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오는 소리, 울림이 있는 책들
봄의 따스함, 설렘, 그리고 생명력
유난히도 지독하고 길었던 추위가 지나가고, 이제는 제법 따뜻해진 날씨에 사람들의 옷차림이 가벼워 보인다. 나 역시 겨우내 유니폼처럼 입고 다니던 롱 패딩을 고이 접어둔 채, 겨울 코트가 봄 코트 사이를 오가고 있다. 따뜻해진 날씨와 가벼워진 옷차림처럼 나의 몸도 마음도 가벼워진 요즘이다. 나에게 이번 겨울은 참으로 지독하게 추웠는데, 돌이켜보면 나의 마음이 황량한 겨울의 황무지처럼 갈라져있었기에 이 겨울이 더 혹독하게 느껴진 듯하다. 작년 한 해는 심리적으로도, 생활적인 면에서도 힘든 일이 많아서 스스로가 긴 겨울에 갇혀있는 느낌이었다. 실제 계절과 날씨와는 관계없이 말이다. 그리고 드디어, 긴 여행을 끝내고 돌아온 한국에서 내 마음도, 실제 날씨도 성큼 다가온 봄을 만끽하고 있다. 따뜻하고 가볍고 싱그러운 봄. 나는 봄이 참 좋다.
봄은 울림이 있는 계절이다. 맑고 푸른 신록이 그려지는 계절이다. 겨우내 봄을 기다리며 읽었던, 나의 마음을 달래주던 울림이 있는 책들을 소개해보고 싶다.
01. 언어의 온도 / 이기주
‘언어’란 그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생각, 문화, 가치관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가장 부드러우면서 강한 기호다. 언어란 사람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규정짓고 이해하는 데 가장 처음 사용하는 기호이며 우리의 의식 속에 아무도 모르게 천천히 녹아 들어있는 산물이다. 그래서 언어가 가지는 힘은, 상상 이상으로 굉장하다. 우리는 말에 상처받고 말로 치유 받는다. 내가 한 달 가까이 되는 여행길에서 유일하게 지니고 다녔던 이 책은 그런 말의 힘을 아주 담담하게 전해준다.
우리가 미처 의식하지 못하고 사용하던 단어들, 무심히 스쳐 지나가던 일상의 언어에서 따뜻함과 울림을 잡아낸다. 사람과 사랑에 대해, 사람과 삶에 대해, 사랑과 삶에 대해 고민해 본 적이 있던가. 다른 듯 묘하게 닮은 이 단어들을 우리는 곰곰이 곱씹어본 적이 있는가. 이 책은 그런 이야기를 한다. 소소하지만 소중한, 말에 관한 이야기들을 전한다.
저자는 ‘언어마다 각기 다른 온도가 있다’고 이야기한다. 어떤 말은 너무 뜨거워서 정서적 화상(火傷)을 입히고, 또 어떤 말은 얼음처럼 차가워서 그 날카로움으로 누군가를 다치게 한다. 반대로 온기 어린 말은 슬픔을 감싸 안고, 사이다처럼 시원한 말은 기분 좋은 통쾌함을 전해준다. 언어란 소소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중하다. 아니 어쩌면 소소해서 더 소중한 존재일 것이다. 스치듯 무심히 일상의 언어들을 지나치던 사람들이 그 안에 들어 있는 각각의 온도를, 그 따스함을 이 책을 통해 마주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따스함으로 앞으로 다가올 따뜻한 봄을 만끽하길 바란다.
“일상에서 발견한 의미 있는 말과 글, 단어의 어원과 유래, 그런 언어가 지닌 소중함과 절실함을 책에 담았습니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문장과 문장에 호흡을 불어넣으며, 적당히 뜨거운 음식을 먹듯 찬찬히 곱씹어 읽어주세요. 그러면서 각자의 언어 온도를 스스로 되짚어봤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이 책이 그런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여전히 많은 것이 가능합니다.” - 작가의 말 중에서
02. 사서함 110호의 우편물 / 이도우
독일 뮌헨에서 근교로 당일치기를 하던 날, 3명의 동생들을 만났다. 마치 이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처럼 수많은 이야기를 했고 밤을 새워가며 수다를 떨었던 그 날, 우연히 이 책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사랑’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떠들다가 문득 생각난 듯 한 동생이 이 소설을 꼭 읽어보라며 강하게 추천했는데,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을 만나 반가웠다. 설렘이 잔잔히 느껴지는 봄 내음 나는 사랑 이야기. 이 책은 딱 그런 이야기다. 무심결에 주문했던 이 책을 읽다가 얼마나 많은 문장을 따라 썼었는지. 문장 하나하나가 풍부하고 섬세하다. 감성폭풍을 몰고 오는 소설이랄까.
