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들어진 괴물, 그 분노의 서(書)
『프랑켄슈타인』 타고 메리 셸리와 항해하기
사회가 만들어낸 ‘괴물’
“… 주인은 언제나 꼬리를 흔들며 다가오는 강아지만 좋아했다. 당나귀는 그 모습을 보고 강아지처럼 주인에게 안기려 껑충껑충 뛰다가 그만 발로 주인을 차고 말았다. 화가 난 주인은 당나귀를 매질하고, 구유에 묶어두었다.” - 이솝 우화 <당나귀와 강아지 이야기> 중
어릴 때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동생 흉내를 내면 엄마가 종종 들려주던 이야기다. 자신의 위치에 맞는 행동을 해야 한다는 교훈을 전해주려는 의도였겠지만 어린 마음에 들었던 억울함과 분노는 아직도 기억될 정도로 인상 깊다. 같은 행동을 해도 ‘첫째’라는 이유로 꾸지람을 들어야 했던 어린 나처럼 이 책에서 역시 같은 행동을 해도 사랑받지 못하는 한 괴물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괴물은 이름도 없이 태어나자마자 그를 만든 프랑켄슈타인에게 버림받는다. 이름 없는 그 괴물은 자라서 사람을 죽이는 ‘진짜 괴물’이 된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가 괴물이었느냐 하면 그건 아니다. 그는 다른 대다수의 사람들처럼 온정을 원하고 가난한 이들에게 몰래 먹을 것을 선물할 정도로 따듯한 마음을 가진 존재였다. 그러나 그 선의의 끝에 돌아오는 것은 온갖 구박과 구타였다. 마치 당나귀가 그러했듯이. 그가 겪는 상세한 아픔들은 모든 차별받는 존재들을 대변해주는 듯 너무도 사실적이고 심지어는 일상적이다. 여러 이유로 오늘날 사회적 약자가 된 이들-가난 때문에, 여자라는 이유로, 몸이 불편해서, 못생겨서 등- 역시 이 책의 괴물처럼 아무리 손을 내밀어도 외면당하고 괴롭힘 당한다.
많은 이들이 괴물의 이름을 '프랑켄슈타인'으로 알고 있는데 소설 속 괴물은 이름조차 없다. '프랑켄슈타인'은 다름 아닌 그를 만든 과학자의 이름이다. |
그러나 대다수의 사회적 약자들의 이야기는 이솝우화처럼 끝나버리지만 우리의 괴물은 그렇지 않다. 그는 복수한다. 자신의 주인, 창조자, 아버지이자 어머니인 프랑켄슈타인에게. 그의 연쇄살인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지만, 만약 그가 따뜻한 사회에서 자랐다면 결과가 완전히 달라지지 않았을까 라는 의문은 분명 우리에게 큰 시사점을 준다. 그런 의미에서 괴물의 한마디가 오래도록 남는다. “나는 불행하기 때문에 사악하다. (… 중략…) 인간이 나를 경멸로 대하는데 무엇 때문에 내가 인간을 존중해야 하는가?”
성찰 없는 과학의 말로, ‘프랑켄슈타인 빅토르’
그렇다면 빅토르는 완전한 가해자인가, 들여다보면 그렇지도 않다. 사실 괴물의 입장도 이해가 가지만 그보다 빅토르에게 더 연민이 들 수도 있을 것이다. 자신의 지적 오만-사실은 전 인류에게 공헌할 의도로 진행했던 실험- 때문에 빚어진 한 순간의 실수로 모든 소중한 것을 잃게 되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과학 실험들에서도 비슷한 양상을 확인할 수 있다. 수많은 실험들은 인류의 편의에 기여하는 대신 환경파괴라는 거대한 괴물과 같은 문제들을 낳았다. 의도와 다른 결과를 초래한 과학실험의 사례들을 고려할 때 과연 빅토르를 두고 ‘악을 행했다’고 판단할 수 있을 것인가?
