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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國의 창, 월출산

월출산 안 가보고 한국 산을 안다고 할 수 없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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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출산 육형제봉[사진/조보희 기자]

존재와 시간, 존재와 무. 서양의 위대한 사상가들이 탐구해 현대 철학사에 큰 족적을 남긴 주제들이다. 이에 못지않게 한국인을 매료하는 화두가 있다면 그것은 '존재와 산'이 아닐까.


달리 표현하면 '존재와 자연', '자연과 사유'쯤 될 것 같다. 우리는 왜 산을 찾고, 산은 왜 우리를 부르나. 산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산에서 하는 사유는 어떤 의미인가. 밑도 끝도, 답도 없는 물음을 반복한다.


이는 한국인에게 산이 생명의 기초가 되는 원형질적인 그 무엇이기 때문 아닐까 싶다. 한국은 국토의 70%가 산이다. 한국인은 산에서 태어나, 산에서 자라고, 산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산을 보면서 출근하고 등교한다. 문득 고개 들면 눈에 들어오는 것은 산이다.


산은 한국인에게 포괄적으로 자연을 의미하는 공간인 동시에 역사와 문화가 얽힌 자연 이상의 장소이기도 하다. 산의 인문학은 깊고 넓어서 어떻게 가닥을 잡을지 선뜻 떠오르지 않는다. 동북아시아를 대표하는 3대 문명국인 한국, 중국, 일본에는 산이 많다. 세 나라에서 산의 인문학은 어떻게 다른지 자못 궁금하다.


묵직한 바위들이 군상처럼 모여 서 있고, 가파른 돌계단이 끝없이 이어져 파란 하늘에 닿을 듯한 월출산을 오르다 보면 산의 심오함과 아름다움에 또다시 취하지 않을 수 없다. 유치환 시인이 노래한 것처럼 두 쪽으로 깨져도 외마디 소리조차 지르지 않는 바위가 되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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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출산 구름다리[사진/조보희 기자]

◇ '금강'보다 '월출'…기암괴석의 전시장

금강산이 보고 싶으면 전남 영암 월출산에 가라는 말이 있다. 금강산보다 월출산이 더 아름답다고도 한다. 그만큼 거대한 바위와 깎아지른 절벽들로 이루어진 월출산은 천하절경이다.


태백산맥에서 나누어진 소백산맥의 한 줄기는 한반도 서남쪽에서 잦아들다 나주평야 가운데서 우뚝 솟아올라 급경사 바위산을 만든다. 기암괴석의 전시장이라고 불리는 월출산이다.


호남고속도로를 빠져나와 13번 국도를 타고 남쪽으로 달리다 남해와 서해에 가까워졌겠거니 싶으면 평지돌출한 듯 높이 솟은 월출산이 불쑥 눈앞을 가로막는다. 수려한 바위 봉우리들이 꽃처럼, 새처럼 하늘로 높이 날아오르는 듯하다.


중국 랴오닝(遼寧)성에는 웅장한 바위들로 이루어진 명산, 봉황산이 있다. 연암 박지원은 중국 기행문인 '열하일기'에서 봉황산에 대해 "연꽃 봉오리가 반쯤 피어난 듯도 하고, 하늘가에 뭉게뭉게 떠도는 여름 구름의 기이한 자태와도 같아서 무어라 형용키는 어렵다"는 감상을 피력했다. 사진을 보면 봉황산은 평지에 솟은 모습이나 빼어난 암산의 풍광이 월출산과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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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다리와 영암 시내[사진/조보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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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색 골짜기에 만 떨기 꽃처럼 솟은 바위 봉우리들

고려 명종 때의 문인 김극기는 "푸른 낭떠러지와 자색의 골짜기에는 만 떨기가 솟고 첩첩한 봉우리는 하늘을 뚫어 웅장하며 기이함을 자랑하누나"라며 기록상 최초의 월출산 예찬 시를 남겼다.


조선 전기 방랑 시인 김시습도 "남쪽 고을의 한 그림 가운데 산이 있으니, 달은 청천에서 뜨지 않고 이 산간에 오르더라"라고 노래했다.


월출산국립공원의 면적은 56.22㎢이다. 국내 국립공원 중 가장 작다. 물을 머금지 않는 돌산이어서 메마르다. 하지만 생태자원은 가장 풍부한 곳 중 하나다. 동백나무, 신갈나무, 잠자리난초 등 800여 종의 식물과 남생이, 수달, 갈겨니 등 2천800여 종의 동물자원이 서식한다.


암봉에 올라 내려다보면 신록의 계절이 멀었는데도 계곡은 싱싱한 푸른색을 띠는 나무들로 덮여 있다. 남쪽 나라답게 동백나무, 사스레피나무 등 아열대성 상록수가 많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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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폭포. 수량이 많지 않다. [사진/조보희 기자]

◇ 월출산 안 가보고 우리 산을 안다고 할 수 없으리

월출산은 해발 810.7m로 아주 높은 것은 아니지만 산 생김새가 매우 크고 수려하다. 소백산계 무등산 줄기에 속한다. 이름처럼 달이 뜨는 순간 아름다움은 더욱 빛난다. '달이 난다' 하여 월나(月奈), 월생(月生) 등의 이름으로 불렸다.


천황봉이 최고봉이고 구정봉, 사자봉, 시루봉, 장군봉, 양자봉 등이 이름난 봉우리들이다. 하나같이 탁월한 경관을 뽐낸다. 어우러진 기암괴석은 조망하는 지점에 따라 하나의 거대한 수석처럼 보이기도 한다.


