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나의 이상형, 장국영
할아버지는 영화를 무척이나 좋아하셨다. 대가족이었던 어린 시절, 리모컨은 우리 집의 가장 어른인 할아버지의 것이었다. 리모컨이 할아버지의 것이라고 해서 불만이 가득하지는 않았다. 우선, 나는 집에 있기 보다 집 밖에 있는 것을 좋아하던 말괄량이였고 만화 보다는 아이들과 술래잡기 하는 것에 더 빠져 있던 아이였다. 그러다 보니 거실에 놓인 TV는 자연스레 할아버지의 것이 되었다. 맞벌이를 하는 부모님과 집안일을 하느라 바쁘던 할머니는 TV에 큰 애착을 보이지 않으셨다. 오직 할아버지만이 TV 앞에 앉은 유일한 사람이었다.
비가 오던 어느 날, 할아버지가 집을 비운 사이 리모컨은 나의 차지가 되었다. 비가 오는 탓에 밖에서 놀 수 없던 내게 그 순간 TV는 꽤나 중요한 친구였다. 아마 뉴스가 나오고 있겠지. 만화가 몇 번이더라.
대충 그런 생각을 하며 전원을 켰을 때, 뜻밖에도 전원이 켜진 TV에서는 영화가 나오고 있었다. 커다랗고 반짝이는 눈을 가진 사내가 나오는 영화였다. 대사를 들어보니 한국 영화는 아니었고, 분위기를 보아하니 그닥 밝은 영화도 아닌 것 같았다. 그럼에도 내가 채널을 돌리지 못했던 이유는 순식간에 사라진 사내의 눈빛 때문이었다. 사내의 눈은, 나를 미치게 만드는 것 같았다.
어린 나이의 애가 알면 얼마나 아냐고 묻겠지만, 나는 그날의 그를 잊을 수가 없었다. 밖으로는 음울한 비가, TV 속에서는 그보다 더 음울한 미소를 짓는 그가 있었다. 아, 세상에. 자신의 조각상과 사랑에 빠진 피그말리온이 살아 움직이게 된 조각상을 본 첫 기분이 이랬을까? 음울한 미소의 그는 살아움직이는 나의 상상 같았다.
이후 할아버지의 리모컨이 켜질 때면 나는 할아버지의 옆에 앉아 영화를 보았다. 헤어진 애인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그가 나타나기를 바라며 몇 번의 허탕을 치기도 했다. 설렘이란, 기다림이라는 공포를 안고 있는 유약한 존재였다.
-아이고, 젊은 사람이 왜 죽었대.
-이 사람아, 죽는데 이유가 어딨어. 그냥 죽는 거지.
그가 죽은 날,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그의 죽음에 대해 별 말을 하지 않았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할아버지는 영화는 좋아했지만 영화 속 배우들을 좋아하지는 않으셨고, 장국영이 누군지도 모르는 할머니에게 장국영의 죽음은 심심하게 여길만한 죽음일 뿐이었다. 된장국을 먹던 나는, 그가 죽었다는 것이 농담인 줄 알았다. 그가 죽은 날, 같은 반 친구는 자신의 인형이 죽었다고 말했고, 또 다른 친구는 사실 자신이 죽었다고 했으니까. 그래, 그 날은 4월 1일. 만우절이었다.
당시 어리던 내게 언론이 떠들던 그의 죽음에 대한 이유는 중요하지 않았다. 내게 중요했던 것은 크고 예쁜 눈을 가진, 음울한 미소를 짓던 그의 미소를 다시는 볼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럼 할아버지, 이제는 못 봐?
밥을 다 먹은 후에 할아버지에게 묻자, 할아버지는 시끄럽게 떠들던 TV를 껏다. 바깥에선 저녁을 다 먹은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렸고, 할머니는 밥 더 먹으라며 내 밥그릇을 가져갔다. 할아버지는, 한참이나 밥을 씹다 답해주었다.
-볼 수 있어. TV틀면 나와.
영화, 해피투게더 |
그가 죽은 후, 그는 죽은 화가의 그림들처럼 내게서 잊혀지는 듯 했다. 실제로 중학교와 고등학교 시절에는 그가 아닌 다른 멋진 미소를 가진 배우들을 좋아했고, 그의 영화 보다는 다른 영화들에 빠져있기도 했다. 그와, 혹은 그의 영화와 다시 재회한 것은 21살이 되던 겨울이었다. 재회는 순간이었다. 당시 나는 나를 누르던 모든 것들로부터 해방되고 싶었다. 유일한 도피처였던 문학이 파괴된 이상 내가 숨을 수 있는 곳은 거의 없었다. 그때 그의 미소가 보였다. 영화를 소개해주던 한 프로에서 그의 영화가 나온 것이다. 그의 눈빛은 여전히 커다랗고 반짝였다. 음울한 미소를 짓는 그는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홍콩에서 찍은 사진,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에서 |
그 해 여름, 학교에 휴학계를 내고 그를 보러갔다. 홍콩행 비행기표를 예매하고 홍콩으로 떠나기 전까지 내내 나의 영화 목록에는 그가 있었다. 그가 사랑했다던 거리를 걸었고, 가게에 들렀다. 홍콩을 떠나는 순간까지도 내가 그의 고향에 있다는 실감은 나지 않았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던 날, 비행기를 기다리며 창 밖으로 시선을 던지고 있을 때야 비로소 내가 그의 고향에 왔었다는 것을, 이제는 떠난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그의 영화를 틀었다. 음울한 그의 미소가 무척이나 보고 싶었다.
최근에 지인들로부터 이상형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머리 속에 떠오르는 수많은 배우들을 제치고 그의 커다란 눈이 불쑥 튀어나왔다.
-장국영. 내 이상형은 장국영이야.
답하는 순간, 어쩌면 그는 영원한 나의 이상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죽었음에도 여전히 내게 존재하는 그의 미소처럼, 죽을 때까지도 내게는 장국영이 이상형이 될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참 이런 순정도 있구나 싶다. 그럼에도 나는 그의 기억이 소중하다. 어린 아이가 커서 어엿한 여자가 되기까지 나의 순간순간에는 그의 미소가 있었다.
내가 가장 사랑했던 배우이자, 나의 영원한 이상형인 장국영은 이 글을 볼 수 없겠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를 위해 글을 남기고자 한다. 아주 후에 그를 만난다면 내가 당신을 위해 어떤 글을 쓰고 어떤 생각을 했는지 그에게 말하고 싶어서다.
바람이 찬 요즘, 모두에게 건강 조심을 전하며 그를 향한 연서를 마치고자 한다. 오늘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올리며 편지를 써야 할 것 같다.
김나영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