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화 속 고양이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
Opinion
메타포(metaphor).
은유를 뜻하는 말로, 숨겨서 비유하는 수사법을 말한다. 다양한 장르의 작품들 속에서 여러 가지 형태의 메타포를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예술가는 자신의 의도를 하나의 대상 속에 녹여 작품을 보다 흥미롭고 완성도 있게 만든다. 간혹 그것은 이름 높은 예술가의 수수께끼처럼 다가오기도, 깨달음을 얻을 만큼의 강렬한 충격을 선사하기도 한다. 그리고 어쩌면 예술가 자신도 모르는, 무의식의 영역이 메타포를 만들어 당시의 상황과 심리를 대변하기도 한다.
말하자면 화가가 별생각 없이 그린 고양이나 아이의 모습에서 화가 자신이 알아차리지 못한 시대의 '상징적 가치'가 나타나기도 한다는 것이다. 요컨대 이렇게 모든 그림은 예상하지 못한 보석이 또르르 굴러 나올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 책 "명화 속 고양이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강력한 무의식의 힘을 믿는다. 사람들은 자신의 의식이 몸과 마음을 지배하고 있다고 믿지만, 의식 건너편의 무의식은 생각보다 큰 힘을 발휘하고, 우리의 생각을 이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생각지도 못한 행동을 이끌기도 한다. 때로는 아주 중요한 결정까지도. 심지어 매우 섬세한 작업이라고 할 수 있는 작화 작업에서도 말이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프란시스코 고야 "마누엘 오소리오 데 수니가의 초상", 1787~1788년경 |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지만, 서양에서 까치는 보통 수다스럽거나 물건을 훔치는 나쁜 이미지로 통한다. 그림 속 아이가 데리고 있는 다리 묶인 까치는 부정적인 이미지인 인간의 욕망을 뜻하고, 순수한 어린 아이가 욕망에 가득 찬 까치의 발을 묶고 있는 것은 화가가 절제의 메시지를 던졌다고 볼 수 있다. '욕망을 경계하라. 사치를 절제하라.'
왼쪽 아래의 고양이들은(잘 보이진 않지만 뒤에 있는 눈만 보이는 고양이까지 합쳐 총 세 마리이다) 욕망을 호시탐탐 노리는 외부의 적을 상징하고, 놀라운 사실은 이 초상화의 주인공인 어린 아이는 이후 여덟 살의 어린 나이에 그만 요절하고 만다.
그 사실을 인지하면 오른쪽 새장에 갇힌 새들 또한 눈을 부릅 뜨고 귀를 한껏 치켜 세운 고양이로부터 안전하지 않아 보이고, 그림 자체의 분위기가 불안하고 섬뜩해 보인다. 이 그림을 그린 화가 고야는 그림을 그릴 때부터 미래에 펼쳐질 사실을 예상하고 있었을까. 그래서인지 이 그림은 어린 아이가 죽은 후 추모의 의미를 담아 그려진 것이라는 추측 또한 존재한다. 그림에 사실적 스토리가 더해지니 화가의 메타포가 더 의미심장해 보인다.
이처럼 그림 속에 담긴 각종 상징들은 당시 시대상과 상황을 반영하고, 그림에 재미와 깊이감을 선사한다. 지금 소개하려는 책 "명화 속 고양이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 에서는 특히 등장하는 많은 메타포 가운데서도 고양이의 존재에 집중한다.
고양이가 그려진 그림을 해석하는 첫 단계는 그림 속 동물이 개나 곰, 호랑이가 아닌 고양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일이다. 또 고양이가 검정고양이인가? 삼색 고양이인가? 줄무늬고양이인가? 하는 품종을 확인하고, 화를 내고 있는가? 잠들려고 하는가? 아양을 떨고 있는가? 하는 상태의 구별이 필요하다.
