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기억을 기억하는 방법
기억을 위하여 기억은 잊혀 진다. 우리는 모든 것을 기억할 수 없기 때문에 최근의 일들, 혹은 중요한 사건들을 위주로 기억한다. 이것들을 기억하는 과정에서 지나간 평범한 일상의 기억들은 잊혀 진다. 현재의 ‘나’를 구성하게 한 수많은 일상적인 기억들은 다시금 ‘나’를 구성하기 위한 과정 속에서 잊혀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억들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쉽게 끄집어내지는 못할지라도 우리에게서 영영 떠나가지 않는다. 이들은 삶의 어떤 순간 정제된 형태로, 혹은 날 것 그대로의 모습으로 다시 등장한다.
기억은 예컨대 이와 같은 방식으로 떠오른다. 어스름이 지는 버스 정류장, 조그마한 남자 아이가 엄마와 함께 벤치에 앉아있다. 그들은 서로를 마주보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눈다. 아이는 자신이 타고 온 킥보드를 옆에 세워두고 엄마의 머리를 감싸 안는다. 엄마 역시 아이를 따뜻하게 안아준다. 몇 분이 지나고, 버스가 도착하자 정장을 입고 머리를 깔끔히 손질한 남성이 버스에서 내려 걸어온다. 아이는 아빠, 부르며 달려간다. 아빠는 미소로 화답하며 아이를 안아준다. ‘나’는 이들을 바라보며 그들 옆 벤치에 앉아 있다. 이 순간, ‘나’는 어린 시절의 아주 사소한 일들까지도 기억해낼 수 있게 된다. 퇴근하시는 아빠를 놀라게 해 드리기 위해 지하 주차장 어두운 공간 속에 엄마와 함께 숨어 있던 일. 그러고는 차에서 내리시는 아빠를 보고 달려갔던 어린 날의 기억. 퇴근하신 아빠 손에 들려 있던 토끼 인형. 잊은 줄 알았던 과거의 기억들은 현재의 어떠한 ‘순간’에 의해 다시금 현재로 불려온다. 아주 사소한 기억까지도 구체적으로 떠올라 다시금 현재에 머무른다. 존재하는 지도 몰랐던 기억의 파편들은 현재와 맞물려 그 의미를 되찾게 된다. 혹은 그 의미를 더하여 간다. 사람들은 이렇게 소소한 일상 속에서 잊혀진 기억들을 되찾아 낸다. 박건호의 시 ⌜오늘⌟을 통해 '기억'의 속성에 대해 더 자세히 생각해보고자 한다.
⌜오늘⌟ 박건호
어느날 나는
낡은 편지를 발견한다
눈에 익은 글자 사이로
낙엽 같은 세월이 떨어진다
떨어져 가는 것은 세월만이 아니다
세월은 차라리 가지 않는 것
모습을 남겨둔 채 사랑이 간다
비오는 날
유리창에 흘러내리는 추억은
한 잔의 커피를 냉각 시킨다
그러나 아직도 내 마음은 따스한 것을…
저만큼의 거리에서
그대 홀로 찬비에 젖어간다
무엇이 외로운가
어차피 모든 것은 떠나고
떠남 속에 찾아드는
또 하나의 낭만을
나는 버릴 수가 없다
그렇다
이미 떠나버린
그대의 발자국을 따라
눈물도 보내야 한다
그리고 어느날
내가 발견한 낡은 편지 속에서
낯선 사람을 만나듯
그대를 보게 된다
아득한 위치에서
바라다 보이는 그대는
옛날보다 더욱 선명하다
그 선명한 모습에서
그대는 자꾸 달라져 간다
달라지는 것은 영원한 것
영원한 것은 달라지는 것
뜨겁고 차가운 시간과 시간 사이로
나는 이해할 수 없는
하나의 공식 속에서
오늘을 살아간다
오늘을 살아간다
이 시 속의 화자는 삶의 어느날 ‘낡은 편지’를 발견하게 된다. ‘낡은 편지’는 잊은 줄 알았던 과거의 기억을 현재와 이어준다. ‘낙엽’ 같은 세월 속 잊었던, 사랑했던 사람과의 기억은 오늘 우연히 찾게 된 편지로 인해 다시 떠오른다. 시 속의 ‘비’ 역시 화자로 하여금 과거의 기억을 꺼내어 보고, 현재의 관점에서 그 때의 기억을 다시 생각해보게 한다. 우리들의 대부분의 기억들은 이러한 방식으로 잊혀지고, 또 이러한 방식으로 다시 돌아온다. 시간이 지나면 빛이 바래고 끝내 떨어져 버리는 낙엽처럼, 시간이 지나면 소중했던 기억들도 세월 속에 바래져 서서히 잊혀 가는 것이다. 그러나 어느 날, 우연히 발견한 물건 혹은 우연히 발생한 사건에 의해 바래진 기억이 다시 떠오르게 된다. 