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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의 맛, 백반

밥, 국, 나물, 구이, 무침.

비범한 전라도의 손맛을 강진에서 느꼈다.

편안한 나루, 근데 이제 맛을 곁들인

전남 강진, 서울 사람에겐 참 먼 동네였다. 4시간이었던가, 5시간이었던가. 졸다가 자다가, 이 시간이면 방콕도 도착했겠다 싶을 때 강진 읍내에 내렸다. 새벽에 출발해 점심에 도착했다. 뭘 먹을까 싶은 고민보다 뭐라도 먹어야 한다는 확신이 강진의 첫 느낌이었다. 

강진은 음식이 유명하다. 재료가 좋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이런 소리가 있다. 여수에선 돈 자랑 말고, 순천에선 인물 자랑 말고, 강진에선 음식 자랑 말라고. 강진은 우리나라 남쪽 끝, 해남과 장흥 사이에 있다. 산, 바다, 개펄, 호수, 강이 모두 있고 볕도 좋다. 예로부터 풍요롭고 별걱정 없이 살았던 곳, 이름부터 ‘편안한 나루(康津, 강진)’다. 한편 강진은 유배지이기도 하다. 정약용이 강진에서 유배 생활을 했다. ‘유배’니까 거창하진 않았겠지만, 조금이나마 양반의 식문화가 강진에 분명 녹아들었을 것이다.

좋은 재료와 정돈된 차림새, 그것을 전라도 손맛이 아우르는 밥상이 강진의 백반이다. 또 누구는 강진이 한정식으로 유명하다고도 말한다. 한정식과 백반은 엄연히 다르다. 한정식은 전통적인 한식을 바탕으로 여러 음식을 격식 갖추어 차려 내는 음식이고, 백반은 밥, 국, 무침, 구이 등 집에서 먹을 법한 요리로 채운 한 상을 뜻한다. 강진 재료와 전라도 손맛으로 차려 낸 한정식이 어찌 맛이 없겠냐만은, 강진의 뿌리는 그래도 백반이다. 정약용이 강진으로 유배를 와 처음으로 묵은 곳이 주막의 골방이다. 주모의 아욱 된장국을 즐겨 먹으며 버텼다는 이야기를 미뤄 보아 한정식을 강진의 대표로 내세우기에는 역사적으로 앞뒤가 맞지 않는다.  


백반이 사람이라면, 밥과 김치는 그를 지탱하는 다리다. 강진 밥은 정말 달다. 일조량이 많고 밤낮의 일교차가 커서라는데, 어쨌든 쌀이 맛있다. 게다가 강진의 거의 모든 백반집에서는 그곳에서 담근 묵은지를 내어준다. 이거 정말 귀하다. 거의 붉다 못해 갈색에 가까운 묵은지. 군내 하나 없이 시큼한 그 맛이, 여기가 대한민국이다.

●1회춘하는 곳
으뜸식당

으뜸식당은 강진시장 입구에 자리하는 밥집이다. ‘회춘탕’을 메인으로 내세운다. 보양을 목적으로 가시오가피, 헛개나무, 뽕나무 등 한약재를 가득 넣어 닭, 문어, 전복 등등 좋은 것만 넣고 고아 만든 탕이다. 아직 회춘을 바랄 때는 아니어서, 백반을 시켰다. 사계절백반 7,000원. 

밥상이 나왔다. 스뎅(스테인리스) 국그릇엔 시래기 된장국이 반절 담겨 있다. 백반집에서는 항상 국을 적게 준다는 것이 나의 불만이다. 맛은 뭐, 뜨끈하고 구수하니 된장국은 언제나 좋다. 청년에서 아저씨로 향하는 중이다. 반찬을 살핀다. 칠게장이 보인다. 칠게는 씹으면 껍질이 바스락거려 밥을 입에 물고 먹어야 깔끔하게 넘길 수 있다. 맨입으로 먹기엔 껄끄럽다. 실멸치볶음, 파래김무침, 가지무침, 먹을 게 많다. 우뭇가사리 냉국도 있다. 이걸 젓가락으로 집자니 부서질 거 같고 숟가락으로 푸자니 욕심내는 것처럼 보일 거 같다.


