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에 듣기 좋은 올드 재즈 보컬 3선
크리스마스엔 캐롤이라면 겨울엔 재즈다
원래도 재즈를 좋아하지만, 겨울이 되면 그 어떤 장르보다 재즈를 부쩍 찾게 된다. 특히 올드 재즈가 가진 '무드'를 즐기기에 쌀쌀한 날씨만큼 어울리는 게 없다고 생각한다. 요즘은 음원 사이트에 곡의 분위기와 템포, 장르 별로 목록이 생성되어 있어서, '카페에서 잔잔하게 듣기 좋은 재즈' 같은 주제로 수십 곡을 한 곳에 모아 놓는다. 그 카테고리 하나만 클릭하면 마침 내가 원하던 느낌의 음악들을 주야장천 들을 수 있는 편리한 세상이다. 주변에서 그런 목록을 손쉽게 찾을 수 있는데, 고작 3명의 보컬과 3개의 추천곡만 들고와서 생색을 내는 데에는 나름의 사연이 있다.
편하고 좋은 시절이지만, 누군가가 미리 묶어놓은 목록에 의존하다 보면 개인의 취향이 무뎌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3년 째 혼자 하는 중이다. 열심히 앨범을 찾아듣고, 그중에 좋은 것만 고르고 골라 만들어낸 '나만의 리스트'가 하나씩 있던, 카세트테이프 세대, CD 세대, MP3 세대에서 음원세대로 넘어오기까지 이렇게까지 무방비하게 남의 손으로 받아먹은 적이 있었나 싶기 때문이다. 예전엔 열심히 곡을 모으던 주변 친구들도 부쩍 게을러졌다는 걸 느끼는데 조금 무섭기까지 하다. 좋아하는 음악에 대해 애착을 가지는 촌스러운 옛날 사람이어서 그런가, 예전처럼 이 노래가 왜 좋은지, 이 보컬이 왜 훌륭한지 구구절절 설명하고 싶었다. 그래야 뮤지션에 대한 예의같고, 그래야 노래를 추천하는 사람의 예의같아 마음이 편하다. 음악을 쉽게 구하는 만큼 가볍게 여기는 세상에 반발하는, 이를테면 아날로그식 몸부림이다.
1. 루이 암스트롱(Louis Armstrong) - A Kiss To Build A Dream On
Who's Loius?
루이 암스트롱은 재즈라는 장르에 가장 큰 족적을 남긴 재즈의 아버지다. 천재적인 연주와 천재적인 보컬을 동시에 가진 희대의 천재이며(천재를 세 번 말해도 아깝지 않다), 재즈뿐만 아니라 팝까지 넘나들었다. 트레이드 마크인 익살스러운 무대매너와 특유의 행복한 기운으로 대중들의 큰 사랑을 받았다. 스캣(Scat)이라는 재즈의 창법과 즉흥 솔로 연주(Improvisation)를 창안한 것도 바로 루이 암스트롱이며, 전성기에는 그가 노래하고 연주하는 방식이 곧 재즈로 정의되었다.
1901년, 루이 암스트롱은 미국 남부 뉴올리언스(New Orleans)의 빈민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루이가 태어나기도 전에 가출했고, 매춘부였던 어머니는 가정에 소홀했다. 결국 루이는 5세 때부터(한국 나이로는 7세) 돈벌이에 나섰다. 신문팔이, 석탄 나르기 등 온갖 허드렛일을 하던 어린 루이는 소년원에서 인생의 터닝포인트를 맞게 된다. 열한 살 때 학업을 중단하고 불량서클에 가담한 그는 새해맞이로 인파가 많은 장소에서 하늘을 향해 총을 쏴버린다. 맹랑하게도 폭죽 대신 총을 쏜 것이다. 이로 인해 경찰에 붙잡혀 소년원에 들어가는데 이때 처음으로 트럼펫과 비슷한 '코넷'이란 악기를 접한다. 연주에 뛰어난 재능을 보인 그는 소년원 밴드의 제1 코넷 주자로 활동하고, 18개월 뒤 소년원 생활을 마쳤을 땐 상당한 실력을 갖춘 상태가 되었다. 이때의 경험을 계기로 그는 음악을 업으로 삼는 꿈을 키운다.
