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했다는 당신에게 허지웅이…"그러니까 살아라"
새 에세이 '살고 싶다는 농담'에 암 투병기 담아
"불행이란 설국열차 머리칸의 악당들이 아니라 열차 밖에 늘 내리고 있는 눈과 같다."
활발한 방송 활동으로 대중에 친숙한 영화평론가 겸 작가 허지웅이 2018년 혈액암의 일종인 악성림프종으로 투병한 뒤 에세이 '살고 싶다는 농담'을 오는 12일 발간한다. '나의 친애하는 적' 이후 4년 만의 신작이다.
신작은 생사를 오가는 큰 시련을 겪어서인지 전작보다 좀 더 따뜻하고 간절하다. 그는 이번에 자신만의 무거운 천장을 어깨에 이고 무너지지 않으려 애쓰는 사람들, 기대 쉴 곳 없이 지쳐 있는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들을 담았다.
그는 "나는 언제 암이 재발할지 모르고, 재발하면 치료받을 생각이 전혀 없다. 항암은 한 번으로 족하다"며 "그래서 아직 쓸 수 있을 때 옳은 이야기를 하기보다 청년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될 수 있는 말을 남기고 싶다. 나와 같은 시행착오를 하지 않기를 바라고 불행하거나 외롭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1부 제목은 '망하려면 아직 멀었다'다. 망했다고 생각하고 있을 오늘 밤의 당신들에게 전하는 말이다.
허지웅은 투병 이후로 달라진 생각들을 솔직하게 써 내려간다. 그동안 혼자 힘으로 살아남아 버텼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껴왔으나, 돌이켜보니 "누구에게도 도와달라는 말을 할 수 없는 멍청이가 되고 말았다"는 것.
그는 완치 후 어려운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소통하기 시작했다. 수많은 사연을 들으며 그가 가장 중요한 해법으로 찾은 건 바로 '불행을 인정하는 것'이다. 불행을 탓하는 일에만 몰두하다 보면 자칫 더 큰 피해 의식의 수렁에 빠지고 만다. 그는 껴안고 공생하며 함께 인생을 버텨나가야 하는 감정으로서 불행을 인정하고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바라보자고 제안한다.
2부와 3부에서는 다양한 영화 속 인물과 실존 인물들의 사례를 들어 '불행을 탓하는 일'에 몰두하는 인생이 얼마나 안타까운 결말로 흘러가는지를 보여준다.
미국 대통령 자리에까지 올랐지만 피해 의식을 극복하지 못하고 불법 행위들을 자행하다 탄핵 직전 사임한 닉슨, 1890년대 아일랜드의 천재 작가로 최고의 인기를 누렸지만 동성애 혐의로 피소되어 몰락한 뒤 연인에 대한 원망과 후회로 몸부림치다 쓸쓸히 생을 마감한 오스카 와일드, 뛰어난 재능에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에 결국 다스베이더로 흑화한 아나킨 스카이워커….
저자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불행과 피해 의식이 어떻게 우리 인생을 또 다른 불행으로 밀어 넣는지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우리는 불행한 일들 때문에 불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불행하다는 생각 때문에 불행해진다는 것이다.
허지웅이 전작에서부터 줄곧 강조해온 화두는 '버티는 삶'이다. 이번 책에서는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버티고 버티는 삶의 끝자락에 서 있는 이들에게 이 한마디를 전한다.
"만약 당신이 살기로 결정한다면, 더는 천장에 맺힌 피해 의식과 바닥에 깔린 현실이 전과 같은 무게로 당신을 짓누르거나 얼굴을 짓이기지 않을 거라고 약속할 수 있다. 그 밤은 여태껏 많은 사람을 삼켜왔다. 그러나 살기로 결정한 사람을 그 밤은 결코 집어삼킬 수 없다. 이건 나와 여러분 사이 약속이다. 그러니까, 살아라."
웅진지식하우스, 276쪽, 1만6천원.
살고 싶다는 농담 [웅진지식하우스. 재판매 및 DB 금지] |
(서울=연합뉴스) 이정현 기자 = lisa@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