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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와 격려의 공간… 한국의 숨은 민간 정원 ⓛ 남해

다랑논 이용해 만든 '섬이정원', 난대수종 빼곡한 힐링 공간


한국의 정원은 옛 선비들이 자연을 일상에 끌어들여 마음의 때를 벗기고 위안을 찾는 공간이었다.


최근에는 특히 코로나19로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는 녹색 공간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전국에는 민간인들이 가꾼 아름다운 정원들이 곳곳에 숨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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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의 구름 한점' 남해 섬이정원의 하늘연못위로 구름 하나가 둥실 떠 있다. [사진/성연재 기자]

경남 1호 민간정원

남해 섬이정원은 다랑논을 그대로 살려 만든 경남 1호 민간정원이다. 다랑논의 높낮이를 이용한 9개의 작은 정원이 유럽식 정원을 보는 듯 이국적인 풍경을 자아낸다. 이곳은 최근 경남도에서 뽑은 언택트 경남 힐링 관광지로 소개되기도 했다.


바다가 바라보이는 경남 남해군 남면의 남쪽 도로를 달리다 꼬불꼬불한 산길로 들어섰다. 길은 좁고 교행이 안 되는 산길이었다.


'넓은 바닷가를 두고 하필이면 이렇게 좁은 산속에 정원이 있다니…'


의아한 마음을 품고 5분 남짓 차를 몰아 평산리 산골짜기에 있는 섬이정원에 도착했다. 아직 해도 뜨기 전 이른 시간이었기에 아무도 없었다. 깨어있는 것은 정문의 입장권 자판기뿐이었다.


주차 뒤 정원으로 들어서는 순간, 좁은 산길에서 받았던 아쉬움은 씻은 듯 사라졌다. 별천지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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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자리에 꽃을 심는 차명호 대표 [사진/성연재 기자]

이미 가을 아침의 스산함이 어깨를 움츠리게 할 정도였지만, 정원에는 갖가지 꽃들이 만발해 있었다.


구경하기 힘들었던 벌과 나비도 어디서 나타났는지 아침 일찍부터 꽃에 매달려 있었다. 좁은 S자 길로 구성된 계류정원에는 화려한 꽃들이 앞다퉈 피어 있었다.


이곳에서 한참을 돌아 언덕을 올라가니 탁 트인 전망이 나타났다. 마치 수영장 같은 형태의 직사각형 연못 뒤쪽으로 짙푸른 남해가 펼쳐져 있고, 연못 주위에는 핑크뮬리와 프렌치 라벤더 등 다양한 허브와 꽃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하늘연못정원이다. 아무도 없는 정원을 누리는 기쁨이 얼마나 큰 것인지 체감하는 순간이었다.


아침을 맞는 새들의 지저귐마저 범상치 않게 들려온다. 미동도 없는 바다와 맞닿은 하늘에는 솜사탕 같은 구름이 둥실 떠 있고 그 구름은 연못에 자기 모습을 비춰 본다. 말을 잊고 풍경에 취했다.


순간 아침 햇살이 떠올라 정원을 비춘다. 화사한 햇살은 정원을 다시 살려냈다.디즈니 만화에서 마법으로 사그라진 식물들이 생명을 찾게 되는 모습과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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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일찍 식재 작업을 하는 차명호 대표 [사진/성연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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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나무·은목서 후피향나무…다양한 난대수종

감탄하며 풍경을 카메라에 담던 중 아침 일찍부터 혼자 식재 작업을 하고 있던 차명호 대표를 만났다.


차 대표는 1만6천㎡ 규모의 농원을 거의 혼자 가꾼다. 그는 섬이정원을 모두 9개의 테마를 가진 독립된 정원으로 만들었다.


주변의 나무들이 특이해서 물어봤더니 대부분 가시나무 종류라 했다. 가시나무는 남부지방에서만 월동이 가능한 상록수다. 졸가시, 종가시, 호랑가시 등 다양한 가시나무들이 심겨 있다는 데 놀랐다.


진한 향기를 뿜는 은목서도 한쪽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난대수종의 왕자 후피향나무도 특유의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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갖가지 꽃들이 만발한 정원 [사진/성연재 기자]

정원의 나무들이 대부분 난대수종이라 중부지방의 정원과는 많은 차이가 느껴졌다.


이 정원의 가장 큰 특징은 나무로 벽을 만든 '수벽'(樹壁)으로 공간들을 분리했다는 것이다. 수벽 뒤쪽에는 핑크빛 테이블보가 덮인 테이블과 의자가 있다. 연인들이 좋아할 공간처럼 보였다.