온갖 허드렛일을 또 전전하며 코넷을 마련하기 위해 돈을 모으고, 또 온갖 바를 전전하며 무명 악사로 활동한다. 그러다 당시 재즈계의 최고라 칭송받던 킹 올리버의 눈에 들어 그의 보조 밴드로 고용된다. 작은 기회로 눈도장을 찍은 루이는 킹 올리버의 더 큰 밴드의 제1 코넷 주자가 되었고, 정식 멤버로서 첫 레코딩까지 하게 된다. 앨범에서 좋은 평가를 받으며 자신감을 얻자 좀 더 독자적인 활동을 구축한다. 킹 올리버의 그늘에서 벗어나 다른 밴드로 들어가 코넷 대신 트럼펫으로 종목을 바꾸고, 1925년 마침내 솔로로 독립한다.
루이가 완전히 자신의 밴드를 구축하여 낸 앨범은 당시 재즈음악계에서 가히 혁명적인 수준이었다. 그는 단번에 스타로 자리매김했다. 이후 밴드를 다시 해체하고 본인의 오케스트라와 스윙밴드의 재결성을 반복하며 전성기를 구가했다. 연주뿐만 아니라 보컬리스트로서의 기량도 맘껏 뽐내며 1930년대에는 그가 연주하고 노래한 것이 곧 재즈를 정의하는 기준이 되었다. 특유의 맛깔스러운 연주와 노래, 그리고 유쾌한 성격은 대중을 휘어잡아 각종 라디오와 영화에 출연하는 명사가 되었다. 1944년, 흑인 아티스트로는 처음으로 링컨 센터에서 공연도 했다.
1954년 그는 독점 계약 대신 프리랜서를 선언하며 그 어느 때보다 자유로운 협연 앨범들을 발표한다. 그중에서도 3대 재즈 디바로 군림하던 엘라 피츠제럴드와 함께 작업한 앨범은 재즈 팬들에게 큰 선물과도 같다. 둘이 대화하듯 주고받는(전문용어로 '콜앤 리스폰스 Call and Response') 통통 튀는 보컬과 루이 암스트롱의 영향을 짙게 받은 엘라 피츠제럴드의 현란한 스캣이 매력적이다.
비밥의 유행으로 밀려난 스윙의 물결에 잠시 침체기를 겪기도 했던 루이는 1960년대에도 여전한 영향력을 과시한다. 1963년, 브로드웨이 뮤지컬 <헬로 돌리>(Hello Dolly!)의 타이틀곡인 ‘Hello dolly!’로 그 어마어마한 비틀스의 ‘Do you want to know a secret’을 제치고 1위에 등극한다. 노래의 인기는 1964년까지 이어져 1년 내내 5위권을 고수했고, 그래미상까지 안겨주었다.
1968년엔 우리가 익히 들어본 ‘What a wonderful world’를 발표한다. 영국에선 발표 즉시 차트 1위를 차지하고, 미국에서는 1987년 로빈 윌리엄스 주연의 영화 <굿모닝 베트남>에 쓰이며 뒤늦게 주목받는다. 우리에겐 CF 광고에 나오며 대중들에게 친숙해졌다. 끝까지 세상을 향한 아름다운 찬가를 노래했던 그는 1971년 지병으로 영원한 별이 되었다.
