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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zine] 싱그러움 가득, 色다른 겨울 여행 ① 제주 동백군락지

섬 곳곳에 넘실대는 붉은 물결…제주의 겨울은 동백의 계절


(서귀포=연합뉴스) 김희선 기자 = 제주의 겨울 색은 붉은색이 아닐까.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하면 섬 곳곳에서 동백이 빨간 꽃망울을 터뜨린다. 도로변에도, 돌담 위에도 넘실대는 동백의 붉은 물결이 겨울 섬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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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햇살에 반짝이는 애기동백 [사진/전수영 기자]

토종동백 vs 애기동백

동백(冬柏)은 다른 꽃들이 다 지고 난 겨울 홀로 꽃망울을 터뜨린다. 혹한의 삭풍에도, 소복이 쌓인 눈 속에서도 핏빛처럼 붉은 꽃을 피워 이목을 집중시킨다.


강렬한 색깔과 달리 향기는 거의 없다. 곤충을 보기 힘든 추운 계절 피기 때문에 향기 대신 빛깔로 동박새를 불러들여 꽃가루받이를 하기 때문이다.


'동백꽃' 하면 김유정의 단편 소설 '동백꽃'을 떠올리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소설에 등장하는 알싸한 향기의 노란 동백꽃은 사실 동백꽃이 아니라 생강나무꽃일 가능성이 크다. 강원도에서는 이른 봄 노란 꽃이 피는 생강나무를 '동백'으로 불러왔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동백이 가장 먼저 피는 곳은 제주도다. 흔히 '애기동백'으로 불리는 외래종이 11월 말부터, 토종동백은 1월 즈음부터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해 3월까지 피고 지고를 반복하며 곳곳을 붉게 물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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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기동백은 여러 장의 꽃잎을 활짝 펼친 채 나무를 진분홍빛으로 뒤덮는다. [사진/전수영 기자]

최근 몇 년 사이 제주에는 애기동백이 크게 늘었다. 요즘 도로변이나 집 담벼락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도 토종동백이 아니라 일본이 원산지인 애기동백, 즉 다매(茶梅)다.


애기동백은 토종동백보다 훨씬 더 빨리 자라는 데다 꽃도 더 화려하게 피어 조경용으로 인기를 얻고 있다.


제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애기동백은 진분홍빛이다. 여러 장의 꽃잎을 활짝 열어젖힌 채 나무를 온통 진홍빛으로 뒤덮으면서 화려함을 뽐낸다.


토종동백은 애기동백보다 화려함은 덜 하지만 다소곳하고 단아한 매력이 있다. 핏빛처럼 붉은 꽃송이가 반쯤 핀 듯한 모습으로 나무에 드문드문 달린다.


애기동백처럼 속살을 활짝 드러내지 않아 오히려 더 요염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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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꽃을 반쯤 피운 채 단아한 자태를 뽐내는 토종동백 [사진/전수영 기자]

토종동백은 피는 모습도 설레지만, 지는 모습은 더 애잔하다. 꽃잎이 한장 한장 떨어지는 애기동백과 달리 꽃이 시들기도 전에 꽃송이째 떨어져 버린다.


속절없이 한순간 툭 떨어지는 동백꽃의 모습에서 사람들은 제주 4·3 당시 희생된 이들을 떠올리기도 했다. 1992년 강요배 화백의 4·3 연작 '동백꽃 지다'를 시작으로 동백꽃은 4·3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했다.

4대째 이어 온 동백 사랑…위미리 동백군락지

제주도에서 동백으로 가장 이름난 곳은 서귀포시 남원읍이다. 제주도 기념물 제27호인 신흥2리(제주동백마을) 동백군락지와 제주도 기념물 제39호인 위미리 동백군락지 모두 남원읍에 있다.


관광객들에게 인기 있는 제주동백수목원과 동백포레스트 역시 남원읍에 있는 동백 명소다. 먼저 위미리 동백 군락지로 향했다.


