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의 길'로 부활한 옛 국도, 외씨버선 7길
외씨버선길 표시 리본 [사진/전수영 기자] |
우리나라에는 걷기 좋은 길, 걷고 싶은 길이 많다. 걷기 열풍이 불고, 걷는 인구가 늘어난 뒤 기존 길들의 가치를 재발견하고, 새로운 길들도 많이 만들었기 때문이다.
길 종류가 다양하고 길마다 특색이 있다. 산길, 숲길, 해안길, 섬길, 마을 길이 있는가 하면 오르막길, 평지 길, 꼬부랑길, 흙길, 자갈길, 바윗길, 꽃길이 다채롭다.
이름만큼 맵시 있는 외씨버선 길
수많은 길 중에서 이름이 가장 어여쁜 길을 꼽는다면 경상북도와 강원도에 걸쳐 있는 외씨버선길이 아닐까.
물론 이름만 예쁜 게 아니다. 외씨버선길은 이름만큼 아름답고 맵시 있는 길이다. 실제 걸어보면 즐거움은 이름이 주는 매력 이상이다.
그도 그럴 것이 외씨버선길은 우리나라 최고 청정지역이라고 할 수 있는 경상북도 청송군, 영양군, 봉화군, 강원도 영월군에 걸쳐 있다.
그 맑음과 깨끗함으로 인해 잠시나마 도시 생활의 번잡함과 일상의 비루함에서 놓여나게 된다. 사뿐히 접어 올린 외씨버선처럼, 위압적인 느낌을 주지 않고 걷기에 편안한 길이다.
외씨버선길은 경북 청송군 주왕산국립공원부터 영양군, 봉화군, 강원도 영월군 관풍헌까지 4개 지역에 나 있는, 총 길이 240㎞의 문화생태탐방로다.
2010년부터 2013년까지 조성됐다. 4개 관련 지자체와 사단법인 경북북부연구원이 함께 조성, 관리 운영하고 있다.
외씨버선길은 모두 13개 코스다. 청송에 3개, 영양에 4개, 봉화에 3개, 영월에 3개 코스가 있다. 지역별로 모두 특징이 달라 4색의 매력을 간직하고 있다고 이들 지자체는 자랑한다.
쉼터 [사진/전수영 기자] |
외씨버선길이라는 이름은 13개 길을 연결했을 때 길 전체의 모양이 조지훈의 시 '승무'에 나오는 외씨버선의 윤곽을 닮았다는 데서 유래한다. 외씨버선 6길에 조지훈 생가가 있는 것도 작명의 배경이 됐을 것이다.
작명 당시 외씨버선길이라는 제안이 나오자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다고 한다.
외씨버선이란 오이씨처럼 볼이 조붓하고 갸름해 맵시가 있는 버선이다. 살짝 들어 올려진 치맛자락 밑에서 보일 듯 말 듯 한 외씨버선. 길이 얼마나 단아하길래 이런 이름을 얻었을까.
취재진은 13개 코스 중 영양군에 있는 7길을 골라 걸었다. 영양군에 있는 외씨버선길 4개 코스 중 방문객이 가장 많다.
주말에는 가까운 대구에서는 물론, 서울과 호남 등 전국 각지에서 걷기 애호가들이 방문한다고 한다.
이곳을 찾은 5월 초 햇살은 유난히 환하고 반짝거렸다. 영양과 봉화로 이어지는 31번 국도변의 숲과 나무, 시냇물과 들판은 어린아이의 웃음소리처럼 해맑았다.
치유의 길, 재생의 길
외씨버선 7길은 흔히 '치유의 길'로 불린다.
경북 영양군 일월면 영양로 4124에 자리 잡은 일월산자생화공원에서 시작해 영양군 수비면 남회룡로 790 우련전에서 끝난다.
일월산자생화공원∼반변천 계곡길∼아름다운 숲길∼우련전으로 연결되며 길이는 8.3㎞다. 평지에 가까운 완만한 오르막길이어서 느긋하게 산보하듯 걸을 수 있다.
난이도는 '중' 혹은 '하'로 분류된다. 편도 기준으로 3∼4시간 걸린다.
자생화공원 안에 있는 일제강점기 선광장 [사진/전수영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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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생화공원은 영양군 최고봉이자 영남의 영산으로 꼽히는 일월산(높이 1,219m) 자락에 조성돼 있다.
연분홍 철쭉이 화사한 자생화공원에 들어섰을 때 커다란 바위 구조물 같은 것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일제가 광물 수탈을 목적으로 만든 옛 선광장(選鑛場)이다.
일월산에는 금, 은, 동, 아연이 많이 났는데 1939년부터 일제는 일월산에서 채굴한 광물을 이곳으로 운반해 선별하고 제련했다.
당시 제련소 종업원은 500여명에 달했고, 인근에는 주민 1천200여명이 거주했다. 일제 수탈의 현장이자 역사의 아픔이 어린 곳이다.
광산은 채산성이 떨어져 1976년 폐광됐다. 선광장과 제련소 일대는 금속제련 과정에서 사용한 독성물질로 토양오염이 심해져 풀 한 포기 자랄 수 없었고, 오염된 침출수 때문에 계곡에도 물고기가 살지 못했다.
이곳에 영양군은 2001년 32억원을 투자해 오염원을 완전히 밀봉해 매립하고, 공원 부지를 만들었다. 2004년에는 8억원을 들여 전국 최대 규모의 야생화공원을 조성했다.