그것도 더욱 선명하게. ‘아득한 위치에서/ 바라다 보이는 그대는/ 옛날보다 더욱 선명하다/ 그 선명한 모습에서/ 그대는 자꾸 달라져 간다’고 시인은 표현하였다. 세월이 지나 과거는 아득히 멀어졌지만, 문득 다시 떠오른 기억은 아주 생생하다. 또한, 현재에 와서 과거의 기억은 선명해질 뿐 아니라 계속해서 변해간다. 이것은 우리가 과거에 비해 더 많이, 더 넓게 볼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하나의 관점, 하나의 시선으로만 볼 수 있었던 과거와는 달리 세월이 지나면서 같은 사건을 여러 관점과 시선으로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한 가지 관점으로 보았던 과거의 기억은 성숙해진 오늘의 관점에 의해 계속해서 달라진다. 모든 것은 생동하고 변화하기에 살아있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계속해서 선명해짐과 동시에 변화하는 ‘기억’은 살아있는 것이며 영원한 것이 된다. 시간이 지날수록 과거의 기억이 선명해지고 영원해지는 모순, 그 속에서 우리는 ‘오늘’을 살아가는 것이다.
김연수의 소설 ⌜사랑이라니, 선영아⌟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등장한다. ‘기억이 아름다울까, 사랑이 아름다울까? 물론 기억이다. 기억이 더 오래가기 때문에 더 아름답다. 사랑은 두 사람이 필요하지만, 기억은 혼자라도 상관없다. 사랑이 지나가고 나면 우리가 덧정을 쏟을 곳은 기억뿐이다. 모든 게 끝나면 유통기한이 지난 식료품처럼 사랑했던 마음은 반품시켜야 하지만, 사랑했던 기억만은 영수증처럼 우리에게 남는다.’ 여기서 역시 기억의 중요한 속성이 다시 나타난다. 영원하다는 것, 그리고 변화한다는 것. 우리가 현재에 지난 기억을 떠올리고 있는지 여부와는 상관없이 기억은 영원하다. 현재의 어떠한 사건 혹은 상황과 맞물리면, 잊었던 기억들이 다시금 생생하게 돌아오기 때문이다. 또한, 기억은 변화한다. 앞서 언급한 구절에서도 나타나듯, 사람들은 흔히 과거의 일들을 미화시키곤 한다. 지나가버린 일이기 때문에 결과를 바꿀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을 미화시키는 것은 가능하다. 그래서 우리는 곧잘 지난 기억들을 미화시키고는 한다. 그러나 시간이 더 지나고 다시금 그 기억이 떠오르면 우리는 그것을 미화하는 대신 더욱 넓은 시선으로 그것을 바라보려 할 것이다. 그러면, 다시금 우리의 기억은 변화하게 된다. 그리고 이로 인해 기억의 영원성은 더욱 굳건해진다.
기억은 이처럼 우리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우연히 떠오른다. 그러나 모든 떠오르는 기억이 행복한 것은 아니다. 너무 힘들어서 두 번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일들도 어느 날 문득 떠오르곤 한다. ‘낙엽’ 같은 세월은 과거를 잊게도 만들지만, 사람을 성숙하게 만들기도 한다. 낙엽은 때가 되면 떨어지지만, 그 전에 먼저 성숙해지고 여물어야 한다. 이처럼 우리는 과거를 서서히 잊어감과 동시에 그것에 성숙하게 대처할 수 있는 방법 역시 터득해 간다. 그리하여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이 다시 기억났을 때, 우리는 그것을 조금 성숙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될 것이다. 또한, 이렇게 할 때 우리는 ‘떠남 속에 찾아드는/또 하나의 낭만’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사진출처: https://pixabay.com/)
글. 노혜상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