또 눈길을 끄는 것은 가끔 마주치는 거대한 수직 돌벽이다. 거대한 돌벽을 어떻게 쌓았는지 물어봤더니 "이곳이 원래 다랑논이었다"고 대답했다.


알고 보니 그는 남해의 다랑논 12개를 사들여 멋진 정원으로 탈바꿈시킨 것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자연스럽고 단단한 돌벽이 곳곳에 있었다.


농사지을 공간을 더 많이 만들기 위해 돌을 쌓았던 조상들의 지혜가 장인의 손길을 거쳐 작품으로 거듭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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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성벽처럼 보이는 다랑논의 자취 [사진/성연재 기자]

매일 화훼 식재…끝없는 손질

차 대표는 전날 오후 부산에 다녀왔다. 화훼시장에서 꽃을 사기 위해서였다. 지난여름 지독한 장마로 수많은 꽃을 잃었다고 한다. 꽃들이 녹아내린 곳은 새로 산 화훼로 보식을 한다. 그는 이 작업을 끊임없이 계속해왔다.


덕분에 정원은 가을임에도 꽃들로 빽빽하다. 한쪽에는 파란색의 블루블랙 세이지 종류가 자리 잡고 있었고, 그 옆에는 체리 세이지, 카시아, 백일홍, 천일홍과 방아도 꽃을 피우고 있었다.


멕시칸 세이지는 아직 때를 기다리고 있다. 난타나, 멜란포디움, 바늘꽃 등도 자태를 뽐내고 있다.


정원을 가꾸는 일은 끝없이 정원을 다듬는 과정이라고 차 대표는 말한다. 그런 노력 덕분에 첫눈이 내리기 전까지 그의 정원은 아름다운 꽃들이 화려하게 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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곳곳에서 나무를 이용해 만든 수벽을 만날 수 있다. [사진/성연재 기자]

밑그림 그리는 데만 2년

처음부터 이런 성공을 거둔 것은 아니었다. 그는 한번 쓰라린 실패를 경험한 기억이 있다. 서울에서 살던 그는 남해로 내려오기 전 정원 일에 미쳐 경기도 파주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정원을 가꿨다.


그렇지만 여러 해가 지난 다음에야 실수를 깨닫게 됐다. 마스터플랜 없이 가꿔온 정원은 너무나 볼품이 없었다.


그는 파주의 정원을 정리하고 제주도로 내려가 정원을 꾸밀 계획을 세웠다. 2007년 제주도 부동산을 이 잡듯 뒤지고 다니면서 우연히 남해로 발길을 돌렸다가 지금의 정원 자리를 발견했다. 1주일 만에 바로 계약을 했다.


그러나 마스터플랜을 짜는 데만 2년이 걸렸다. 파주의 실패를 교훈 삼았던 것이다. 차 대표는 "초심자들이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이 마스터플랜 없이 정원을 가꾸는 것"이라고 조언했다.


그는 토지를 사들인 지 10여년 뒤인 2017년 일반에 공개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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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를 마실 수 있는 공간을 곳곳에서 찾을 수 있다. [사진/성연재 기자]

공개한 지 몇 년 되지 않아 줄을 서서 기다릴 정도가 됐다. 나무가 자라기를 기다리며 가꾼 덕분이다.


이런 노력 때문인지 지난해 그는 자연을 보전하고 질 높은 녹지를 만든 공로로 '제19회 푸른경남상'을 받기도 했다.


한가지 그의 예상을 빗나간 것은 주 고객의 연령층이다. 중장년층이 주로 찾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의외로 젊은 커플이 대부분이다. 85%가 청년층이라고 했다.


그는 "고객들이 다른 고객의 뒤통수를 보면서 정원을 거닐면 안 된다"고 말한다. 관람객 수를 제한하더라도 쾌적한 관람을 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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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서 본 남해 다랑논 마을 [사진/성연재 기자]

섬이정원을 나와 오랜만에 다랑논 지역으로 유명한 남면 홍현리의 다랭이마을을 들렀다. 연푸른 남해의 아름다운 해안을 배경으로 가을 벼들이 다랑논에서 노랗게 익어가고 있었다.


어쩌면 남해가 하나의 커다란 정원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벌써 벼 베기를 끝낸 논도 있었다. 수확이 끝난 논들을 배경으로 걸어 다니는 관광객들의 모습은 평화로웠다.


※ 이 기사는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0년 11월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남해=연합뉴스) 성연재 기자 = ​polpori@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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