로 가기로 했다. 마치 지산(JISAN)의 노래 ‘숨, 쉼, 섬’의 가사처럼.
눈을 감아 들리는 소리를 그려
보이는 것을 잡으려 손을 들어
여행자의 마음이 되어봐
백 미터 달리기 선수처럼
긴장하고 살던 날들은 잠시 잊고서
발에 땅이 흠뻑 닿도록 천천히 걸어봐
여행자의 걸음이 되어봐
오 여기가 섬이 되고 그 섬에서 숨을 쉬고
손을 들어 기지개를 펴고서
나른하게 나른하게 쉬어봐
여기가 섬이 되고 여기가 숲이 돼
여기서 숨을 쉬고 여기서 나른하게 쉬어
-지산(JISAN)의 '숨, 쉼, 섬' 가사
우리는 여행자의 걸음으로 걸었고,
(1) 사려니숲길
사려니숲길은 제주 서귀포시 남원읍 한남리 사려니오름에서 제주시 조천읍 교래리 비자림로까지 이어지는 약 15km가량의 숲길이다. 4.3평화공원 주차장에 차를 대고 전용 셔틀버스를 이용할 수 있다. 참고로 사려니숲길은 별도의 입장료없이 이용 가능한 곳이다. 자동차와 자전거 등의 교통수단은 통행이 불가하기 때문에 사람들만 천천히 걷다 갈 수 있는 공간이다. 사려니숲길의 전체를 둘러본다면 2~3시간 가량 걸린다고 하니, “그냥 적당히” 걷다가 나오면 된다. 사방을 둘러봐도 온통 초록색이다. 바람소리가 이렇게 컸나 싶을 정도로 고요한 곳. 사려니숲길에선 잡다한 생각을 멈추고, 원초적인 감각들에 집중하며 걸었다. 먼저 하늘만 보고 걸었다. 초록색 세상의 천장에 뚤린 구멍 같았다. 떼를 지어 지나가는 새들처럼, 한순간에 ‘바람 떼’가 지나갈 때면 터질듯한 바람 소리에 귀가 얼얼 했고 정신없이 흔들리는 나뭇잎에 나까지 날아갈 듯 했다. 그리고선 자동으로 움직이고 있는 내 발과 그 아래 땅만 보며 걸었다. 어렵지 않은 산책로라 더욱 씩씩하게 걸었고, 붉은 토양은 내 신발에 흠뻑 맞닿았다. 살짝 비가 왔던 터라 촉촉하게 젖은 땅에서는 시원한 기운이 느껴졌다. 엄마는 이렇게 햇살을 맞으며 숲길을 걸어본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며, 소녀처럼 기뻐하셨다. 이 꽃 저 꽃, 이 나무 저 나무, 천천히 바라보고 만져보며 숲이 주는 건강한 기운을 맘껏 느끼시는 모습에 나는 더 열심히 걸었다.
(2) 앞오름 (아부오름)
사진엔 그 웅장함이 잘 담기지 않아 아쉽다. 아부는 제주방언으로 ‘아버지처럼 존경하는 사람’을 가리키는데, 앞오름(아부오름)의 모양이 마치 가정에서 어른이 듬직하게 앉아있는 모습과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5분정도 오름을 오르면 그야말로 ‘영화 같은’ 풍경을 마주할 수 있다. 1999년 개봉한 영화 ‘이재수의 난’을 실제로 촬영한 장소이기도 하다. 특히, 그 때 심은 삼나무가 앞오름의 분화구 경계를 따라 자라고 있다고. 이후 다양한 영화 촬영이 이루어지고, 광고나 드라마 촬영지로도 잘 알려졌다고 한다. 우리가 올라간 날은 색감이 고운 한복을 맞춰 입은 새신랑, 새신부가 웨딩사진을 찍고 있었다. 우리는 조금 여유롭게 걸었더니, 한 시간 걸려 앞오름의 정상을 한바퀴 돌았다. 분화구를 가득 메울 정도로 무성한 나무를 바라보며 엄마와 나란히 잔디에 풀썩 앉았다. 앉은 자리 옆에 토끼풀꽃이 있길래, 어렸을 때 엄마가 자주 해줬던 꽃반지를 내가 만들어드렸다. 앞오름의 햇살이 길게 늘어지고 어둠이 찾아오던 그 시간에 우리는 꽃반지 하나로 낄낄 웃으며 추억을 되찾고 있었다. 해질녘과 어우러지는 푸른 나무들, 눈부시게 퍼지는 노을 빛, 그리고 사랑하는 엄마와 함께 하는 그 따뜻함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우리는 여행자의 마음으로 달렸다.
(3)우도
다음날 아침 일찍 우도 선착장으로 향했다. 그토록 기대하던 우도 여행에 비가 내려 살짝 아쉬웠다. 우도에 도착하자 우리는 노란 스쿠터를 빌렸다. 본체(?)는 스쿠터인데 자동차 같은 문짝과 지붕이 달려, 일인용 자동차를 타고 다니는 것 같았다. 안타깝게도 아직까지 운전 면허가 없는 나는, 이 거대한 호기심을 접어두고 운전하는 엄마 뒤에 앉아야만 했다. 오십여년만에 처음으로 스쿠터를 운전하는 엄마는 분명 잔뜩 겁먹었을 것이다. 호들갑 떨며 까부는 딸을 뒤에 앉혔으니, 엄마에겐 긴장감도 사치였겠지. 몇 번 위험한 순간은 있었지만 ‘엄마의 마음’으로 평정심을 되찾고 쌩쌩 달렸다. 그래도 나도 조금 컸다고 “엄마, 괜찮아. 엄마, 잘 가고 있어! 우리 엄마 잘하네!!”라며 엄마를 응원하고 다독였다. 비도 오고, 처음 타는 스쿠터라 무섭기도 해서 우도고 뭐고 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온종일 긴장되는 일에 지쳤던 엄마에게 힐링을 선사하고자 놀러 온 여행에서 오히려 더 긴장하고 있었다. 엄마의 긴장을 풀어드리려 근처 식당 ‘섬소나이’에 들어가 짬뽕을 시켰다. (이곳의 짬뽕은 제주도에서 먹었던 음식들 중 손에 꼽을 정도였다. 강추!) 배를 채워서일까, 시간이 지나 여유가 생긴걸까 엄마와 나는 이제야 ‘여행자의 마음’으로 달릴 수 있었다.
까짓 거 그냥 달리지 뭐!
이럴 때 아니면 언제 스쿠터 타겠어?
이런 게 여행이고 추억이지!
제주도에 다녀온지도 시간이 꽤 흘렀다. 그 사이에 나는 시간만 나면 제주도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다. 아직까지도 그 여운이 가시질 않는다. 제주도의 푸른 자연에서 맑은 공기 마시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서일까. 나보다 더 바쁜 엄마와 함께 손잡고 도란도란 걸어가며 느꼈던 그 온기 때문일까. 나에게 이번 제주도 여행은 말 그대로 "숨, 쉼, 섬"이었다. 맑고 건강한 자연의 공기를 들이마시고. 사랑하는 엄마와 마주 앉아 기지개 피고. 내 마음대로 걷고 달릴 수 있는 섬이었다. 그리고 엄마에게도 똑같이 전달되었길 바란다. 눈코 뜰새 없이 바쁜 엄마에게 딸이 선물하고 싶었던 "숨, 쉼, 섬"이니까.
[황지현 기자 ctims45@naver.c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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