일월산에 자생하는 순수 우리 꽃으로 꾸며 자연이 숨 쉬는 휴식처로 탈바꿈시켰다. 외씨버선 7길에서는 사람의 몸과 마음만이 아니라 역사의 상처와 파괴된 토양이 회복되고 재생되고 있었다.
공원 중간에 외씨버선 7길의 시작을 알리는 조지훈의 '승무' 시비가 세워져 있다.
분홍 철쭉꽃, 노란 기린초 꽃, 보라색 패랭이꽃, 하얀 조팝나무 꽃, 작고 흰 개망초 꽃, 하얀 보리수 꽃, 노랗고 자그마한 화살나무 꽃 등 갖가지 야생화가 피어 있었다. 봄의 축복이자 향연이다. 6월에는 더 많은 종류의 꽃들이 핀다고 한다.
돌아가신 박완서 선생이 그랬던 것 같다. 화려한 서양 꽃을 백화점에서 파는 상품에 비유하며 우리 꽃의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격찬했었다. 우리 꽃이 만발한 6월의 자생화공원을 상상해봤다.
용화동 3층 석탑 [사진/전수영 기자] |
자생화공원에서 10분쯤 걸었을까. 용화동 삼층석탑이 눈에 들어왔다.
추정 건립연대가 통일신라 시대다. 천년 넘는 세월을 견뎌온 문화유산이 마을 중간에 덩그러니 홀로 서 있었다.
절은 사라지고 혼자 남은 것도 서러운데 인간사의 틈바구니에서 문화재 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
길은 낙동강 상류 쪽 지류인 반변천 계곡 옆길로 이어진다. 1시간가량 계곡 길이 계속됐다. 흐르는 물살이 햇볕을 받아 수많은 비늘처럼 반짝였다.
계곡 옆길은 소박한 돌길이다. 한 사람 정도 지날 수 있는 좁은 길이지만 그리 위험하지는 않았다. 물소리를 들으며 걷는 동안 마음이 편안해진다.
계곡 중간쯤에 광산 갱도로 쓰였음 직한 큰 굴이 시커멓게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것도 보인다.
멀지 않은 곳에 반변천 발원지인 '뿌리샘'이 있다고 한다. 이곳 물은 낙동강 본류와 합류해 멀리 부산 다대포까지 흘러갔다가 바다가 되리라.
반변천 계곡길 [사진/전수영 기자] |
비포장 옛 국도를 걷다
반변천 계곡 길이 어느덧 끝났다. 시점에서 2㎞ 정도 걸었나 보다.
드디어 '아름다운 숲길'이 시작됐다. 계곡 옆길이 행복한 길이였다면 숲길은 경관이 뛰어난 길이다. 붉은 금강송, 신갈나무, 굴참나무 등 키 큰 아름드리나무들이 즐비하다.
이 길은 제10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어울림 상을 받았다. 국내 대표적인 숲길이다. 위로 일월산 정상이 한눈에 들어온다. 발아래 계곡 밑으로는 대티골 마을이 펼쳐졌다. 멀리 산꼭대기에 공군 부대의 관측소가 자리 잡고 있었다.
길은 경사가 완만하다. 노인이나 아이들도 무리하지 않고 걸을 수 있을 것 같다. 대부분의 도보 길과 달리 자동차가 다닐 수 있을 만큼 폭이 넓다. 영양군 일월면과 봉화군 재산면을 잇는 옛 31번 국도의 일부였기 때문이다.
일제는 일월산에서 캐낸 광물을 실어나르기 위해 이 길을 만들었다. 광복 후 한동안 버려졌던 길은 1960년대 근처 국유림에서 대대적인 산판(벌목)이 일어나면서 다시 사용됐다. 수탈과 아픔의 역사, 삶의 애환과 땀방울이 서려 있다.
이 길은 걷는 길로 주목받으면서 시민들의 길로 거듭나고 있다. 전국에 몇 개 남지 않았을 비포장 옛 국도, 그것도 울창한 소나무 숲속에 난 옛 도로를 걷는 것은 흔치 않은 매력이었다.
외씨버선 7길의 아름드리나무들 [사진/전수영 기자] |
숲에 가려 보이지 않지만 아름다운 숲길 오른쪽에는 멋지게 포장된 현재의 31번 국도가 힘차게 뻗어 있다.
무심코 걷다가 양지바른 길바닥에서 햇볕을 쬐고 있던 뱀과 마주쳤다. 맹독성은 아닌 것 같았으나 가느다란 몸의 길이가 80㎝는 될 것 같았다. 산짐승도 생명체이니만큼 힐링이 필요하리라.
아름다운 숲길은 4㎞가량 계속됐다. 숲길 끝에서 시멘트 포장길이 우련전까지 약 2㎞ 이어졌다. 우련전은 영양과 봉화의 경계에 있는 마을이다. 물 위에 뜬 연꽃인 '연화부수'형 명당이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한국 최초의 신부 김대건 안드레아의 증조부 김종한 안드레아가 1801년 신유박해를 피해 30여명의 교도와 함께 들어와 살았던 천주교 성지이기도 하다.
우련전에서 영양군 외씨버선길이 끝나고 봉화군 외씨버선길이 시작된다. 해발고도가 높은 산중이어서인지 5월 초인데도 산벚나무 꽃이 지지 않고 탐스럽게 피어 있었다.
(영양=연합뉴스) 현경숙 기자 ksh@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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