월출산에는 기암괴석들 사이로 탐방로 6개가 조성돼 있다. 대표적인 게 월출산의 명물인 구름다리를 건너는 코스이다. 종주 코스는 동북쪽 월출산 탐방안내소와 서남쪽 도갑사를 잇는다.


경포대지구 코스는 천황봉과 구정봉에서 발원해 남쪽으로 흘러내리는 계곡인 경포대 계곡을 따라 걷는 길이다. 물줄기의 모습이 무명베를 길게 늘어놓은 것처럼 우아하다고 하여 경포대라는 이름을 붙였다.


우리는 구름다리 코스와 경포대 코스에서 월출산을 관찰했다. 구름다리를 지나 천황봉에 오른 뒤에는 바람폭포를 지나 하산했다. 해발고도 510m, 지상고도 120m에 이르는 구름다리 위에 서는 순간은 월출산 선경이 환상으로 바뀌는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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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출산마애여래좌상[사진/조보희 기자]

물이 흔치 않은 월출산에는 폭포가 잘 형성되지 않는다. 바람폭포의 물줄기는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물줄기가 흩날려 잘 보이지 않을 만큼 약하고 가늘었다. 폭포라고 부르기 겸연쩍은 바람폭포는 월출산에서 물이 얼마나 귀한지 일깨워준다.


경포대 코스를 오르면 작은 돌 웅덩이가 9개 있는 구정봉에 이르게 된다. 완만한 흙길과 계단으로 이루어져 구름다리 코스보다 오르기 쉽다.


구정봉에서 30분쯤 더 걸어가면 월출산마애여래좌상이 있다. 이 불상은 한국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마애불로, 국보이다. 자연 암석에 새겨 높이가 8.5m에 이르는 이 조각은 몇 가지 면에서 경이롭다.


먼저 조각술이 섬세하면서도 웅장해 작품성이 놀랍다. 9세기인 조각 추정 연대가 믿기지 않을 만큼 비바람에 훼손되지 않았다는 것도 불가사의하다. 불상의 눈길은 멀리 서해를 향하는데, 험한 바다로 나아가는 뱃길의 안녕을 기원하고 수호하는 듯하다.


마애불에서 150m가량 떨어진 곳에는 용암사지 3층 석탑이 있다. 마애불과 석탑은 일직선상에 있다. 두 불교 유적의 배치는 우연이 아닌 듯싶어 또다시 경외감이 든다.


월출산은 설악산, 주왕산과 함께 한국의 3대 바위산으로 통한다. 그러나 월출산은 설악산과 같지 않고, 주왕산과도 확연히 다른 느낌을 준다. 설악산이 울창한 숲과 바위의 향연이라면 월악산은 바위 하나하나가 장엄하면서 아름다운 주인공들이다.


주왕산의 거대하고 둔중한 바위들과도 구분된다. 한국의 산들은 다양하고 다채롭다. 월출산을 가보지 않고는 한국의 산을 안다고 할 수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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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바위 얼굴[사진/조보희 기자]

◇ 큰 바위 얼굴과 사라진 기억을 담은 유산들

구정봉으로 가는 도중에 한국판 큰 바위 얼굴을 만났다. '큰 바위 얼굴'은 소설 '주홍글씨'로 유명한 미국 작가 나다니엘 호손의 단편 소설 제목이다. 호손이 이 소설의 모티브로 삼은 바위산으로 알려졌던, 미국 뉴햄프셔주 경계에 있는 큰 바위 얼굴은 2003년 태풍에 무너져 없어졌다.


호손의 단편은 큰 바위 얼굴을 닮은 사람을 동경하는 이야기이다. 소설은 부와 지위를 가진 사람이 아니라 자기 성찰을 통해 사랑을 실천하는 인물이 '큰 바위 얼굴'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한국인 중에는 산처럼 어질고 지혜로운 인물이 적지 않다. 한국에 산이 많기 때문 아닐까.


월출산은 전남에서 단일 산으로는 가장 많은 불교 문화유산을 품고 있다. 월출산에 있는 양대 사찰인 도갑사와 무위사에는 각각 국보가 2개씩 있다. 신라 시대 도선국사가 창건한 도갑사에는 조선 시대 초기 주심포 건물로 주목받는 해탈문이 국보이다.


마애석불도 도갑사에 속한다. 신라 원효대사가 창건한 무위사에는 극락보전과 극락전아미타여래삼존벽화가 국보다. 구름다리로 올라가는 도중에는 천년 고찰 터인 천황사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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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황봉 정상에서 내려다본 영암 시가지[사진/조보희 기자]

◇ 남국(南國)의 창

월출산은 한반도 서남부에 펼쳐진, 전남평야로도 불리는 나주평야 가운데 병풍처럼 솟아 있다. 봉우리에 오르면 영암의 황토밭과 반듯한 논, 동서로 길게 누운 영산강, 서해 목포 앞바다, 강진과 남해 다도해, 나주 구시가와 혁신도시, 광주 무등산, 장흥 천관산이 멀리 보인다.


한반도 산세는 대개 첩첩으로 이어지는 산봉우리들에 의해 연출된다. 연봉들에 막혀 사람들이 사는 땅의 모양은 잘 보이지 않는다. 반면 월출산은 단일 산으로 높이 솟아 있어 정상에 서면 사방이 훤히 트이는 진풍경이 펼쳐진다.


마을, 들판, 길, 바다가 한눈에 들어와 전남 땅과 바다의 참모습을 실감하게 된다. '남국의 창'이 아닐 수 없다. 국토의 서남쪽이 궁금해지면 월출산에 오르는 것이 답이 되리.


※ 이 기사는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2년 4월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영암=연합뉴스) 현경숙 기자 = ksh@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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