확실히 고양이는 다른 동물들과는 다른 뭔가 묘한 분위기를 띤다. 사람을 잘 따르는 개와 비교하자면 인간을 가까이하지도 않고, 딱히 주변의 눈치도 보지 않는다. 게다가 과거 명화들이 그려지던 시대에는 고양이가 귀엽고 소중한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었던 것을 반영하면, 세상 만물의 모든 이치를 다 아는 듯, 고고히 앉아 있는 고양이의 존재는 화가들에게 매력 그 이상의 의미로 다가왔을 것이다.
시대가 변하면서 고양이를 바라보는 눈들도 점차 변해 갔다. 시대상에 따라, 또는 그림의 상황에 따라, 화가의 특징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는 고양이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화가가 녹여낸 장치들을 살피며 다시 본 명화들은 분명 또 다른 시각의 세상으로 여러분을 안내할 것이다. 물론 작품은 보는 사람의 시선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고 새로운 의미를 가지며 서로 다른 빛을 낼 뿐, 정확한 정답이나 진리는 없음을 밝힌다. 여러분의 눈과 마음이 진정한 해설지이다.
고양이; 불운을 상징하는 매개체
지금의 고양이들은 흔히 '집사'라고 불리는 애묘인들이 모시고 사는, 정말 사랑스러운 반려 동물이자 가족의 존재이지만, 당시에는 악마의 심부름꾼이라고 불리던 시대가 있었다. 쉽게 상상이 가지 않는 시대이다. 그때의 시대상을 반영한 채 그림들을 해석하자면, 고양이는 보다 무섭고 교활한 이미지를 띤다. 물론 화가 본인의 성향과 고양이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도 그 해석에 더해진다.
윌리엄 호가스 "그레이엄가의 아이들", 1742년 |
이 그림을 그린 호가스는 본래 18세기 영국의 비참하고 참담한 모습을 적나라하게 그리는 판화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런 화가의 성향과는 다르게 그림 속 아이들은 행복해 보인다. 표정만 봤을 때는 말이다. 책에서는 왼쪽 괘종시계 위, 긴 창을 들고 있는 큐피드의 모습과 오른쪽 위 무서운 얼굴을 하고 있는 고양이의 모습에 집중한다.
먼저 왼쪽 구석의 큐피드를 살펴보자면, 일반적으로 사랑을 전하는 금빛 화살과 활을 든 큐피드와는 확연히 다르다. 전통적으로 긴 창은 죽음의 신을 상징한다. 이 행복한 얼굴을 한 네 아이의 곁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다. 그리고 고양이를 살펴보면, 탐욕스러운 표정으로 새장 속 작은 새를 주시하고 있다. 이 새도 곧 고양이의 먹이가 될 운명이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누나의 손을 잡고 있는 왼쪽의 어린아이는 그림이 완성되기도 전에 이미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게다가 호가스는 자화상에도 강아지를 그릴 만큼 대단한 애견가였다고 한다. 그런 그이기에, 고양이를 죽음의 그림자를 상징하는 매개체로 둔 것 또한 이해가 간다. 그림을 처음 마주했을 때는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노랫소리가 들릴 것만 같지만, 긴 창을 든 큐피드의 모형을 보니 고양이의 표정이 더 이상 귀엽게 보이지만은 않는다.
야코포 바사노 "최후의 만찬", 1546년경 |
수많은 <최후의 만찬> 그림이 있지만, 이 그림은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최후의 만찬>보다 60년 먼저 그려졌다. 그리스도가 예루살렘에 입성하기 전,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즐기며 유다의 배신을 밝히는 장면으로, 아마 그림 속 유다는 오른쪽 황색 옷을 입은 옆 모습의 사내일 것이다. 그리스도의 말을 듣고 얼어붙은 듯한 표정과 몸짓을 하고 있다. 그리고 책에서는 오른쪽 맨 아래 구석에 잔뜩 화가 난 고양이에 주목한다.
중세 시대에 고양이는 마녀의 심부름꾼으로 불리며 화형을 당하는 등,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였다. 지금 그림 속으로 걸어가고 있는 환영받지 못한 고양이는 유다의 배신이라는 불운을 상징한다. 가운데에 몸을 말고 편하게 누워있는 개와는 대조적인 모습이다. 편하게 잠이 든 개는 다른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전체적으로는 유다와 그리스도, 그리고 다른 제자들의 긴장 상황을 그렸지만, 대조되는 개와 고양이의 모습을 그리며 그 분위기를 더 극대화시킨다. 고전 명화 곳곳에 동물들이 많이 그려진 이유를 조금은 가늠할 수 있을 것도 같다.