수령 100년을 훌쩍 넘긴 거대한 토종 동백나무 600여 그루가 돌담을 따라 둥지를 튼 듯 늘어서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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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미리 동백 군락지에는 수령 100년을 넘긴 거대한 토종동백 나무들이 돌담을 따라 늘어서 있다. 안쪽의 애기동백 나무들은 군락지를 조성한 현맹춘 할머니의 증손자 오덕성 씨가 심은 것이다. [사진/전수영 기자]

이곳을 찾은 것은 12월 초순, 토종동백이 하나둘 빨간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한 상태였다.


제주에서 토종동백은 보통 1월 중순을 넘겨야 본격적으로 꽃이 피지만, 이번 겨울에는 따뜻한 날씨 탓에 일찍 꽃망울을 터뜨렸다고 한다.


담장 안쪽에는 최근 옮겨 심은 애기동백 나무들이 이미 만개한 분홍빛 꽃을 가득 달고 있었다.


동백나무가 우거진 이곳은 140년 전에는 황무지였다고 한다. 쓸모없는 돌밭이었던 이곳을 동백숲으로 가꾼 이는 '버둑 할망'으로도 불리는 고 현맹춘(1858∼1933) 할머니다.


1875년 17살의 나이에 이 마을로 시집온 현 할머니는 해초 따기와 품팔이를 하며 억척스럽게 모은 돈 서른다섯 냥으로 이 버둑(황무지의 제주 방언)을 사들여 옥토로 가꿨다.


할머니가 이곳에 동백나무를 심은 것은 모진 바람을 막기 위해서였다.


황무지를 농토로 바꾸기 위해 한라산 기슭을 헤매며 동백 씨를 주워다 괭이와 호미로 돌밭을 일구며 뿌린 것이 오늘날에 이르러 동백나무 수백 그루가 밀집한 군락지를 이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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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미리 동백 군락지에서 만난 연분홍빛 애기동백 [사진/전수영 기자]

담장 안쪽의 애기동백은 현 할머니의 증손자인 오덕성 씨가 심은 것이다. 군락지 인근의 제주동백수목원 역시 오씨가 조성한 것이다.


오씨는 증조할머니가 남긴 군락지를 계속 아름답게 가꿔야겠다는 생각에 1977년부터 군락지 인근 귤밭에 애기동백을 심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나무를 키워 군락지로 옮겨 심으려는 생각이었다.


귤나무 틈바구니에 심었던 동백나무들이 자라 굵어지면서 옮겨심기를 수없이 반복했다고 한다. 나중에는 아예 귤나무를 모두 베어내고 귤밭을 애기동백으로 채웠다.


오씨가 묵묵히 가꿔온 동백의 진가는 외지 사람들이 먼저 알아봤다.


부인 한길순 씨는 "나무를 가꾸는 데에만 신경 썼는데 어느새 사람들이 알고 와서 사진을 찍고 가더라"면서 "어느 날 와보니 밭 한가득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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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동백수목원. 둥글게 다듬은 애기동백나무들이 빽빽하게 늘어서 있다. [사진/전수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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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씨 부부가 가꿔온 이곳이 수목원으로 개장한 것은 5년 전쯤이다. 지금은 1만㎡가량의 땅에 애기동백 500여 그루가 심겨 있다.


이른 아침 찾은 수목원의 풍경은 마치 동화 속 한 장면 같았다. 거대한 솜사탕처럼 둥글게 다듬은 애기동백 나무들이 진분홍빛 꽃을 단 채 빽빽하게 늘어서 있었다. 한 그루 한 그루가 마치 거대한 꽃다발 같기도 하다.


엄마, 아빠 손을 잡고 온 어린아이들은 동백나무 사이를 뛰어다니며 숨바꼭질을 하느라 바쁘다.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얼굴에도, 셀카봉을 들고 사진을 찍는 연인들의 얼굴에도 미소가 가득하다.


전망대에 오르니 붉은 동백꽃밭 너머로 펼쳐진 쪽빛 바다가 눈을 시원하게 한다.


오씨 부부는 현 할머니가 남긴 동백 군락지 역시 수목원으로 가꿔 다음 겨울 시즌 개장할 예정이라고 한다.

동백꽃 흩날리는 오솔길 따라

위미리 동백군락지를 둘러보고 신흥2리 동백군락지로 향하는 길목, 애기동백이 흐드러지게 핀 오솔길이 눈길을 끌었다.


