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od, bad, weird girl, 정선아
어떤 분야에서든 그 일을 하려고 태어난 것 같다는 찬사를 받는 사람들이 있다. 동종업계의 경쟁자들보다 기술적으로 능숙하고 객관적인 능력치를 인정받을 때 누구나 들을 수 있는 이야기냐 하면 꼭 그런 것도 아니다. 뭐랄까, 그 자리에 서서 그 일을 하는 것이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사람들이 살아있다는 건 이런 것이라고 온몸으로 증명하듯 펄펄 날 때 지켜보던 이들이 경탄과 함께 입을 모아 쏟아내는 말이다.
열아홉 살 나이에 <렌트>의 미미 역으로 처음 무대에 선 이후로 정선아는 내내 그런 이야기를 듣는 배우였다. 뉴밀레니엄의 흥분이 가시지 않은 2002년, 교복을 입고 연습실을 오가며 약물중독과 에이즈로 고통받는 비운의 클럽 댄서 미미 역을 준비한 끝에 <렌트>의 여주인공이 되어 뮤지컬계를 놀라게 했던 데뷔가 아직도 전설처럼 전해지는 것은 15년에 가까운 시간이 지난 지금도 정선아가 여전히 핫하고 쿨한 배우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정선아의 지난 시간들이 한결같이 평탄한 꽃길이었던 것은 아니다.
명백하게 한국 사회의 반영이겠지만 여성 캐릭터가 다양하지 않고 입체적으로 그려지지도 않는 한국 뮤지컬계에서 정선아는 캘리포니아에서 직수입한 듯한 자신감 넘치는 건강한 매력으로 독보적인 영역을 확보했다. 하지만 브리트니 스피어스로 출발해서 비욘세로 성장한 이 히로인이 얼마만큼 긴 생명력을 보여줄 수 있을지는 누구도 확신하기 어려웠다. 춤, 연기, 노래 세 영역에서 모두 빼어나다는 평가를 듣는 드문 재원이었지만 그녀의 재능뿐만 아니라 개성 또한 낭중지추였다. 스스로 느끼고 판단하는 것을 표현하는데 거침이 없는 이 여배우는 자신의 능력이나 무대에서 보여준 것에 비해 다소 낮게 평가받는 경향이 있었다. 잘 놀고 잘 꾸미고 잘 노는 언니를 자신의 직업에 있어서 진지한 전문가로 인정해주지 않으려는 분위기에 대해서는 <금발이 너무해>에서 엘르 우즈를 둘러싼 상황을 참고하면 좋을 듯하다.
넘치는 끼와 재능은 누구나 한눈에 알아보고 인정할 수밖에 없을 만큼 확고했고 무대를 대하는 프로의식에 있어서도 흠잡을 구석이 없는 유니콘 같은 존재였지만 그녀 자신이 가진 능력에 비해서는 정선아를 한국 뮤지컬을 대표하는 여배우로 확신하는 이들이 적은 듯했다. 너무 이른 나이에 주인공으로 데뷔했고, 일종의 소포모어 징크스를 겪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남들이 이제 겨우 첫 작품을 준비하는 20대 중반을 기점으로 정선아는 서서히 만개하기 시작했다. 바다, 김선영과 함께 쟁쟁한 디바들의 모노드라마를 보여주었던 <텔 미 온어 선데이>를 지나 모든 소년들이 꿈꾸었을 법한 침대 머리맡 포스터 속 환상의 여인 그 자체였던 <나인>, 그리고 한국의 비욘세라는 오랜 닉네임의 진가를 보여준 <드림 걸즈>를 지나 <모차르트>, <아이다>, <에비타>까지, 정선아는 주조연을 자유롭게 오가며 자신의 이름에 따르는 기대와 믿음을 꾸준히 키워나갔다.
<위키드>의 글린다는 <드림걸즈>의 디나가 그랬던 것처럼 특정한 시기의 한국 뮤지컬계가 가장 기대하는 최고의 화제작의 드림 캐스팅으로 관객과 관계자들이 첫손에 꼽던 정선아가 실제로 오디션에서 그 역할을 따내고 무대에 오르게 된 경우다. 타고난 사랑스러움과 발랄함, 때로 미성숙하고 얄팍하게 굴 때도 있지만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을 잃지 않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데 스스럼이 없기 때문에 엘파바와의 우정을 통해 더 나은 사람으로 훌쩍 성장할 수 있었던 선한 글린다 역에 정선아는 그야말로 탁월한 배우였다. 가장 눈부신 판타지 속에 모든 여성이 공감할 수 있는 자매애를 그려내고 글린다의 약점과 장점을 관객들이 있는 그대로 사랑할 수 있게 해주는 그녀의 연기는 한국의 <위키드>가 가진 힘 중 하나임에 틀림없다.
어느덧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여배우로 정선아의 이름이 호명되기 시작했을 때 우리는 그녀의 이력에서 자유분방하면서도 근성 있고, 아이처럼 솔직하고 천진하면서도 통찰력 있는 특별한 여배우의 존재감과 매력을 읽어낼 수 있게 되었다. 그 누구보다 먼저 자신에게 솔직하고 자신이 원하는 삶에 충실한 디바의 존재는 한국에도, 뮤지컬계에도 매우 소중하다. 열아홉의 미미가 에비타와 암네리스와 마리아와 글린다를 지나 서른셋의 정선아가 된 것에 박수를 보낸다.
글 Y
일러스트 영수(fizzjang@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