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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에는 사람이 묻어 나온다

나를 표현하는 글쓰기에 관하여

 

글을 읽다 보면 종종 작가가 어떤 사람인지 짐작해볼 때가 있다. 작가의 문체, 주인공의 가치관, 등장인물의 설정 등을 찬찬히 살펴보다 보면 이 글을 쓴 작가는 이런 사람이지 않을까 하는 어림짐작으로 글 쓴 사람의 형태를 마음속으로 그려보는 것이다. 누군가 무엇인가를 창조할 때는 필수불가결하게도 그 사람의 삶의 경험과 성격이 묻어나오기 마련이기에, 글에는 한 사람의 많은 것이 투영되곤 한다.

글에는 사람이 묻어 나온다

가끔 작년 여름에 들었던 전공 수업에서의 일이 떠오른다. 언론을 전공하게 된 나는 대학에 들어온 후 글 쓸 일이 많아졌다. 수업에서 교수님들이 내주시는 과제 중 상당수가 글쓰기 과제였고, 기자단으로 활동했을 때나 이렇게 글을 기고하는 현재까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꽤 많은 글을 작성했다. 그러나 작년의 나는 갓 새내기 딱지를 뗀 21살의 어린 대학생이라(물론 지금도 어리지만) 글을 쓸 때마다 어려움을 겪고는 했다. 특히 대놓고 글쓰기 수업이었던 전공 강의를 계절학기로 수강하게 되면서 짧은 글쓰기 인생에 큰 위기가 닥쳤는데, 교수님이 내주신 자기소개서 과제였다.

 

자기소개서? 사실 소설이나 시도 아니고, 자기소개서는 살면서 누구나 수없이 쓰게 되는 글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대학 입시를 준비하면서 나 또한 상당한 시간을 쏟아 자기소개서를 쓴 경력도 있었다. 이름, 나이, 취미, 특기, 가족관계, 장래희망 등등 너무도 쉽게 따라 할 수 있는 규격화된 자기소개서의 틀도 존재했지만, 나는 계속 망설였다. 노트북 화면을 열렬히 째려보던 나는 결국 이 모든 것을 담아내기로 했다.

··· 얼마 전 본 뮤지컬 '키다리 아저씨'에서 주인공 제루샤가 난생처음 고아원을 나와 기숙사의 자기 방에서 살게 되었을 때, 편지에 적은 내용을 읊던 대사가 생각난다. "난생처음 제루샤 에봇이라는 아이와 단둘이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었어요. 제가 제루샤를 좋아하게 될 것 같아요"

 

누군가를 잘 알기 위해서는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많은 대화를 해봐야 한다. 자기 자신을 알기 위해서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자신에게 말을 걸어볼 수 있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자신과 자주 시간을 보내면 스스로에 대해 잘 알게 되고, 자신을 잘 아는 것은 자신을 잘 표현하는 것의 기본 전제가 된다. 자신조차 잘 모르는 내용을 누군가에게 말로 설명하기 힘든 것처럼, 스스로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은 자신을 표현하는 데 서투를 수밖에 없다.

 

··· 길게 빙 돌려 이야기했지만, 이 글은 내가 누구인지를 표현하기에는 아직 스스로와 친하지 못하다는 일종의 자기 고백이다. 물론 일반적인 자기소개서의 항목들을 나열하는 방법도 있었겠지만, 나는 그냥 이렇게 쓴다. 글을 쓰는 시간은 본연의 나와 가장 정면으로 마주할 수 있는 시간이다. 항상 함께하므로 가장 친밀하지만, 때로는 가장 낯선 나라는 사람과 대화해 볼 수 있다. 나와 조금 더 친해진 후에 쓴 자기소개서는 어떤 글일지, 생각해본다.

 

(당시 쓴 자기소개서의 일부)

전날 패기 있게 글을 써서 제출한 것 치고, 다음날 강의실에 가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교수님이 질책하시면 어쩌지? 사실 자기소개서라고 하기엔 뭣한 글인데. 하는 생각에 교수님의 반응이 궁금하기도, 두렵기도 했다. 수건돌리기 하듯 바퀴 달린 책걸상으로 원을 만들고 앉은 학생들 사이에서 교수님이 몇몇 학생의 글을 같이 보려고 한다며 해당 글을 쓴 학생들을 지목해 자신의 글을 읽게 시키신 순간, 생각했다. 아, 망했다. 글쓰기에도 아직 자신감이 부족하지만, 발표는 더더욱 두려워하던 나는 제발 난 시키지 말아 달라고 간절히 빌고 또 빌었다. 그러나 신은 언제나 그렇듯 내 편은 아니었다.

 

제목 없이 작성했다가 다른 학생들의 제출물을 보고 제목을 써야 하나보다 하는 생각에 급하게 써서 낸 내 글 '진행 중'을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읽어내려갔다. 서투른 낭독이 끝난 후, 교수님은 이 서툴고 정답을 벗어난 글에 다음과 같은 평을 해주셨다. '자신을 잘 표현하지 못하겠다는 자기 고백이라고 스스로 말했지만,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가장 잘 드러나는 것 같았다'고.

글에는 사람이 묻어 나온다

해주신 좋은 평에도 비록 높은 성적을 받지는 못했지만 나는 그때의 내 글이 참 마음에 든다. '자기'에 대한 글 대신 '자기소개서'에 대한 나의 생각을 적은 글에 가까웠지만, 솔직하고 조심스러우며 생각이 많은 나라는 사람이 온전히 드러났던 글.

 

당시의 경험은 '아, 글이란 그런 것인가 보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가 드러날 수밖에 없구나'하는 일종의 깨달음을 주고 '더 많은 글을 쓰다 보면 나에 대해서도, 내가 느낀 것애 대해서도 더 잘 표현할 수 있게 되겠지'하는 생각을 하게 했다. 장래의 직업과 관계없이 평생에 걸쳐 글 쓰는 사람으로 살고 싶은 지금, 그때를 되돌아보며 더 좋은 글을 쓰고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나의 열망이 커져간다.

 

박찬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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