바야흐로 봄은 사랑의 계절이다. 나 같은 솔로들에겐 사랑의 계절이 마냥 긍정적이지만은 않을테지만, 봄 같은 사랑 이야기로 허전한 마음을 달래보는 건 어떨까. 혹시 아는가, 마음에 봄이 오면 봄바람을 타고 사랑도 찾아올는지.
네 사랑이 무사하기를
내 사랑도 무사하니까
…
세상의 모든 사랑이, 무사하기를
*
내 사랑은 발끝으로 살금살금 걸어
내 庭園으로 들어왔네. 허락하지 않아도.
*
매화꽃 아래서 입 맞추겠네.
당신이 수줍어해도, 내가 부끄러워도.
03. 그리고 산이 울렸다 / 할레이드 호세이니
우리는 흔히 삶을 뒤흔들만한 강렬한 것들에 ‘인생’이란 수사를 붙인다. 인생 영화, 인생 음악, 인생 맛집, 인생 소설 등등. 이 소설은 나에겐 일종의 인생 소설이다. 두고 두고 계속 읽게 되는 그런 소설. 그런데, 정말 이상하게도 이 소설에 대해 나는 특정한 감상을 내놓을 없을 때가 많다. 소설에 대한 서평도, 감상도 이상하게 잘 나오지 않는다. 이 소설은 그저 나에게 뭉뚱그려진 질감으로 느낌으로 새겨져있다. 아스라히 져가는 노을 아래서 방울 소리가 울리는 소설이다. 봄바람에 흔들리 풍경 소리가 잔잔히 울려퍼지는 소설이기도 하다. ‘대게 인생을 흔들어 놓을 수 있는 것들이란 구체성이 결여되어있다’고 허지웅 작가가 그랬던 기억이 난다. 이 말을 듣고 나는 비로소 내가 이 소설에 대해 감히 논할 수 없는 이유를 알았다. 이 소설은 방대하다. 크다. 여러 방향에서 나를 두드린다. 그래서 말로 구체화 시킬 수 없었던 것이다.
이 이야기는 어린 시절 헤어진 남매의 그리움을 소재로 만들어진 소설이다. 남매와 이들 주변의 어른들의 시점이 교차하고,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며, 수많은 감정과 이야기들이 조각 조각의 형태로 존재한다. 책을 완독해야 각 등장인물들의 조각이 맞추어 지면서 하나의 큰 그림이 만들어지는 방식이다. 더불어 각 이야기의 울림은 그 깊이와 떨림이 다르며 하나가 되었을 때는 또 새로운 울림을 선사한다. 마치 합창을 하듯이.
위에서 소개한 두 책이 각각 봄의 따스함과 설렘을 연상시킨다면, 이 소설은 겨울을 혹독한 겨울을 견디고 탄생한 새 생명의 깊음을 담고 있다. 여려 보이지만 굳건한 생의 의지를 말이다. 겨울을 아픔을 딛고 새롭게 싹을 틔우는 생명처럼, 소설 속의 주인공들은 현실 아래 억눌린 슬픔과 그리움을 뒤로하고 굳건히 살아간다. 그리고 그 삶은 제 각기 다른 깊이의 울림을 독자에게 전해준다. 봄을 맞아 새로운 시작을 맞이한 이들에게 이 책을 추천해본다.
햇살이 화사한 오후다.
그들은 다시 한 번
어린 아이로 돌아가 있다.
오빠와 동생.
젊고 눈매가 튼튼한 오빠와 동생.
그들은 꽃이 화사하게 핀
사과나무 그늘의 옷자란 풀밭에 누워있다.
그들의 등에 와 다닿는 풀이 따스하다.
햇살이 흐드러진 꽃들 사이로 반짝이며
그들의 얼굴에 와서 닿는다.
한나라 에디터 flqlddkdl@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