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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마추픽추라도 다 같은 마추픽추가 아닌 걸

남미 히피 로드 - 페루

같은 마추픽추라도 다 같은 마추픽추가

“난 브라질에서 온 해적이야”

 

가브리엘라는 자신을 ‘피라테(Pirate)’라고 소개했다. 그렇지만 곧이곧대로 믿기진 않았다. 커다란 문신이 있긴 했지만 뒷골목 형님들의 용이나 호랑이 그림과는 판이하게 다른 화풍이었다. 뒷목을 중심으로 기하학 도형이 양어깨를 따라 대칭을 이루며 단색으로 그려져 있었다. 아무튼 아프리카 소말리아 앞바다도 아니고, 21세기 남아메리카에 헐리우드 영화에나 나올 법한 해적이 있다는 건 너무 황당하지 않은가? 더구나 아기 고양이를 안고 다니는 해적이라니!

 

정말 브라질 해적이냐고 되묻자 가브리엘라는 사연이 길다고 했다. 아무리 사연이 길어도 듣고 싶었다. 당신이라도 그랬을 것이다. 그녀의 커다란 눈을 보면 그녀가 겪은 사연을 매일 하나씩 천일동안 들으면 참 좋겠다, 싶었을 것이다.

 

“난 여권이 없어. 브라질에서 페루 국경을 그냥 넘은 거야. 경찰들에게 붙잡히면 당장 날 감방에 가둘 거야.”

“아하...네가 말하고 싶었던 단어는 ‘해적’이 아니라 ‘범법자’란 거지?”

“아이쿠, 그렇구나. 하하하.”

 

가비(가브리엘라의 애칭)는 포르투갈어와 에스파뇰(스페인어)을 섞은 ‘포르투뇰’로 말하고, 나는 스페인어와 잉글리시가 섞인 ‘스펭글리시’를 말하던 중 가비가 ‘범법자’에 해당하는 단어를 떠올리지 못해 벌어진 해프닝이었다. 무렵 나는 브라질에서 온 카일라와 같은 도미토리 방을 쓰고 있었는데 가비는 카일라의 소꼽친구였다. 친구 찾아 아우키하우스에 왔지만 그날 아우키하우스의 침대들이 모두 차버린 탓에 가비는 바닥에 매트리스를 깔고 자기로 했다. 잠들기 전 가비가 말했다.

 

“난 마추픽추에 가고 싶어서 쿠스코에 온 거야.”

“언제 마추픽추에 갈거니?”

“언제가 될지는 아직 모르겠어. 돈이 거의 다 떨어졌거든.”

“마추픽추는 입장료만 해도 50달러가 넘는다던데....”

“일자리를 좀 알아볼까봐. 난 꼭 마추픽추를 보고 말 거야!”

 

꼭 마추픽추를 보러갈 거란 말. 우리가 머물고 있는 숙소인 아우키하우스에서 늘 듣던 소리였다. 쿠스코에 온 다른 관광객과 마찬가지로 다들 마추픽추를 보러가려고 쿠스코에 왔다지. 그러나 아우키하우스의 히피들 중 마추픽추를 다녀온 친구는 한 명도 없었다. 300달러에 이르는 왕복 기차표는 엄두도 못 내고, 버스종점에서 내려 걸어가더라도 교통비, 숙식비, 마추픽추 입장료까지. 아낀다고 해도 최소 100달러. 하루치 숙박료 3달러도 근근이 내며 아우키하우스에서 지내는 친구들에게 100달러는 꽤 큰 금액이었다.

 

“돈을 다 모으면 갈 거야!” 다들 다짐하듯 같은 말을 반복했다. 그리곤 서빙을 하고, 길에서 악기연주를 하고, 춤을 추며 푼돈을 모아서 마추픽추에 다녀올 돈이 되면 아우키하우스를 떠났다. 남은 친구들은 떠나는 친구의 복을 빌었다.

 

아침 6시 반. 안개와 구름에 뒤덮인 마추픽추가 베일을 벗고 찬란한 위용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건 신비 그 자체였다. 자욱한 안개가 하얀 용처럼 초록빛 계곡 밑에서 꿈틀꿈틀 올라와 공중도시 마추픽추를 타고 넘길 수차례. 시간이 지나 해가 나자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마추픽추는 곧 관광객들로 가득 찼다. 뷰포인트로 소문난 자리엔 관광객들이 줄을 서고 차례차례 갖은 포즈를 취하며 사진을 찍었다. 내가 서 있던 뷰포인트도 사람들로 가득 차버렸다.

같은 마추픽추라도 다 같은 마추픽추가

나만의 뷰포인트를 찾기로 했다. 계단을 오르내리며 돌아보는데 사위가 조용했다. 당일치기로 왕복기차를 타고 온 단체관광객들은 인증 샷 찍기가 끝나자 관광가이드 설명을 듣는 둥 마는 둥 금세 산을 내려가고 있었다. 곧 고요가 찾아왔다. 단체관광객이 몰려올 때마다 같은 과정이 반복되었다. 12시 무렵 한차례 더 단체관광객이 올라와 야단법석을 떨곤 소리쳤다.

 

“볼 거 다 봤으니 밥 먹으러 내려갑시다!”