그냥 지나치기 아쉬워 차를 돌려 가보니 오솔길 입구에 경흥농원이라는 간판이 달려 있다. 안쪽으로 들어가 관리인에게 양해를 구하니 흔쾌히 둘러보고 사진도 찍으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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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흥농원 내 오솔길에 늘어선 애기동백이 흐드러지게 꽃을 피웠다. [사진/전수영 기자]

이곳은 감귤을 키우는 거대한 농원인데 곳곳에 애기동백과 토종동백 나무가 있다. 동백을 좋아하는 주인이 수십 년 전부터 조경수로 동백을 심고 가꿔왔다고 한다.


농원 초입 오솔길 양쪽에 빽빽하게 늘어선 애기동백 나무의 바깥쪽 가지에는 진분홍빛 꽃이 그야말로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둥글게 다듬은 수목원의 나무와는 또 다른 느낌이다.


휙∼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오자 햇빛에 반짝이는 꽃잎이 흩날리며 더없이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냈다.


차를 타고 농원 안쪽으로 더 깊숙이 들어가면 동백나무가 우거져 터널을 이룬 오솔길도 나온다. 갈래갈래 이어진 오솔길을 따라가다 보면 마치 비밀의 숲 안으로 들어온 듯한 느낌이다.


겨울 시즌 예비 신랑 신부가 웨딩 촬영을 하러 많이 오는 숨은 명소라고 관리인이 귀띔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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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기동백 나무가 터널을 이룬 경흥농원 내 오솔길 [사진/전수영 기자]

토종동백 지킴이…제주동백마을

위미리에서 서쪽으로 조금 더 가면 신흥2리 제주동백마을이 나온다.


마을 한복판에 있는 동백나무 군락지는 300년의 역사를 지닌 곳이다. 1706년 사람들이 이곳에 집을 짓고 살면서 마을이 형성됐다고 한다.


당시 방풍림으로 심었던 토종 동백나무들이 300년이 지나면서 숲을 이뤘다.


숲의 규모는 800평으로 그리 크지 않지만, 300년 넘은 토종동백나무를 비롯해 다양한 난대 수종이 어우러져 한겨울에도 생기 넘치는 초록빛을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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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동백마을의 동백 군락지에서는 수령 300년이 넘은 토종동백 나무를 볼 수 있다. [사진/전수영 기자]

신흥2리가 제주동백마을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은 2007년부터다. 마을이 생긴 지 300년 된 것을 기념해 주민들이 토종동백나무 300그루를 심고 '동백마을 만들기'를 시작했다.


2007년 이후 수년간 주민들이 동백나무를 꾸준히 심고 가꿔 온 덕분에 마을 어딜 가나 동백을 쉽게 만날 수 있다.


2009년에는 동백마을 방앗간 사업도 시작했다. 옛날 제주 사람들이 동백 열매에서 짠 기름을 먹기도 하고 머리에도 발랐던 것에 착안한 것이다.


10월쯤 동백 열매가 무르익어 나무에서 저절로 떨어지면 두 달간 매일 아침저녁으로 열매를 주워 모아 마을 방앗간에서 기름을 짠다.


동백 열매를 모으는 것은 마을 할머니들의 몫이다. 수확시기가 감귤과 맞물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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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구니에 담긴 애기동백 열매와 동백기름으로 만든 비누 [사진/전수영 기자]

열매를 볶은 뒤 짜낸 식용 동백기름은 마치 참기름처럼 고소한 내음을 풍겼다.


육지에서는 식용 동백기름이 생소하지만, 제주에서는 오래전부터 동백기름을 약용이나 식용으로 써왔다고 한다. 동백기름은 천식, 기침, 가래에 효과가 있다고 한다.


볶지 않고 생으로 짜낸 기름은 화장품이나 비누의 원료로 활용된다.


마을 방문자센터에서는 방문객을 위한 체험 프로그램도 운영된다. 식용 동백기름을 이용한 다양한 요리를 맛보는 동백음식 체험, 동백비누 만들기, 동백 화장품 만들기 등을 할 수 있다.


※ 이 기사는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1년 1월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hisunny@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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