도메니코 기를란다요 "최후의 만찬", 1486년경 |
그리고 또 다른 <최후의 만찬>이다. 기를란다요가 그린 이 <최후의 만찬>에도 가운데 혼자 앉아 있는 유다의 옆에 자리 한 고양이 한 마리가 보인다. 가까이서 확인해보면 이 고양이는 꼿꼿한 자세를 유지한 채 정면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다. 옆에 꼿꼿히 허리를 핀 채 앉아 있는 유다의 모습과 닮아있다. 여기서 이 고양이는 불운을 암시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고양이의 표정이 당당하고 꽤나 눈에 띄는 곳에 앉아 그 씩씩함을 과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유다의 당당함을 대변하는 매개체가 아닐까 싶다. 책에서는 유다가 그리스도를 미워해서 배반한 것이 아니라, 다른 제자들을 향한 질투의 마음이 배신으로 이어졌다고 설명한다. 인간에게 충성한다고 보기는 어려울 정도로 도도한 고양이지만, 그들 또한 사랑을 원한다. 이와 같은 고양이의 성향에 유다의 마음을 투영시켰다고 보면 어떨까.
신화 속 고양이의 모습
이 책에 소개된 명화들 사이에서는 그리스 신화 이야기가 간간이 등장한다. 어릴 적 읽었던 만화로 된 <그리스 로마 신화>를 떠올리면 실제 명화들이 자료 사진으로 첨부되어 있었다. 당시에는 그냥 그렇구나, 하고 넘길 만큼 그림 만화에 더 집중하던 나이였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 사진들이 세계적으로 이름을 날린 화가들이 그린 유명한 작품이었다. 지금 소개할 명화들 또한 <비너스의 탄생>만큼은 아니지만, 누구나 옛 기억을 더듬으며 추억할 수 있을 정도로 흥미로운 신화의 장면들을 담았다.
핀투리키오 "페넬로페와 구혼자들", 1509년 |
오디세우스가 트로이 전쟁이 끝나고 집에 돌아오는 여정은 트로이 전쟁의 대서사시 못지않게 험난하다. 오디세우스가 집에 돌아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동안, 그의 아내 페넬로페는 수많은 구혼자들의 구혼을 견디며 하루하루를 버틴다. 그러다 생각해 낸 방법이 천을 다 짜낸 그 날, 구혼자들의 구혼을 받아주겠다는 약속을 하는 것이다. 그후 페넬로페는 구혼자들이 집에서 술과 음식을 축내는 동안, 낮에는 천을 짜고 밤에는 실을 풀며 천 짜기의 완성을 늦춘다.
그림 속 장면은 오디세우스의 배가 창문 너머 보이고, 페넬로페의 방에 구혼자들이 몰려 왔다. 그림의 중앙 하단을 보면 고양이가 구혼자들을 등 지고 떡 하니 앉아 있다. 아마 오디세우스가 없는 집에 들이 닥친 구혼자들의 존재는 페넬로페에게 여러 마리의 쥐와 같았을 것이다. 실뭉치를 가지고 노는 고양이는 비교적 눈에 잘 띄는 위치에 자리하고 있고, 온화한 표정을 보니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몰려 들어 오는 구혼자들과 페넬로페의 사이에 위치해, 마치 그들로부터 페넬로페를 보호하는 느낌을 준다. 성가신 그들을 상대하는 페넬로페의 마음을 효과적으로 나타내고자 했다면, 중앙 하단에 위치한 고양이의 존재는 적절해 보인다.