 

마추픽추는 고즈넉한 유적지로 변했다. 나는 마추픽추를 조망하기 가장 좋은 바위에 걸터앉아 시간을 보내다가 잉카 다리를 다녀오기로 했다. 낭떠러지 옆으로 난 좁은 통로를 지나 다다른 끝엔 외적이 침입했을 때를 대비한 도주로가 있었다. 아슬아슬한 나무다리를 건넌 뒤 자신이 지나온 다리를 절벽 아래로 밀어버리면 아무도 뒤를 쫓을 수 없는 길이었다. 잉카다리에서 돌아와 나는 낮에 앉아있던 바위로 갔다. 근데 누군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의 등 뒤를 지나치는데 엇, 뒷목에 새겨져 있는 저 무늬는? 분명 가비의 문신이었다. 그렇게 나는 가비와 다시 만났다.

 

“가비야, 대체 어떻게 된 거니?”

“내가 가진 전부를 털어 온 거야. 지금 아니면 영영 마추픽추를 못 볼 것 같았어.”

 

그녀는 버스종점에서 걸어왔을 뿐 아니라, 내가 10달러를 내고 셔틀버스를 타고 온 오르막도 걸어왔다고 했다. 새벽에 이곳에 와서 여태껏 남아있는 입장객이 나 말고 또 있었구나. “드디어 난 마추픽추에 왔어!”라고 말하는 가비의 눈은 감격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해가 기울 때까지 우리는 바위 위에 함께 앉아 있었다. 그 사이에도 단체관광객의 파도가 밀려왔다가 쓸려가곤 했다. 다시 고요가 찾아오자 가비가 말했다.

 

“아침부터 관광객이 왔다가 사라지는 걸 지켜봤어. 마치 슈퍼마켓 같았어. 사람들은 상품을 구매하듯 마추픽추를 사고 소비하고 떠나. 난 쉽게 이곳을 떠날 수 없었어. 마추픽추를 보기 위해 내가 가진 전부를 걸었으니까. 페루는 나에게 첫 해외여행지야. 혼자 여행을 하는 것도 이번이 처음이고. 브라질에서 여행할 땐 늘 부모님이 곁에 있었어. 만약 부모님과 함께 이곳을 왔다면 다른 사람들처럼 왕복기차를 타고, 좋은 호텔에서 묵으며 편하게 관광을 했겠지. 그렇지만 난 지금의 자유가 물질적 여유 보다 더 좋아. 이 바위에 앉아 마추픽추를 보다가 새로운 꿈을 꾸게 되었어. 나 앞으로 계속 여행할래. 브라질로 되돌아가 여권을 만들고 다시 길을 떠날 거야. 그리고 계속 지구를 여행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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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추픽추 유적을 마지막으로 둘러본 후 셔틀버스를 타는 대신 함께 계단 길을 내려오기로 했다. 내리막이라 대수롭잖게 여겼는데 중턱부턴 무릎이 아팠다. 이렇게 가파르고 험한 길을 가비는 캄캄한 새벽에 혼자 걸어 올라왔구나. 아구아스 칼리엔테 마을로 들어서자 카페와 레스토랑마다 한 점 한 점 불이 들어오고 있었다. 가비가 마을 입구 레스토랑 앞에 세워져 있는 메뉴판에 잠깐 눈을 뒀다가 아쉬움을 삼키며 발걸음을 옮겼다. 난 그녀의 눈이 ‘피자’에 머무는 걸 보았다.

 

“가비야, 우리 피자 먹고 가지 않을래?”

“난 오늘 숙박비랑 쿠스코로 돌아갈 차비 밖에 남지 않았어.”

“오늘은 우리가 마추픽추를 본 날이잖아. 혼자 보단 같이 축하하는 게 좋겠지. 내가 저녁을 사도 되겠니?”

 

촛불이 환하게 켜진 테이블에 앉았다. 피자, 야채샐러드, 페루산 맥주를 주문했다. 잠시 후 주문한 음식과 술이 나왔고 우리는 술잔을 부딪쳤다. 가비가 “난 해냈어!”하고 소리쳤다. 그녀가 그 말을 하며 짓던 웃음을, 자신이 가진 전부를 걸어서 성취한 사람이 짓는 감격의 표정을 당신에게도 보여주고 싶다.

 

같은 마추픽추라도 다 같은 마추픽추가 아니었다.

 

위 글은 <남미 히피 로드> (2019년 4월 15일 발간)의 일부입니다.

노동효

같은 마추픽추라도 다 같은 마추픽추가

2010년부터 2년간 '장기 체류 후 이동 Long stay & Run'하는 기술을 연마한 후, 한국과 다른 대륙을 2년 주기로 오가며 '장기 체류 후 이동'하는 여행기술을 평생 수련하고 있는 여행가.

 

EBS세계 테마기행 여행작가. <길 위의 칸타빌레>, <로드 페로몬에 홀리다>, <길 위에서 책을 만나다>, <푸른 영혼일 때 떠나라>, <세계 배낭여행자들의 안식처 빠이>를 세상에 내놓았다.

 

남아메리카를 떠돌며 전직 방랑자였거나 현직 방랑자인 자매, 형제들과 어울려 보낸 800일간의 기억. 방랑의 대륙으로 자맥질해 들어갔다가 건져 올린, 사금파리 같은 이야기를 당신 앞에 내려놓는다.

박형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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