Editor's Choice: 'A Kiss To Build A Dream On'
1993년, 멕 라이언 주연의 영화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에 삽입되며 더욱 유명해졌다. 느린 템포의 오케스트라 반주와 루이의 꽉 찬 보컬은 첫 소절만 들어도 감성이 벌써 반쯤 차오른다. 물씬 묻어나는 특유의 행복한 기운은 특히 겨울밤에 따뜻한 차, 혹은 술과 함께 곁들이면 없던 낭만도 샘솟게 만든다. 재즈의 솔로 연주 부분을 지루해 하는 사람들조차 호불호를 잊게 할 만큼 루이의 솔로는 맛깔나는 유쾌함이 있는데, 그게 이 곡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난다. 중간에 나오는 루이의 트럼펫은 클래식의 비브라토와 글리산도 같은 기법을 개성 있게 해석한 특유의 주법이다. 많은 동료와 후배들이 흉내 내고 따라 하던 바로 그 연주인데 역시 원조는 원조다.
2. 니나 시몬(Nina Simone) - I Loves You Porgy
Who's Nina?
본명은 유니스 캐서린 웨이몬. 1933년,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 여섯 자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미국 나이로는 3살, 우리나라 나이로는 4살 때부터 피아노를 연주했다는 피아노 신동이다.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음악 선생님의 전폭적인 지원으로(그녀의 이름을 딴 '유니스 웨이몬 기금'까지 모금했다) 피아노를 계속 배울 수 있었다. 하지만 클래식 피아니스트를 꿈꾸며 지원했던 커티스 음악원에서 오로지 흑인이라는 이유로 거부당한다. 지금이라면 언론이 난리가 날 사건이지만 당시는 그런 흑인차별이 만연한 시절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버클리 음악원에 진학하지만 가정 형편 탓에 술집 바 연주자로 일을 시작한다. 1을 계약하면 2를 요구하는 악덕 사장은 시대를 불문하고 존재하는지, 연주만 하면 될 줄 알고 간 곳에서 노래까지 시켜 부르게 된다. 그런데 이 여자, 피아노는 물론이고 노래도 잘했다. 그렇게 얼떨결에 시작한 것을 계기로 연예계에 입문해 본격적인 앨범 작업에 착수한다. 예명인 Nina('어린 여자') Simone(당대 할리우드에서 유명하던 프랑스 배우 '시몬느 시뇨레'의 '시몬')은 그때 사귀던 남자친구가 지어주었다.
탄탄한 기본기를 가진 그녀는 클래식, 재즈, 오페라, 블루스, 흑인영가, 가스펠, 포크송, 소울 등 다양한 장르에 조예가 깊었다. 거기에 여자로서는 가장 낮은 음역대인 콘트랄토 보이스의 소유자다. 저음은 특히 남자인지 여자인지 헷갈릴 정도로 중성적인 느낌마저 든다. 독특한 목소리에 흑인의 신분으로 핍박받아온 한 서린 감정까지 농후하게 실려있다. 이처럼 좋은 가수의 완벽한 삼박자(기본기, 감성, 목소리)를 가진 그녀가 재즈계의 전설이 된 건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는지도 모른다.
1958년, 그녀 나이 20대 중반에 낸 데뷔 앨범의 성공을 시작으로 어중이떠중이들은 발도 못 들여놓는다는 카네기 홀, 뉴포트 재즈 페스티벌 등지에서 공연하게 된다. 흑인이 무슨 클래식이냐는 조롱과 비난을 듣던 그녀는 가장 흑인 다운 음악과 백인 다운 음악이 결합된 재즈로 돌아왔다. 그리곤 백인들도 우러러보는 영광의 자리에 서서 그녀의 목소리와 피아노 연주를 울려 퍼지게 만들었다.
