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르시시스트들의 변명에 대한 가차없는 비판, 한병철의 「에로스의 종말」
정말 즐겁게 읽었던 철학 에세이 한권을 소개하고자 한다. 「피로사회」의 저자로 유명한 한병철의 사랑에 관한 종말론, 「에로스의 종말」이다. 시집 한권 사이즈의 얇은 책이지만 내용만은 깊고 두껍다. 현대사회, 세속화된 자본주의 세계 속에서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막연하게 품고만 있던 생각들을 정리해주는 책이었다. 모호하고 관념적인 용어들이 많아서 그냥 술술 읽히는 글은 아니지만 이분법적인 구조로 이야기를 끌어나가기 때문에 의도를 파악하는 것이 어렵지만은 않다. 긍정과 부정, 에로스와 나르시시즘, 동질성과 이질성 등등의 몇 가지의 축을 눈여겨보며 의식을 맡기면 된다.
그는 ‘에로스’를 강한 의미의 타자, 즉 나의 지배 영역에 포섭되지 않는 타자를 향한 것이라고 정의한다. 타자는 언어를 뒤흔드는 것이며, 그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모든 수식어는 틀리고, 고통스러우며, 서투르고, 민망하다. 그러나 그러한 부정성의 타자에 대한 사랑, 진정한 에로스는 현대의 소비사회에서 용인되지 않는 것이다. 현대 사회는 끊임없이 모든 것을 모든 것과 비교해가며 동질성을 갖도록 평준화시키기 때문이다. 타자성과 부정성을 제거하고 소비 가능한 형태로 다듬는 것에 주력한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의 사랑은 나르시시즘적이다. 이때의 나르시시즘은 자기애가 아니다. 자기애를 지닌 주체는 오히려 자기 자신을 위해 타자를 배제하는 부정적 경계선을 그을 줄 안다. 반면 나르시시즘적 주체는 명확한 자신의 경계를 확정하지 못해 타자와의 사이에 경계를 짓지 못하고 흐릿할 뿐이다. 그러한 자는 타자의 타자성을 인식하고 인정할 줄 모른다. 나르시시스트는 그저 어떤 형태의 ‘성공’을 거머쥐어 타자를 성취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확인하려고 할 뿐, 타자를 주체 에고의 거울로 사용할 뿐이다. 그러나 에로스는 타자를 타자로서 경험하게 하는 무언가다. 에로스를 통해 자발적인 자기 부정, 자기 비움의 과정이 시작되는 것이다. 즉, 진정한 에로스는 주체 자신의 업적이 아닌 타자의 선물이라고 할 수 있다.
내면을 잃고, 경계를 벗어나 깨끗이 비워진 상태로 아토포스적 외부 속으로 들어간다. 이러한 파국적 사건, 외부의 침입, 완전히 다른 자의 침입은 자신에게서 벗어나는 사건, 자신의 지양이자 비움, 즉 죽음의 과정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재앙은 어마어마한 기쁨을, 부재의 행복을 안겨준다. 여기에 바로 재앙의 변증법이 있다. 파국적 재난은 뜻하지 않게 구원으로 역전된다. - p. 28
또 하나의 중요한 개념이 있다. ‘할 수 있을 수 없음’. 성과 중심의 사회는 ‘해야한다’는 당위성을 동원하는 것이 아닌 ‘할 수 있다’는 긍정의 지배로 돌아간다. 착취를 위해서는 동기 부여, 자발성, 자기 주도적 프로젝트를 부르짖는 것이 더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그 속의 주체들은 명령에서는 자유로울 수는 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자발적으로 착취하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지배 없이 착취당하는 것과 다름없다. ‘넌 할 수 있다’는 구호는 그런 식으로 엄청난 강제를 낳지만 강제를 강제라고 인식하는 데에 실패하도록 한다. 좌절은 결국 자신의 잘못이며 실패에 대한 책임을 물을 사람은 그 자신 외에는 아무도 없도록 한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할 수 있을 수 없음’은 에로스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할 수 있는 영역을 완전히 벗어난 타자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할 수 있음의 절대화는 타자를 파괴한다. 타자와의 성공적인 관계는 일종의 실패다. 에로스적 의미를, 붙잡을 수 있고 가질 수 있고 알 수 있는 것으로 규정한다면 타자는 더 이상 타자가 아니다. ‘가지다’, ‘알다’, ‘붙잡다’는 모두 할 수 있음의 동의어이기 때문이다. 오늘날과 같은 성과주의의 지배 아래의 사랑은 성애로 변질 될 뿐이다. 섹시함은 증식되어야 하는 자본이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은 이질성이 제거된 타자를 사랑하지 못하고 단지 타자를 성애화 시켜 흥분을 일으키는 대상으로 소비할 뿐이다.
‘근원거리 두기’는 타자가 하나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사물화되는 것을 막아준다. 성적 대상으로서의 타자는 더 이상 ‘너’가 아니다. 그러한 타자와는 어떤 관계도 맺어지지 않는다. 근원거리는 타자를 그의 다름 속으로 놓아주는 그 속으로 멀어지게 하는 초월적인 예의를 창출한다.- p. 42
우리는 오늘날 디지털 미디어에 의지하여 타자를 최대한 가까이 끌어오려고 한다. 그리고 가깝게 만들기 위해 타자와의 거리를 파괴하려 한다. 하지만 이를 통해 우리는 타자에게서 아무것도 얻지 못하게 된다. 거리의 파괴는 타자를 가까이 가져오기는커녕 오히려 타자의 실종으로 귀결된다. 거리는 부정성이기에 속에 긴장을 품고 있다. 반면 거리의 부재는 긍정성이다. 바로 여기에 부정성의 힘이 있다. 오직 긍정적이기만 한 것에는 이처럼 생동하게 하는 힘이 없다.- p. 43
98페이지 밖에 되지 않는 짧은 분량의 책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시대의 에로스가 어떻게 종말을 맞이하게 되었는지 설명하는 데엔 부족함이 없었다. 오히려 풍부했다. 단편 소설과 그림, 시, 영화 등등 예술 작품들을 중간 중간 예시로 들며 설명하기 때문에 심심하지도 않았다. 사실 읽다보면, ‘이미 알고 있는 내용들이군.’하는 생각이 많이 든다. 그러나 한병철 저자의 사랑에 관한 철학, 언어로 표현된 예술적인 관조에 놀라는 부분들이 많다.
나르시시스트들로 포화된 이 시대에 제대로 타자에 빠져들 수 있는 것은 기적에 가깝다. 사랑은 나의 환상과 결혼하기 위한 기분 좋은 계약이 아니다. 타자에 관한 실존적, 근원적 경험이며 다른 것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유일한 경험이기도 하다. 책을 읽고 나면 망망대해에 홀로 떠있는 기분이 든다. 약간은 외롭고 무거운 감정. 그러나 읽고 난 사람들은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고도의 지적 탐색만이 나와 타자라는 세계를 인식할 수 있는, 타자를 자유롭게 놓아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김해서 기자 pinkypuppy@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