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는 여자는 괴물과 함께 잠을 잔다_6인의 여성 철학자
언어는 눈앞에 그 모습을 당당하게 드러내기에 아무 거짓이 없고 순수해보이지만, 사실 언어만큼 많은 것들을 은폐하는 것도 없다. 언어는 그 사회를 관통해 흐르는 분위기와 관념을 은연중에 담아낼 뿐만 아니라, 지배 논리를 교묘하게 확산시키는 역할을 한다. ‘여성 철학자들’이라는 단어는 그 전자에 해당한다. 배우, 교수, 의사 등 어떤 보편적인 말 앞에 굳이 ‘여성’이라는 단어를 붙인다는 건 ‘여성’이기에 특수하고 특별하다는 인식을 전제로 한다. 고대 아테네의 민주주의에 해당하는 ‘보편적인 사람’이 여성을 제외한 남성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려보면 지금이나 그 때나 거리감이 딱히 존재하는 것 같아 보이진 않는다. 여전히 남성은 평범하며, 여성은 특이하다.
20세기 독일의 유명한 철학자인 한나 아렌트는 한 인터뷰에서 ‘대단히 남성적인 직업을 가졌다’는 인터뷰어의 말에 자신 스스로를 철학자로 느끼지 않는다고 답했다고 한다. 지금부터 이야기 할 <생각하는 여자는 괴물과 함께 잠을 잔다>는 6인의 여성 철학자들을 소개한다. 아직 이들이 누구인지, 무슨 생각을 품고 살았는지 모르지만 사유와 통찰이라는 정신적인 활동까지도 ‘남성적인 것’으로 여겨졌던 은밀한 차별 속에서 자신만의 사상을 전개해나갔다는 것만으로도 그들을 만나고 싶은 욕구가 샘솟지 않는가? 언어에 의해 억압받는 사회 속에서 여성이 철학을 한다는 것은 페미니즘이든 무엇이든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언어의 뒤를 흐르는 철학을 여성의 눈과 여성의 목소리로 전개해나간다는 건 지금까지와는 다른 사고의 물꼬를 터줄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생각이라는 것은 언어가 있기에 가능하다.
하지만 그 과정이 분명 순탄치는 않다. 책 제목에서처럼 ‘생각하는 여자는 괴물과 함께 잠을 잔다.’ 상상해보자. 혼자서 혹은 남편 옆에 누워 웅크린 채 잠든 여성의 모습을 말이다. 잠자리에서 누군가는 하루의 일과를 되돌아보기도 하고, 누군가는 생각을 하기도 전에 잠들기도 할 것이다. 나는 보통 터무니없는 상상을 하다 보면 어느새 아침이 밝곤 한다. 그리고 6명의 철학자들은, 온종일 육아와 집안일로 바빠 마음 한 구석에 버려 놓았던 자신의 철학을 지쳐 잠에 들 때 서야 끌어안았던 것이다. 가부장제의 틀 속에서 단 한 순간도 배려 받지 못한 여성의 욕망과 사상은 그래서 안쓰럽지만, 이불 속에서 탄생한 그들은 뜨겁기 그지없다.
폭력의 시대에 사유로 맞서다, 한나 아렌트(1906~1975, 독일)
의심의 여지없이 한나 아렌트는 20세기 철학사에서 빛나는 존재감을 가진 철학자다. 그의 일생의 동력은 ‘사유하는 기쁨’이었다. 그는 일찍부터, 그리고 마지막까지 비판이 지니는 힘을 신뢰했다. 처음 유대인으로서의 차별을 겪었을 때 그것에 분노하기보다는 이해하고자 한 어린아이였으며, 나치가 집권한 뒤 망명해 떠돌아야 했을 때에도 비관에 젖기보다는 전 세계로 확산되는 믿을 수 없는 폭력의 현실을 똑바로 보고 해석하고자 했다. 그는 기존의 해석 틀을 벗어나는 사유를 지속하며 점점 독자적 영역으로 나아갔다. 아이히만 재판을 지켜보며 유명한 ‘악의 평범성’ 개념을 주장해 유대인 공동체로부터 비난을 받고 고립되기도 했지만 그의 독실한 사유 여정을 멈추지는 못했다. 그는 사유의 힘으로 그만의 정치철학을 수립했고, 지독한 폭력의 시대에서 인간성을 신뢰하는 데 ‘성공’했다.
서발턴의 목소리를 들어라, 가야트리 차크라보르티 스피박(1942~인도)
인도 콜카타에서 태어난 그는 벵골어와 영어를 절반쯤씩 모국어로 갖고 있지만 화술로는 국가기관이 인증한 토론 챔피언인, 다소 독특한 배경을 지닌 활동가이자 학자다. 그는 자신의 논문 제목이기도 한 유명한 질문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를 통해 목소리를 박탈당한 사람들의 문제를 정면에서 조명했다. 그것이 제국주의든 자본주의든 가부장제든 권위적 주체에 의해 타자가 된 이들의 목소리는 지워진다. 이들 서발턴(하위주체)을 침묵에 빠트리는 광범위한 인식의 폭력에 공모하지 말 것을 요청하며 스피박은 서발턴 자신이 말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제3세계’ 문제, 세계 각지의 여성 문제에 실천적으로 개입하고 목소리를 내는 그는 “나를 제3세계 여성이라 부르지 말라”고 외친다.