그녀의 이후 행보는 '사회운동가'라는 수식어가 잘 어울린다. 마틴 루터 킹을 필두로 한 흑인 운동이 한창인 1960년대 이후 그녀는 꾸준히 음악으로 흑인들의 입장을 대변하고 위로한다. 때론 저속하고 적나라하게 분노하고, 때론 절제된 감정으로 비통해하는 노래를 부르며 수많은 저항가요와 사회참여 앨범을 만들어낸다. 그녀는 단순히 시대적 상황에 휩쓸린 한 때의 분노로 끝내지 않고, 그녀 음악 인생의 대부분을 흑인 인권운동에 할애한다. 종내엔 미국이라는 나라와 연예계에 환멸을 느끼며 미국 지식인들이 주로 행하던 '자진 망명'까지 한다. 여러 나라를 전전하다 프랑스에 정착한 후에도 음악 활동을 멈추지 않았으며, 그곳에서 지병으로 향년 70세의 삶을 마무리한다.
칠십 평생 중 자그마치 50년 동안 음악 활동을 하고, 그저 유행과 명성을 위한 음악이 아닌 진정한 음악인으로 의식 있는 소리를 내며 살았다. 80년대까지 활발하게 다양한 주제와 장르로 앨범을 내고, 90년대까지 재즈 페스티벌에 하이라이트로 등장하며 공연을 했다. 이러한 공로를 노후에 인정받아 각종 명예시민, 공로상, 명예박사학위 등을 받으며 그녀는 시대와 인류에 큰 영향을 끼친 위대한 목소리로 남게 되었다.
Editor's Choice: 'I Loves You Porgy'
Loves. 오타가 아니다. 우리에겐 김연아 선수의 밴쿠버 올림픽 프리곡으로 유명한 조지 거쉰의 오페라 <포기 앤 베스>(Porgy and Bess)의 노래 중 하나다. 니나 시몬 특유의 담담하면서 아련한 목소리와 애절한 피아노 솜씨를 버무려 재즈로 재해석했다. 그녀 인생에 있어 대중적인 성공을 거둔 첫 히트곡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노래는 빌리 홀리데이를 비롯한 내로라하는 가수들이 리메이크를 많이 했지만, 개인적으로 니나 시몬의 손을 들어주고 싶다. 피아노 반주 하나에 의지해 전혀 화려할 것 없이 부르지만, 가끔씩 멈추는 목소리의 공백마저 가슴 저리게 만드는 절제된 회한이 녹아있다. 그중에서도 1960년도 라이브 버전을 최고로 꼽는다. 같은 노래도 완전히 똑같이 부른 적이 없어서 여러 라이브를 찾아 듣는 재미가 있는데, 유난히 자주 손이 가는 이 날의 감성은 특히 더 애절하고 아름답다.
3. 줄리 런던(Julie London) - Cry Me A River
Who's Julie?
이번엔 백인 여성 보컬이다. 흑인 전통음악과 백인의 클래식 악기가 결합한 재즈라는 장르의 특성상, 초창기 재즈는 흑인들이 대부분이었다. 재즈의 3대 디바라고 불리는 엘라 피츠제럴드, 사라 본, 빌리 홀리데이 모두 흑인이며, 재즈의 아버지인 루이 암스트롱도 흑인이다. 올드 재즈의 주류는 흑인이 주도권을 꽉 잡고 있는 게 자명한 사실이기는 하나, 줄리 런던이라는 지극히 영국스러운 예명을 가진 미국인 여성을 꼭 소개하고 싶었다. 특히 루이의 짙고 굵은 목소리와, 니나 특유의 목소리에 호불호가 갈린다면, 재즈 초보자들이 입문하기 좋은 것이 바로 줄리의 허스키 보이스다.
1926년,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 태어났다. 희극배우였던 부모님 덕분에 어릴 적부터 라디오에서 종종 노래를 불렀다. 뛰어난 미모로 엘리베이터 걸, 소위 핀업걸로 활동하다가 1944년 영화배우로 연예계에 입문한다. 그녀는 일생 동안 두 번의 결혼을 했는데, 첫 남편과 헤어지고 1954년 두 번째 남편인 바비 트룹을 만나며 그녀의 가수 인생이 꽃 핀다. 연기자이자 재즈 피아노 연주자, 작곡가로 활동하던 남편은 그녀가 노래로 성공할 재목이라는 것을 알아보았기 때문이다. 첫 앨범으로 그녀는 단번에 가장 인기 있는 보컬이 되고, 빌보드에서 그 해 최고의 여성 보컬로 선정되었다.
