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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루 밑 아리에티'를 더 의미있게 감상하게 해 줄 두 가지 Point

지브리 스튜디오의 <마루 밑 아리에티>는 지브리의 다양한 명작들 중에서 대중들에게 그리 손꼽히는 작품은 아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들이 워낙 압도적인 탓인지, 타작들에 비해 심심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물론 소인족이 주인공이라는 점에서 판타지적 요소가 있긴 하지만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하울의 움직이는 성> 등에 비하면 여러모로 임팩트가 약한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 심심함을 예상하고 <마루 밑 아리에티>를 관람한 필자에게 이 작품은 깊게 생각할 거리 하나와 괴이한 충격 하나를 안겨주었다. 이 영화가 심심하게 느껴졌다면 아래의 두 가지 포인트에 좀 더 집중해보도록 하자.

1. <마루 밑 아리에티>의 영문 원제, 'Borrowers'

영화 속 소인족 '아리에티'의 가족은 도시 외곽의 조용한 마을, 한 저택의 마루 밑에서 살아가고 있다. 인간의 손으로 한 뼘조차 되지 않는 그들에게 인간 세상은 온통 위험한 것들 투성이다. 하지만 그들은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종종 인간이 살고 있는 저택 안으로 들어가야만 한다. 바로 그들이 삶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물건들을 인간들에게 '빌리기' 위해서이다.


여기서 한가지 의문이 들게 된다. 빌린다는 것은 빌려주는 이의 동의를 전제로 하는 것이 아닌가? 그들은 역설적이게도 인간 '몰래' 물건을 빌려야만 한다고 말한다. 이 대목에서 생각해 볼 것은 '관점'이다. 만약 이 상황을 인간의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소인족은 인간의 물건을 빌리는 것이 아니라 동의없이 '훔쳐'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소인족의 관점에서, 인간의 세계는 소인족으로 하여금 그들이 살아감에 필요한 물건들을 스스로 구할 방법을 허용하지 않았다. 만약 태초부터 함께했다면, 인간은 일찍이부터 소인족을 고려한 방식으로 그들과 공존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인간' 세상은 소인족의 존재를 부정함으로써 인간만을 위한 방식으로 발전해왔다. 사실 그 곳에서 소인족의 '빌림'은 필연적이었던 것이다.


이 영화의 영문 원제가 Borrowers, '빌리는 자들'이라는 것을 고려해본다면 감독 역시 이 부분에 꽤나 중점을 두고 연출했다고 유추해볼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을 또 다르게 생각해본다면, 어쩌면 소인족들 뿐만 아니라 우리 인간들조차도 이 세상에서 모든 것들을 빌리고 살고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를테면 노동을 하고 화폐를 얻어 응당의 값을 지불해 무언가 얻었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내가 얻은 물건이 진정으로 '내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노동을 하고 댓가를 얻는다는 것, 화폐라는 것이 존재하고 그것을 물건으로 바꿀 수 있다는 것, 우리에게는 당연해보이는 이 일들은 사실 모두 인간이 만들어낸 제도이자 관념일 뿐이다.


그 일련의 과정들을 통해 우리는 이 삶을 영위하고 있지만 과연 그렇게 취득한 것들을 진정으로 '내 몫'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그것은 고민해봐야 하는 것이다. 우리 역시 모두 빌리는 자들이기에 타자의 빌림을 당당하게 탓할 수 없다고, 우리의 이기심에 대한 숨은 전제를 감독은 꼬집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2. '소인족'을 '나와 다른 존재'로 바꾸어 본다면,

영화 속에서 본격적인 사건은 저택의 가정부 아주머니가 아리에티의 기척을 알게되면서부터 시작된다. 이 인물의 몸짓이나 표정 등이 매우 우스꽝스러운 형태로 묘사된다는 점에서 선악의 구도는 무척 명확하다고 할 수 있다.


가정부는 무려 '호기심'을 근거로 집 안에서 소인족들의 흔적을 좇기 시작한다. 그러다 기어코 창고 아래에서 소인족의 집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 때 가정부의 행동은 그야말로 괴기스럽다.

지붕을 들어 아리에티의 엄마를 한참 바라보다 샐쭉히 웃으며 말한다 . "드디어 찾았다!"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도망가는 그녀를 벌레잡듯 한 손에 집어올리고선 높은 유리병에 가두어버린다. 랩까지 씌어 숨구멍을 두어개 뚫어주고선 절대 도망갈 수 없는 높이의 찬장에 올려둔다. 너무나 폭력적인 행태에 계속 보기가 힘들만큼 숨이 막혔다.


결국 아리에티가 그녀를 구출하면서 상황은 해결되지만, 기이하게 묘사된 가정부의 이러한 행동은 사실 낯설지 않다. 어린시절 '호기심'이라는 미명 아래 곤충을 '가지고' 놀던 기억들이 우리 모두에게 있지 않은가. 그들 역시 살아있다는 사실을 아주 잘 알면서 말이다.


한편 좀 더 나아가서는, 영화 속 소인족에 대한 가정부 혹은 그를 비롯한 인간세상의 태도 전반이 우리가 '나와 다른 존재'를 대하는 태도와도 닮은 구석이 있다. 신체장애인이나 발달장애인, 이주민이나 성소수자 등 모든 사회적 약자들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일 것이다.


영화 속 가정부만큼이나 눈에 띄게 폭력을 가하는 이들은 다수가 아니라 할지라도, 우리는 종종 주류를 위한 무대를 설계해두고 약자들에게 왜 올라서지 못하느냐고 다그친다. 신체장애인의 상황을 예로 들어본다면 지하철역에서 승강기를 한참 찾아야 하고, 장애인 리프트는 사고가 나고, 수많은 상가와 편의시설의 입구에는 뻔뻔히 계단이 버티고 있는 세상에서 그들은 살아가야만 하는 것이다.


이 예시는 흔히 '장애인 이동권'이라는 단어로 압축되지만 당사자 개인들이 마주하는 문제는 세상으로부터 '존재를 인정받는 것'의 문제이리라 생각된다. '아리에티'에게 인간의 부엌이 두려움을 유발하는 공간이었듯이, 사회적 약자들에게 이 사회는 주류의 시선으로 만들어진 폭력적인 공간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영화의 끝자락, 아리에티네 가족은 결국 더 안전한 곳을 찾아 인간사회를 떠나는 방법을 택하게 된다. 새로운 삶을 준비하는 것으로 묘사되기에 그 비극성은 간과되기 쉽지만, 인간사회의 측면에서 다양성을 존중하지 못하고 기어코 '다른 존재'들을 떠나보낸 것은 크나큰 비극이 아닐 수 없다. 그 사회의 구성원들이 좀 더 다양한 모습 그대로 존중받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비극의 결말을 우리 사회로 가져오지 않는 방법은 생각보다 무척 쉽다. 그저, 그 사람의 입장에서 한 번 더 생각해보는 것. 아주 쉽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잘 하지 못하는 것. 이 방법으로 우리는 우리 사회 속 다양한 '아리에티'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컬쳐리스트 강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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