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식이 동생 광태", 이토록 고통스러운 카타르시스
Opinion
나는 무리에 속해 있으면 불안감을 느끼고 오히려 혼자 있을 때 에너지가 충만한 일명 ‘아싸’다. 이를 인정하지 못했던 새내기 시절, ‘아싸’가 되기 싫어서 꾸역꾸역 과에서 하는 행사에 참여했고, 후회했다. ‘인싸’ 아이들은 서로를 불러대며 여러 명이 앉을 수 있는 긴 테이블에 앉았는데 나는 그 무리에 끼지 못해 4인 테이블로 떨어져 나와야 했다.
'내가 적극적으로 나가면 다인 테이블에 낄 수도 있지 않느냐'고 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에게는 ‘네가 왜 여기에 있느냐’는 식의 시선과 나만 모르는 술자리 이야기를 해대는 것을 견디고 있는 것만큼 고역이 없었다. 인싸와 아싸를 나누는 이 문화는 자꾸만 나를 정상적이지 않은 사람으로 몰고 갔다.
이 고통의 기원은 무려 중학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학교 시절의 나는 정말 찌질함 그 자체였다(표준어는 아니지만, 단어의 맛을 잘 살리기 위해 지질함이 아닌 찌질함으로 표현하려 한다). 내가 정의하는 찌질함이란, 누구보다 주류에 자연스럽게 섞이고 싶어 하면서도 그러지 못하고, 주류인 사람들, 일명 인싸들에게 열등감을 느끼며 어쩔줄 몰라 하는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정도의 차이만 존재할 뿐 나는 여전히 찌질하다. 그때는 그 찌질함이 너무 부끄럽고 싫은 것이었다면, 그래도 지금은 나의 성격으로 받아들이고, 긍정적으로 승화하려 노력하는 중이다.
그 당시의 나는 나 자신이 반에서 존재감 없이 살아가는, 드라마로 치면 학생9 정도인 것 같았다. 주인공에게 말을 건네는 학생 1, 2도 아니고, 흐릿하게 배경으로 깔리는. 다시 말해 내가 내 인생의 주인공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기를 쓰고 나의 존재를 증명하고 싶었다.
알다시피 중학생은 교복을 입고, 복장에 제한이 있어서 개성을 표현할 수 있는 수단은 제한적이다. 예쁘지도 않고, 전교의 모든 사람이 알아볼 만큼의 뭔가를 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결국 남들이 알아볼 만한 상표의 제품을 소비하는 것 이외에는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 시절 내가 주인공이라 느꼈던 이들이 전부 유명 상표의 운동화, 외투를 입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 사면 나도 주류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래서 부모님께 몇 날 며칠을 조르고, 인터넷으로 고르고 골라, 검은 바탕에 형광 노란색의 별이 음각으로 박음질 된 운동화를 샀다.
그런데 그건 정품이 아니었던 것 같다. 당시 학교에서 내가 생각하는 주인공이었던 아이가 운동화를 보고 비웃었던 것 같은 기억이 어렴풋이 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그 사실을 깨닫지는 못했으나 그 이후로도 죽 나는 운동화에 집착했다. <쇼생크탈출>을 보면서 그것이 얼마나 쓸모없는 짓이었는가를 나중에 깨닫게 되었지만 말이다(이 영화는 사실은 쇼생크 감옥을 탈출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이 얼마나 다른 사람의 신발에 신경을 쓰지 않는가에 관한 이야기다).
당연히 내 눈에도 예쁜 것을 고르기는 했지만, 당시 신발을 선택할 때는 반 친구들의 눈에 어떻게 보일지가 더욱 중요했다. 이 글을 쓰려고 기억을 떠올리는 것이 고통스러울 정도로, 나는 그 시절 나의 찌질함이 슬프기도 하고, ‘이불 킥’을 하고 싶은 강한 충동이 든다. <광식이 동생 광태>는 그런 찌질함에 대한 이야기다.
영화 <광식이 동생 광태>는 10년을 넘게 대학 후배에게 마음을 품어왔지만, 타이밍 때문에 고백에 실패하는 광식(고 김주혁 분)과, ‘선수’인 동생 광태(봉태규 분)의 이야기가 교차되며 서술된다. 제목은 <광식이 동생 광태>지만 이 영화를 명작으로 꼽는 사람들은 아마도 광태보다는 광식의 이야기에 더욱 끌렸으리라 추측해본다.
대학교 새내기에게 고백하는 복학생이 어떤 존재인지 알게 된 이상 광식을 마냥 낭만적으로 바라볼 수는 없었지만, 어쨌든 광식의 순수함은 정말 ‘짠내가 난다’고 밖에 표현할 수가 없다. 진짜로 좋아하는 후배에게 밥을 사 주기 위해 과의 모든 후배와 밥을 먹는 등 눈물 나는 노력을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자꾸만 실수하고, 운도 잘 따라 주지 않는다.
영화에서 광식과 광태의 삶의 방식은 사우나의 문을 여는 방식으로 대비된다. 광식은 사람이 아무도 없어도 ‘당기시오’라고 적힌 문은 꼭 당기는 사람이고, 광태는 그냥 밀어버리는 사람이다. 정말 익숙한 장소가 아닌 이상 되도록 문을 당기고, 표현을 못 하고 용기가 없는 사람인 나는 역시 광식에게 공감이 많이 되었다. 그리고 찌질했던 나를 생각하며 이상한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나는 그냥 문을 당기는 사람이었다.
공부를 하고 학교에 다니는 것 이외에 별다른 관심사도 없고, 재미도 없이 살았지만, 그런 점은 절대 ‘아싸’라고 명명하고 부끄러워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남들의 시선을 신경 쓰고 살았던 바로 그 점이 나를 찌질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몇 년이 지나 대학교에 들어왔음에도 중학교 때와 마찬가지로 온 신경을 다른 사람들의 평가에만 집중한 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과거에 머물러 있었다.
사람을 대하는 데 서툴다고 해서 나 자신을 비난할 필요는 없었다. 결과적으로 나는 다른 집단에서는 이전만큼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다. 내가 어떻게 보일지 의식하지 않으면서도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이전에는 내 성격이 답답한 갑옷처럼 느껴지고 싫었다. 처음 본 사람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건네는 사람들이 너무 부러웠다. 그렇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나의 ‘아싸’됨을 인정하고 나서야 사회로 나갈 수 있었다.
영화 속에서 광식은 초지일관 자신을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주변에서는 답답해하지만, 결과적으로 자기 자신도 상처를 받지만, (영화에 나오지는 않았지만) 그런대로 살아갈 것이다. 그냥 그는 그런 사람이다. 나도 ‘아싸’가 되면 죽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내가 그런 사람이라는 걸 인정하고 나니 드디어 내가 내 인생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 시절의 나를 꼭 안아주고 싶다. 생각만큼 사람들은 나에게 신경을 쓰지 않고, 나를 기억하지도 못하는 사람들 때문에 상처받을 필요는 없다고 말하면서.
김채윤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