그녀의 고등학교 동창이었던 작곡가 아서 해밀튼이 써준 ‘Cry Me A River’가 특히 큰 인기를 끌며 특유의 섹시한 허스키 보이스를 대중들에게 널리 알렸다. 1956년의 한 영화에서 자신의 이름으로 출연하여 이 곡을 부르기도 했다. 극 중 인물이 영화 속에서도 유명 가수인 줄리 런던의 모습을 상상하는 장면에 직접 등장한 것이다. 영화 속 장면 중 하나로 삽입될 만큼 그녀와 이 곡의 인기가 대단했음을 실감할 수 있다.
2차 세계대전에서 군인들이 뽑은 미인 1위를 차지할 정도로 빼어난 미모를 자랑하던 그녀는 앨범 자켓도 대부분 외모를 강조한 사진이 많다. 백인 여성 보컬들은 실력보다 푸른 눈과 금발의 미모로 어필한다는 여론이 깔려있던 시절로, 백인 여성 보컬을 일컬어 '블론디 보컬'이라며 비하하는 별명까지 있었다. 그런 시대적 상황에서 미모와 목소리를 모두 가진 그녀는 그 두 가지를 동시에 어필하며 평단의 지지와 대중의 인기를 이어갔다.
일각에서는 그녀를 온전한 재즈가수로 인정하지 않는다. 1955년부터 1969년까지 총 32장의 정규 앨범을 발표했지만 다른 장르에도 무게가 많이 실려있다는 것이 그 첫 번째 이유다. 앞서 소개했던 재즈 보컬들은 다른 장르를 시도할 때조차 기반은 재즈라는게 분명했다면, 그녀는 그 기반을 굳이 강조하지는 않았다. 또한 재즈 보컬이라면 해야 할 재즈의 독자적인 스킬이나 즉흥 기법은 보여주지 않았다는 점, 마지막으로 노래 활동을 그만두고 은퇴전 마지막 10년 동안은 연기에만 집중했다는 점이 재즈가수로서의 정체성에 논란을 지핀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가 담긴 스탠다드 재즈와 라틴 재즈들이 우리에게 여전히 남아있다. 그리고 그 곡들은 다른 누군가를 흉내 냈던 게 아니라 그녀만의 개성과 해석이 뚜렷하다. 특히 'Fly Me To The Moon', 'Misty' 같은 곡들은 다른 쟁쟁한 가수들의 버전보다 줄리의 버전이 큰 사랑을 받지 않았나. 수많은 이들이 해석한 스탠다드 재즈 중에 유독 손이 가는 줄리 버전의 곡들이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점수를 후하게 주고 싶다. 어떤 이유로 폄하하기엔 아까울 만큼 그녀는 매력적이다.
Editor's Choice: 'Cry Me A River'
흔히 한 서린 흑인들의 목소리보다 편안한 마음으로 즐길 수 있는 게 백인 보컬이라고 한다. 이분법적으로 편가르는 의견은 일단 거부감이 들다가도, 줄리의 목소리를 들으면 마냥 틀린 말은 아니라는 수긍을 하게 된다. 깊고 짙은 듯하면서 또 안개처럼 가벼워서 편안하게 감상하기 좋은 게 줄리의 목소리다. 차분하게 깔아지다가 다시 은근하게 벅차 오르다가 또 쓸쓸해지는 목소리는 추운 겨울날 그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라이브 버전이라기엔 애매하지만 그래도 줄리가 살아서 입을 뻥긋하고 있는 영상이 반가워 들고 왔다. 다만 아쉬운 건 240p라는 거의 흙으로 문지른 수준의 화질 때문에 그 유명했던 미모를 감상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이미지출처: Pinterest)
윤단아 에디터 1229yoon@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