나의 욕망의 편에서 규범에 질문을 던지다, 주디스 버틀러(1956~, 미국)
일찍이 그는 스스로가 세상이 말하는 기준과 불화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곧바로 질문했다. 그렇다면 나의 욕망은 틀린 것인가? 나는 나의 욕망을 억누르고 제시된 삶의 기준을 따라야 할까? 스스로 물은 뒤, 그는 그러지 않기로 결정한다. ‘올바른 삶’이라고들 하는 그 규범이 자신의 욕망을 억압한다면 규범과 조건을 바꾸겠다고 말이다. 그는 전 세계에 파문을 던진 책 『젠더 트러블』을 통해 ‘젠더’ 자체를 문젯거리로 제시하고 기존의 이분법을 가차 없이 허물었다. 또한 잘못된 통념으로 욕망들을 억압할 것이 아니라 다양한 삶 자체, 욕망 자체를 인정하고 인정받는 것이 중요함을 역설했다. 서로의 인정을 통해 개인의 욕망은 비로소 진정한 의미에서 받아들여질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삶이 모일 때에 공동체는 살 만한 곳이 된다. 다른 이의 삶은 나의 삶의 조건이다.
죽은 백인 남성의 지식에서 벗어나기, 도나 해러웨이(1944~,미국)
도나 해러웨이는 과학자이자 철학자, 페미니스트다. 그는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영장류를 연구해 독보적 이론가로 자리 잡았다. 나아가 그는 영장류학을 포함한 과학 전반이 남성적 원칙에 기초해 있음을 비판하며 기존의 과학이 토대로 삼은 이분법적 전제 자체를 문제시했다. 그는 백인 유럽 남성들의 전유물과도 같은 객관적 지식이라는 환상 대신 상황적 지식 개념을 제안하고, 모든 상황을 떠나 초월적으로 존재하는 진리의 담지자가 되는 대신 ‘겸손한 목격자’로서 세계를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를 위한 길잡이로서 그는 ‘사이보그’를 제시한다. 사이보그는 동물과 기계의 경계, 정상성의 범주 자체를 붕괴시키는 존재로 이를 통해 여성이 사유하는 새로운 방식을 제시하고 질문하며, 선언한다. “나는 사이보그가 되겠다.”
그의 삶은 고의적 어리석음의 연속이었다, 시몬 베유(1909~1943,프랑스)
가장 고통 받는 이들과 함께하겠다 결심하고 교단을 떠나 육체노동자의 삶을 살았으며 병중에도 전쟁 포로들과 동일한 식사를 고집하다 서른넷의 나이에 영양실조로 세상을 떠난 그의 삶은, 강렬하다. 인간의 현실은 고통의 연속이다. 생존을 위해 인간은 너무나 쉽게, 얼마든지 비루해질 수 있다. 인간이 처한 이런 조건을 베유는 ‘중력’이라 불렀다. 이 중력 속에서 살아야만 하는 인간이 어떻게 하면 괴물이 되지 않고, 삶의 의미를 매섭게 응시할 수 있을까? 베유는 가장 약한 이들의 고통에 치열하게 공감하며 사유했고, 중력 속에서 은총에 도달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 신학자 도로테 죌레는 그를 “현대의 성자”라 불렀다.
경계의 공간에서 세상을 사유하기, 쥘리아 크리스테바(1941~프랑스)
프랑스의 대중지식인이자 세계적으로는 포스트구조주의의 선두에 있는 대학자인 쥘리아 크리스테바. 그는 불가리아 태생으로 프랑스에서 학술 활동을 시작했다. 일찍이 스스로를 어디에 귀속될 수 없는 이방인으로 인식한 그는 일찍부터 자신의 이러한 ‘경계성’을 역량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텍스트에 완결적 의미를 부여하는 저자와 그것을 받아들이는 독자가 있다는 기존의 인식을 뒤집는 상호텍스트성 이론으로 텍스트의 경계를 허문다. 주체와 대상 또한 결코 깨끗이 나뉠 수 없다. 그는 비체(아브젝시옹)를 통해 주체의 경계에서 출몰하는 전복성이 갖는 힘을 조명한다. 무의식적인 것, 말해지지 않는 것, 경계에서 출몰하는 것들에 창조성의 근원이 있으며 경계성을 무화하고 억압하는 기존의 이분법은 다름에 대한 배척, 혐오, 폭력이 될 수 있다. 경계인으로서 세계를 이해하는 것, 이것이 동일성을 고집하는 딱딱한 자아를 넘어 사랑의 활동으로 나아갈 수 있는 열쇠다.
이 책은 여성 철학자 6인을 다룬다. 이들은 어떤 하나의 주제를 끌어내기 위해 선택된 것이 아니며, 그렇다고 각각의 사상을 깊이 있게 다루기에는 아주 얇은 책이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6인의 여성 철학자들의 ‘멋짐’을 널리 소문내고 싶은 마음으로 쓰였다며 자신을 소개한다. 도대체 그 멋짐이란게 무엇이기에 책으로까지 펼쳐내고 싶었을까? 그 멋짐이 나에게로 조금이나마 옮아올 수 있을까? 괴물과 함께 잠을 잤던 그들 옆에 반듯이, 또렷한 정신으로 누워보려 한다.
생각하는 여자는 괴물과 함께 잠을 잔다
- 지은이 ㅣ 김은주
- 발행일 ㅣ 2017년 9월 8일
- 쪽수 ㅣ 184p
- 출판사 ㅣ 봄알람
- 책
반채은 에디터 codms1212@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