물론 중간 과정에 있어 그가 자신의 피조물을 돌보지 않았던 것은 분명 무책임한 일이다. 그 행위를 무책임한 부모에 비유한다면 빅토르는 비난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그것을 의도와 다른 결과를 초래한 실험에 국한시켜놓고 보았을 때, 그의 행위는 비난받아야 하는 것일까? 애매하다. 분명 그의 의도는 선했다. 그러나 이는 작은 성찰의 결여도 크나큰 비극을 낳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선한 의도로 시작한 일도 끊임없는 성찰과 조심성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불행을 초래할 수도 있다. 특히나 그것이 작은 실수로도 인류의 미래를 위협할 수 있는 과학이나 기술발전에 있어서는 더더욱 말이다.
메리 셸리의 분신들
처음에 이 소설을 쓴 작가가 다름 아닌 여자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 조금 놀랐었다. 아마 그 시대에 여성작가가 글을 쓴다는 것이 금기시되어 있었고, 또 더군다나 이렇게 괴이한 스토리를 연약한 여자가 쓰기 어려울 것이라는 잘못된 선입견 때문이었으리라. 충격에 작가의 생애를 조금 알아보고 작품을 읽으니, 이 책의 괴물과 프랑켄슈타인 박사 모두가 그녀의 분신처럼 느껴졌다.
그녀의 삶에는 어린 나이부터 유독 많은 죽음이 함께 했다고 한다. 어릴 적 돌아가셨던 어머니, 운명처럼 만난 남자(유부남)의 아내의 자살, 첫 딸의 죽음, 의붓 언니의 죽음, 첫 아이 이후 낳은 두 아이들의 죽음…. 남편 퍼시 셸리와 문인 바이런의 격려로 이 작품 프랑켄슈타인을 출간하고 명성을 얻지만 결국 몇 해 안 되어 남편까지 떠나보내고 만다.
작품에서 프랑켄슈타인은 끊임없는 죄의식-자신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모두 떠났다는 생각-에 시달리는데 그 모습에서 메리 셸리의 자화상이 보이는 것 같다. 나 역시 소중한 사람이 아플 때, 그 모든 것이 내 탓이라는 말도 안 되는 죄의식으로 힘겨워했던 적이 있었기에, 그녀가 자신의 잘못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시달리는 죄책감들을 어쩌면 프랑켄슈타인 박사를 창조하며 위로받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작품 속 ‘괴물’ 역시 어쩌면 여성이라는 이유로 소외되던 자신을 그린 것이 아닐까 추측해봤는데 왜냐하면 처음 작품들을 출간할 때 그녀는 남성 작가의 이름으로 자신의 작품을 내곤 하였기 때문이다. 아마도 세상에 손 내밀었을 때에 매질을 당할까 두려웠을 것이다. 이름 없는 자신의 모습을 투영한 괴물을 통해 자신을 포함한 당시 모든 여성, 약자들을 대변하고 고발하고픈 심리가 담겨있었으리라.
세상의 ‘월턴 선장’들에게 던지는 메시지
작품은 총 3겹의 액자로 되어있는데 처음 월턴의 편지로 구성되어 있고, 다음은 빅토르의 이야기, 그리고 괴물의 이야기, 다시 빅토르의 이야기, 그리고 마지막은 처음으로 돌아가서 월턴의 이야기로 마무리된다. 이러한 구성은 독자들을 각 이야기의 주인공에 이입할 수 있게 하는데 그래서 우리는 괴물에게도, 프랑켄슈타인에게도 연민의 감정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월턴선장은 주인공이라기보다 우리와 같이 이야기를 듣는 독자이다. 만약 월턴 선장이(혹은 우리가) 신문 헤드라인 -‘박사 프랑켄슈타인, 복제인간 만들어놓고 도망… 복제인간에 일가족 살해당해’-으로 그 둘의 이야기를 접했다면 그 둘 어느 입장에도 깊은 연민을 가지기 어려웠을 것이다. 혹은 쉽게 판단하고 비난했으리라. 그러나 이런 액자식 구성으로 작가는 독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입장에 흠뻑 빠져들게 하고 있다.
빅토르와 괴물의 이야기에 깊이 감명받은 월턴 선장은 결국 항해를 강행하던 자신의 오만을 뉘우치며 배를 돌린다. 만약 메리 셸리가 살아 있었다면 분명 궁금해할 것이다. 월턴 선장이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종국에는 자신의 배를 돌린 것처럼 과연 우리들은 프랑켄슈타인의 이야기를 듣고 어떤 감회를 안고 항해를 할지.
이강현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