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뽕짝’의 반란
(출처: 엑스포츠뉴스) |
지난 11월 11일, 엄청난 인파가 한 가수의 콘서트를 보기 위해 몰려들었다. 티켓 오픈과 동시에 전석이 매진되어 큰 화제를 모은 것은 물론이고, 톱스타 중의 톱스타만 가능하다는 콘서트 지상파 중계도 함께 진행되는 공연이었다.
핑크색 상의와 모자를 착용하고 두 손에는 응원봉과 슬로건을 꼭 쥔 가수의 팬들은 ‘아이돌 팬미팅의 성지’라고 불리기도 하는 경희대학교 평화의 전당을 한 자리도 빠짐없이 가득 메웠다. 수많은 1위곡을 가진 탑 아이돌 그룹의 공연 현장이냐고? 아니다. 바로 이제 막 정규 1집을 발매한 신인 트로트 가수 ‘송가인’의 첫 콘서트 현장이다.
한편 방송 3사 연예대상을 모두 수상한 화려한 스펙을 자랑하는 괴물 신인 ‘유산슬(유재석)’의 음원 돌풍도 주목해볼 만하다. 2주 전, MBC 예능 ‘놀면 뭐하니’의 프로젝트 음원으로 발표된 두 개의 트로트 곡이 전 세대에 걸친 인기로 트로트 차트 상위권을 점령하고 있는 것이다.
어디 이 뿐인가? 음원의 인기와 유재석의 화제성이 만든 시너지 효과는, 얼마전 정치권도 이루어 내기 힘들다던 MBC와 KBS 간의 대통합마저 이루어 냈다. ‘신인왕’이 되겠다며 푸른빛 반짝이 의상을 입고 KBS ‘아침마당’에 출연해 모닝 라이브를 선보인 유산슬 덕분에, 평소 아침프로를 시청하지 않던 이들도 이날만큼은 TV 앞에 모여든 것이다.
그렇다. 이처럼 송가인과 유산슬의 예가 단적으로 보여주듯이, 최근 대중문화계에서는 트로트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한때는 장년층과 노년층만의 전유물로 취급되기도 하며, 속된 말로는 ‘뽕짝’이라고도 불렸을 만큼 가치절하되기 일쑤였던 우리의 전통가요 장르가 세대를 막론하고 사랑받기 시작한 것이다.
게다가 그 흥행이 일시적인 ‘유행’으로 끝날 것 같지도 않다. 실제로 최근 트로트계가 2030 세대 가수들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세대교체를 진행하고 있는 데다가, 트로트를 선호하는 젊은 세대의 수용자층 또한 눈에 띄게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최근의 ‘트로트 신드롬’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그 시작은 바로 2015년과 2017년에 각각 화제가 된 두 개의 트로트 곡에 있다. 바로 이애란의 ‘백세 인생’과 김연자의 ‘아모르 파티’다. 이 두 곡은 공통적으로 SNS 상에서 젊은 세대들에게 큰 인기를 얻어 다시 차트를 역주행하게 되었다.
그런데 ‘백세인생’과 ‘아모르 파티’가 현재의 트로트 열풍을 일으킨 시작점인 이유는, 역주행 현상 그 자체 때문은 아니다. 그것은 바로 SNS 상의 화제를 불러일으킬 수 있었던 젊은 세대 수용자들의 트로트 ‘재해석’ 방식에 기인했다.
‘백세인생’의 가사는 원래 ‘자식들과 좀 더 오래 살고 싶어 죽음이 더 늦게 오기를 바라는 부모님의 마음’을 주제로 하고 있다. 하지만 2015년 당시, 젊은 층의 SNS 이용자들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 노래의 가사를 재해석했다. ‘못 간다고 전해라’라는 가사의 자막과 가수 이애란의 표정이 절묘하게 어우러지면서 ‘가기는 싫은데 안 갈 수가 없는 상황’을 표현하기에 안성맞춤인 사진으로 재탄생하게 된 것이다.
특히 계속해서 반복되는 ‘못 간다고 전해라’라는 구절과 전체적인 가사의 내용이 시종일관 직설적이어서, ‘백세 인생’은 곡 자체로도 솔직하고 꾸밈없는 것들을 선호하는 젊은 세대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다.
한편 ‘아모르 파티’도 마찬가지다. 2013년 처음 발표된 후 한동안 빛을 보지 못했던 이 곡은 2017년 SNS 상에서 라이브 영상이 퍼지기 시작하면서 또 하나의 ‘역주행 신화’를 쓰게 되었다. 직설적이면서도 묘하게 청춘들에게 위로가 되는 가사와 EDM 계열의 사운드가 더해지면서, 젊은 세대들에게도 귀에 쏙쏙 박히는 매력적인 곡으로 받아들여지게 된 것이다. ‘자신에게 실망하지 마 모든 걸 잘 할 순 없어’, ‘가슴이 뛰는 대로 하면 돼’와 같이 이 곡에서 반복되는 가사들은 젊은 세대들에게 ‘욜로(YOLO)’ 정신으로 재해석되어 또 다른 의미를 얻었다.
이처럼 ‘백세 인생’과 ‘아모르 파티’의 역주행을 통해 한 차례 예열된 트로트의 인기는 올해 상반기 방영된 트로트 오디션 ‘미스트롯’을 통해 본격적으로 폭발하게 되었다.
실제로 ‘미스트롯’은 트로트의 인기를 견인하기에 충분한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먼저 출연자의 과반수 이상을 30대 이하로 구성하며, 젊은 층을 유입시키기 충분한 조건을 기본적으로 갖추고 시작했다. 게다가 이 프로그램이 트로트 음악을 대하는 방식 또한 새로웠다. 여러 번의 경연이 진행되는 동안 지금까지 많은 대중들이 알지 못했던 트로트의 세부 장르들(발라드 트로트, 댄스 트로트, 재즈 트로트 등)이 등장하며 ‘낡은 음악’이라는 기존의 선입견을 기분 좋게 깨뜨린 것이다.
거기에 최근 대중문화 전반에 걸쳐 나타나고 있는 ‘뉴트로’는 트로트의 촌스러움을 ‘힙’한 감성으로 재탄생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익숙한 아날로그 문화가 기성 세대에게는 향수로, 젊은 세대에게는 신선함으로 수용되는 최근의 문화적 흐름에 트로트의 감성은 ‘안성맞춤’ 그 자체였다. 특히 최근 늘어난 젊은 세대의 트로트 가수들 덕분에 트로트는 더욱 빠르게 전 세대에 흡수될 수 있었다.
세대 간의 가치 갈등의 그 어느 때보다 심화되고 있는 최근, 전통가요 장르인 트로트가 이처럼 제 2의 부흥기를 구가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트로트의 인기는 서로 다른 생활 양식과 가치관을 가진 다양한 세대가, 하나의 문화를 통해 같은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문화 공유와 통합은 자연스럽게 세대 간 사회적 갈등을 완화시키는 데도 반드시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중장년층의 전유물이었던 과거를 뒤로 하고 전 세대를 아우르는 ‘국민 음악 장르’가 된 트로트처럼, 앞으로도 세대, 계층, 혹은 다른 그 어떤 것을 모두 막론하고 모든 이들이 함께 즐길 수 있는 문화코드가 지금보다 더 훨씬 더 많아지기를 소망해 본다. 남녀노소의 구분 없이 모두가 웃는 풍경이야말로, 건강하고 행복한 사회를 가장 잘 보여주는 모습일 테니까.
김현지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