방황하다 결국 고구마줄기를 한 움큼 집는다. 고구마줄기는 7월부터 9월까지만 먹을 수 있다. 아삭아삭하니 맛은 있는데 데치고 껍질 까고, 손질이 여간 힘든 게 아니다. 이런 데서 많이 먹어 둬야 한다. 식당 아주머니가 옹기종기 모여 있던 반찬 그릇을 사방으로 헤친다. 제육과 간고등어가 나온다. 백반은 이때 밥뚜껑을 열어야 한다. 밥이 뜨거워야 맛있는 반찬들이기 때문이다. 맛이야 뭐, 제육은 제육 맛이고 고등어도 고등어 맛. 역시나 묵은지가 참 좋다. 쿰쿰하고 시큼하다.

●15찬 밥상
오케이식당

오케이식당, 왠지 향토적이다. 강진에서 몇 없는, 아침 되는 곳. 백반 7,000원, 이 가격에 반찬만 15가지가 넘게 나온다. 김도 주고 국도 준다. 할머님에게 계란후라이를 부탁하면 해 주신다. 잘 못 듣긴 하시니, 눈치껏 부탁드려면 된다. 파김치, 꽈리고추 멸치볶음, 표고버섯, 쥐포볶음, 참나물무침, 꼴뚜기볶음, 고구마줄기, 슴슴한 반찬이 밥과 먹기 좋다. 냉면그릇에 담겨나오는 꽁치김치찌개는 일주일 동안 끓인 맛이 난다. 국에서 건져 낸 배추김치가 입에서 녹진히 뭉개진다. 강진의 묵은지는 정말인지, 예찬할 수밖에 없다. 모든 메뉴는 계절마다 바뀐다. 최갑수 작가의 기사로 이 식당을 처음 접했을 땐, 조기조림이 나왔었다. 

사실 이런 백반은 맛에 대해 관대해질 수밖에 없다. 반찬 투정 하다가 숟가락을 뺏겼던, 아버지를 보고 자랐기 때문이다. 어렸을 땐 집에 있어도 가렸을 것들이 나이 들어 직장 생활을 하고 살다 보니 귀한 줄 알게 되었다. 봄의 달래, 여름의 고구마순, 가을의 늙은호박, 겨울의 무. 계절의 맛은 돌고 돌며 우리 곁으로 언제든 돌아올 텐데, 데치고 무치고 절이는 손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아저씨에 가까워지며 선명히 느껴 간다.

●생선구이에 김치
탐진강 장어나라

백반은 아니지만, 강진의 맛을 소개하며 도저히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있다. 강진군 강진읍 목리, 이 동네의 장어다. 목리는 뭍과 바다의 경계에 위치한다. 남해와 탐진강을 오가는 풍천장어가 살기 최적인 조건이다. 일제 강점기 당시에는 목리에 장어 통조림 공장이 있었다고 한다. 참고로 풍천장어의 풍천은 지명이 아니다. 풍천(風川), 보통 바다에서 육지(천)로 물이 들어올 때 바람을 몰고 오는데 이때 나타나는 장어를 지칭해, ‘풍천’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탐진강 장어나라에서 풍천장어를 먹었다. 식당에서 직접 구워 주기 때문에 나오면 먹기만 하면 된다. 맛은 뭐. 장어구이는 원물의 퀄리티가 맛의 전부나 다름없는 음식이다. 어쨌든 검증된 장어는 둘째 치고, 식당 중앙으로 나가면 첫째인 김치가 가득 깔려 있다. 배추김치, 열무김치. 묵은지와 생김치. 목리 장어는 반드시 묵은지와 먹어야 한다. 장어 특유의 느끼함이 하나도 느껴지질 않는다. 오죽하면 그 많은 장어를 먹으며 생강 하나를 집어먹지 않았을 정도로. 다시 생각해 보면 그날은 묵은지를 더 맛있게 먹기 위해, 장어를 곁들였던 것 같기도 하다.


글·사진 강화송 기자 hwasong@travel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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