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나그네' 곡조처럼 우울하게 살다 간 슈베르트
'있는 그대로의 삶' 그린 '슈베르트 평전' 번역 출간
요절한 예술가의 일생을 먼 훗날 정리하는 일은 어렵다. 특히 그의 예술적 가치가 세상을 떠난 후 뒤늦게 주목받게 된 경우라면 더욱더 그렇다. 프란츠 페터 슈베르트(1797~1828)가 전형적인 예다.
슈베르트의 생 자체가 너무도 짧았고 세상이 그의 진가를 인정하게 됐을 때는 시간이 너무 흘러 가뜩이나 빈약한 기록들이 서로 엇갈리기 일쑤다. 슈베르트에 관한 책들이 대부분 그의 인생 자체보다는 음악 작품에 초점을 맞추거나 생의 특정한 시기 또는 특정한 면을 부각한 것은 이 때문이다.
미국 음악가이자 작가인 엘리자베스 노먼 맥케이가 지은 '슈베르트 평전'(원제 Franz Schubert: A Biography)'은 슈베르트 자신이 남긴 편지, 일기와 같은 기록은 물론 당대에 그와 교류했던 많은 인물이 남긴 자료와 공적, 사적 기록물 등을 토대로 그의 생을 '있는 그대로' 담아왔다. 특히 그가 왕성하게 작품활동을 하고 친구들과도 활발히 교류한 마지막 몇 년에 관해서는 일거수일투족을 곁에서 들여다보는 것처럼 상세히 기술한다.
슈베르트, 1827년 프란츠 아이블이 그린 초상화 [풍월당 제공·재판매 및 DB 금지] |
무엇보다 큰 이 책의 특장점은 사실과 가능성, 인정하기 어려운 주장을 뚜렷이 구분하고 있다는 점이다. 슈베르트와 관련해 가장 큰 미스터리로 남아 있는 그의 사인을 기술하는 방식이 한 예다. 공식 문서에 기재된 그의 사인은 '신경열', 오늘날의 용어로 말하자면 장티푸스였다. 그러나 저자는 여러 기록과 증언, 정황을 고려할 때 그가 목숨을 잃게 되는 데는 매독의 영향이 컸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평생 독신으로 살았고 제대로 된 연애도 해보지 못한 슈베르트는 남성 친구들과는 밤새 폭음하는 일이 많았고 때로는 홍등가를 드나들기도 했던 모양이다. 여러 진료기록과 동료들의 전언을 종합적으로 검토한 저자는 슈베르트가 숨지기 직전 매독 3기였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말한다. 당시 매독은 불치의 병이었고 더는 증세가 악화하지 않고 잠복하도록 할 수만 있다면 최선이었다.
매독은 그 당시에도 부끄러운 질병으로 여겨졌기에 가족들은 사망 서류에 이를 명시할 수 없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저자는 그의 아버지, 형, 누이 등 가족들이 저마다 그의 진정한 사인을 감춰야 할 동기가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면서도 사망 직전 슈베르트에게 장티푸스와 유사한 증세가 있었다는 점도 인정한다. 결국 매독 말기 증상으로 인해 신체 기능이 저하된 상태에서 잘못된 치료 요법으로 인한 수은 중독과 자기 관리 소홀로 인해 그 증상은 더욱 심화했고 거기에 장티푸스까지 겹쳐 사망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 저자의 결론이다.
슈베르트의 위대한 면모 가운데 하나는 인간의 육체와 정신을 잔인하게 갉아먹는 매독 말기의 상황에서도 그의 창작열은 조금도 식지 않았다는 점이다. 매독에 따른 두통과 우울증에 고통받으면서도 슈베르트는 죽기 두 달 전인 1828년 9월 한 달 동안에만 최후의 피아노 소나타 3편, '백조의 노래'에 들어갈 가곡 몇 편, '현악 오중주 C장조' 등 '도무지 한 사람이 단시간 내에 해냈다고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성취를 이뤄냈다. 그해 3월에는 최초로 연 대규모 연주회에서 큰 성공을 거둬 명성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평생 가난하게 살았던 그로서는 꽤 큰 돈도 손에 쥘 수 있었다. 매독에 걸린 이후 슈베르트는 자주 고독과 절망에 시달렸고 기쁨을 마음껏 표현하는 능력을 상실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의 음악은 바로 그러한 고행에 뿌리를 박고서 태어나기도 했다. 1824년 그가 일기에 "'슬픔'과 '음악적 이해'가 서로 결합하면 세상에 가장 큰 '즐거움'을 주는 법"이라고 적었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그가 자기 죽음을 예감하고 있었으며 '겨울 나그네'에 이에 따른 번민과 절망을 담았다는 일각의 추측은 잘못됐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저자에 따르면 슈베르트는 숨지기 직전까지 자신의 생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암시하는 어떤 언동도 하지 않았다. 또 '겨울 나그네' 연작시를 쓴 빌헬름 뮐러의 불행한 인생이 슈베르트의 비관을 부채질했을 것이라는 추측과는 달리 슈베르트보다 2년 연상인 뮐러는 오히려 창작력이 왕성한 만족스러운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베토벤과 슈베르트의 관계에 관해서도 잘못 알려진 점이 있다. 슈베르트가 베토벤을 동경하고 흠모한 것은 분명해 보이지만, 베토벤의 말년에 둘이 만났다는 설의 진위는 확인할 수 없다고 저자는 말한다. 1827년 초에 베토벤이 슈베르트의 가곡 악보를 받아보고서 "정녕 슈베르트 안에 신성(神性)이 반짝이는구나"라고 소리쳤다는 기록도 있지만, 저자는 이 기록의 작성자가 '일화에 살을 붙이고 각색을 가미하는 고질적인 버릇'이 있다면서 신빙성을 낮게 평가했다. 슈베르트의 형이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서 슈베르트가 죽어가면서 "베토벤이 여기 없는 걸"이라고 중얼거렸다면서 동생을 베토벤 곁에 묻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저자는 슈베르트의 형 역시 아버지로부터 매장 비용을 지원받기 위해 이 말을 지어냈을 가능성이 있다고 봤다.
슈베르트의 묘비 [풍월당 제공·재판매 및 DB 금지] |
슈베르트의 생이 짧기도 했거니와 그가 세상을 떠난 것은 창작 능력이 절정에 오르고 명성도 얻어가던 시점이었다. 책을 읽다 보면 '작곡가로 활동한 시기가 15년도 채 되지 않았으면서도 이토록 많은 것을 남기고 떠난 그가 만약 조금만 더 오래 살았더라면'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번역자는 미국 음악평론가의 글을 인용해 이렇게 그 '만약'에 답한다.
"다른 작곡가들이 31살 나이에 요절했다면 어떻게 기억될지 견줘보자. '나부코'의 작곡가 베르디? 여러 곡의 피아노 소나타와 C장조 교향곡 한 점을 쓴 베토벤? 빼어난 오르간 음악을 썼던 바흐? 모차르트는 여전히 모차르트로 남겠지만 그래도 '마술피리'를 빼앗길 테고. 그러나 슈베르트는 설령 18살에 사망했다 하더라도 '마왕'을 비롯해 200여 점의 가곡을 쓴 다음이었을 것이며, 가곡 작곡가로서 한 시대를 연 위인으로서의 명성 또한 확고했을 것이다."
712쪽. 4만8천원. |
(서울=연합뉴스) 추왕훈 기자 cwhyna@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