디에고 벨라스케스 "아라크네 신화", 1657년 |
아라크네는 인간 중 베 짜기에 가장 능한 인물로, 그의 솜씨는 여신 아테네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다고 늘 자신만만해한다. 그에 노한 아테네는 노인으로 변장해 아라크네에게 충고하지만 아라크네는 이를 귀담아듣지 않고, 결국 아테네 여신과 함께 베 짜기 대결을 하게 된다. 둘의 작품 모두 아름다웠지만, 아라크네는 신들을 조롱하는 그림으로 직물을 짜고, 이에 노한 아테네는 아라크네를 거미로 만들어 평생 실을 짜게 만든다.
그림 속 모습은 노인으로 변신한 아테네와 직물을 짜는 아라크네의 모습이다. 그리고 왼쪽 아테네의 다리 밑에는 고양이 한 마리가 몸을 숙인 채 아라크네 쪽을 바라보고 있다. 아테네에게 바싹 앉아 아라크네를 관찰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이 고양이가 아테네의 고양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고양이는 거미와 같은 벌레들을 잡아먹는다. 결국 아라크네는 거미가 되고, 아테네를 영영 이길 수 없는 미래를 예측하게 만듦과 동시에, 긴장되는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가만히 앉아 날카로운 눈빛으로 아라크네, 즉 거미를 바라보는 매개체로써 고양이보다 더 좋은 동물은 없을 것이다.
명화 속 고양이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
에두아르 마네 "올랭피아", 1863년 |
마네가 그린 이 그림은 공개 당시 많은 비난을 받았다. 이 작품에는 두 가지의 당시 사람들이 꺼려 하던 금기가 담겨 있다. 첫 번째, 당시 파리 인구가 200만 명이던 시절, 매춘부의 인구는 12만 명까지 오른다. 당시 사람들이 감추고 싶어하던 현실인 매춘부를 매우 당당하게 그린 점과, 미국 남부로 향하는 노예선을 타고 아프리카에서 프랑스로 건너 온 흑인 노예의 모습을 그렸다는 점이다. 두 가지 모두 가릴 수 없는 사실이지만, 당시 시민들은 그 사실을 감추고 싶어 했다.
화면 맨 오른쪽 발치에 검은 고양이가 꼬리를 세우고 있다. 고양이를 경계로 윗 여성은 커다란 꽃다발을 들고 있고, 왼쪽의 여성, 아마도 올랭피아는 그것을 거들떠도 보지 않고 있다. 검은 고양이의 경계된 모습과 표정은 올랭피아의 심리를 대변한다. 꽃다발을 선사한 인물에 대한 마지막 거절의 표시이다. 도도한 검은 고양이의 모습이 그것을 더 완전하게 만들어준다. 아마도 고양이는 이미 알고 있다고 말하는 것 같다. 올랭피아가 거절하리라는 것을.
이 책의 제목과 잘 어울리는 그림과 설명이다. 그림 속 고양이들은 마치 그림 속 상황을 전부 다 이해함과 동시에 미래까지 예견할만한 능력을 갖추고 있어 보인다. 그들의 여유로운 몸짓과 행동이 그것을 대변해준다.
고양이를 상대로 한 메타포의 해설과 그림 속에 담긴 이야기들을 살펴보았다. 그저 귀엽고 아름다운 고양이라는, 현재의 시대상을 투영시켜 바라보았던 처음의 느낌과는 또 다른 느낌의 명화들을 마주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덧붙이고 싶은 말은, 앞서 말했다시피 그림의 해석은 개개인의 생각과 경험에 비추어 새롭게 탄생할 수 있고, 그렇게 만들어진 자신만의 감상은 누구의 것보다 값지고 소중하다. 명화 속 이야기와 고양이의 시대상을 반영한 흥미로운 해설도 좋지만, 각자의 시선과 가치관이 담긴 해설을 오답 처리할 이유는 전혀 없어 보인다. 예술에는 정답도, 오답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 해설 또한 그저 하나의 의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신만의 감상에 자신감을 갖고 애정을 갖는다면, 어려웠던 작품들은 스스로 빛을 발하고, 그 자체로써 예술은 더욱더 아름다운 빛을 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이 아마 예술의 존재 이유일 것이다.
김소현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