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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래' 홍광호

고집스럽게 높고 파란 하늘

지난 1월 말 홍광호가 <빨래>의 솔롱고로 다시 돌아온다는 소식이 인터넷을 뜨겁게 달궜다. 지난해 여름 런던 활동을 마치고 돌아와 <데스노트>를 끝낸 이후 차기작 소식을 전하지 않았던 그가 대학로 소극장 뮤지컬로 짧은 공백을 깬다는 사실은 뮤지컬 팬들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했으니 말이다. 보잘것없는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모여 희망을 노래하는 <빨래>에서 홍광호가 불법 이주 노동자로 분하는 모습을 다시 보게 될 거라고 그 누가 기대했을까. 

'빨래' 홍광호

다시 마주하는 설렘

<빨래>는 상상도 못했던 깜짝 발표였어요. 

그게 왜 그렇게 의외지? 하긴 제가 대학로에서 공연하는 게 진짜 오래만이긴 하죠. <첫사랑> 이후에 거의 10년 만인가? 그런데 어떤 큰 뜻이 있었던 건 아니에요. 다만 <데스노트>가 끝나고 차기작이 정해져 있지 않던 상황에서 뭘 할지 여러 가지를 생각했는데…. 솔직히, 이 말이 중요해요, ‘가능한 한’ 새로운 걸 하고 싶었는데, 그게 잘 안 됐어요. 그래서 예전부터 다시 해보고 싶었던 <빨래>를 하게 된 거죠. 

 

제안받은 새로운 작품이라면 충분히 많았을 텐데요?

그렇지 않아요. 그냥 몇 개 있었던 정도예요. 그런데 그중에서 마땅히 하고 싶은 작품이 없었어요. 가령 전작 <데스노트>는 대본을 받고 정말 좋았거든요. 이거 되게 재밌겠다 싶었어요. 이번엔 그때처럼 마음을 확 설레게 하는 작품이 없었던 거죠. 이게 제 솔직한 마음인데, 이런 말을 하기가 조심스러워요. 누군가에겐 상처가 될 수도 있고, 건방져 보일 수도 있잖아요. 

 

변했다, 배가 불렀다, 이런 오해를 살 수도 있고? 

네. 사실 배부른 소리하는 거 맞죠. 근데 저는 하기 싫은 건, 하기 싫더라고요. 예전부터 그랬어요. 그래서 생각보다 지금까지 한 작품 수가 몇 편 안 돼요. 십 년 동안 한 열 편 했으려나? 다른 무엇보다 내가 행복하려고 공연하는 건데, 하고 싶지 않은 걸 하면서 스트레스 받을 필요가 있을까? 스스로 늘 물어보죠. 만약 원하지 않은 작품을 하면 객석에서도 알아차릴 거예요. 저 친구 억지로 하고 있구나 하고. 

 

처음으로 차기작이 없이 무작정 쉬어 봤겠네요.

예전 같았으면 이렇게 몇 달씩 못 쉬죠, 불안해서. 이십 대 땐 빨리 다음 작품, 아니 다다음 작품까지 정해 놔야지 쉴 시간이 어딨어! 이러면서 막 달렸어요. 근데 나이를 먹어서 그런지 마음의 여유가 생겼나 봐요. 아주 조금이나마요. 그리고 정말 휴식이 필요하기도 했고요. 런던에서 1년 넘게 원 캐스트로 주 8회 공연을 하고 돌아와서 곧바로 <데스노트>에 들어가 또 원 캐스트로 공연했으니까. <데스노트>를 마치고 나서 친한 의사 선생님이 제 몸 상태를 진단해주셨는데, 어떤 수치가 70대 노인하고 비슷하대요. 아, 쉬어야겠다 싶었죠. 

'빨래' 홍광호

쉬는 동안엔 주로 뭘 하면서 시간을 보냈어요?

대학원을 다녔어요. 모교인 중앙대 예술대학원에 입학했죠. 예전부터 나중에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는 자격을 갖춰놓자고 생각했거든요. 저 역시 신인 시절 멋모르고 덤볐다 고생했던 기억이 있기 때문에 제 경험을 나눌 수 있으면 좋겠다 싶어서요. 근데 바쁘단 핑계로 계속 미뤄오다 마침 시간이 난 김에 얼른 등록했어요. 못 갔던 적도 있지만 그래도 꽤 열심히 다녔어요. 노후 준비를 위해. 

 

노후 준비요? 언젠간 평범한 누군가로 돌아갈 준비를 해야 할 때가 온다고 해도, 그런 생각은 너무 빠른 거 아니에요? 왜 벌써 그런 생각을 해요?

꼭 뭐가 걱정돼서라기보다 제가 잡생각이 많아요. 배우는 미래가 특히 불투명한 직업이기도 하고, 갑자기 사고를 당하거나 뮤지컬에 흥미를 잃게 되거나, 여러 이유로 배우를 계속할 수 없는 상황이 올 수 있잖아요. 만약 배우를 못하면 난 뭘 할 수 있지? 전 종종 그런 생각을 해요.

 

어쨌든 지금은 제일 뜨거운 인기 배우인걸요. 전석이 3분 만에 매진됐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어떤 기분이 들었어요?

혹시나 관객들을 실망시키면 어쩌지, 조금 걱정됐어요. 우리 작품에는 무대에서 불이 뿜어져 나온다든지 중간에 배 타고 나온다든지 하는 엄청난 효과가 없는데, 아시는 걸까 하고. (웃음) 사실 진짜 부담스러운 부분은, 전 과거에 매진 배우가 아니었는데 마치 늘 그랬던 것처럼 보이는 거예요. 이번 일은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이례적인 행보라서 벌어진 해프닝 같은 거죠. 그리고 <빨래>는 원래 잘되던 작품이에요. 아시겠지만, 대학로에서 수년째 오픈런으로 공연할 수 있는 인기 뮤지컬이잖아요. 저 때문에 잘 되는 게 아닌데 그렇게 비치는 게 부담스럽죠. 

'빨래' 홍광호

7년 전에 특별히 중극장에 올라간 <빨래>를 했던 것도 뜻밖이었는데, 이번에는 소극장 공연에 그대로 참여한다니 아무래도 이례적인 행보로 보이죠. ‘지킬’하고 ‘팬텀’하는 배우가 대학로 오픈런 공연에 서는 일은 거의 없으니까.

저는 이번에 <빨래>를 한다면 원래 하던 그대로의 방식에 새로 참여하고 싶었어요. 혹시나 저로 인해 극장을 큰 데로 옮기거나, 티켓 가격을 올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프로덕션에 부탁했어요. 주제넘게 제가 관여할 부분은 아니지만, 폐 끼치고 싶지 않았거든요. 이 작품에 참여하는 배우들에게, 그리고 스태프들에게요. 물론 저로선 당연히 포기해야 할 것들이 있었죠. 쉽게 생각하면 개런티만 해도 통상 대극장 출연료보다 훨씬 적을 수밖에 없잖아요. 하지만 이 작품을 원했던 건 저였으니까요. <빨래> 프로덕션 대표가 잘 아는 누나거든요. 누나한테 새로운 시즌에 나 좀 시켜달라고 얼마나 졸랐는데요.

 

그러고 보니 예전에도 먼저 어떤 소극장 뮤지컬을 시켜달라고 했다면서요? 그땐 스케줄 문제 때문에 결국 불발됐다지만요. 근데 하기 싫은 건 절대 안 한다면서, 하고 싶은 건 시켜달라고 마구 조른다니. 뭐랄까, 아이 같은 면이 있네요. 

저 그렇게 냉정하지 않아요. 좋게 말하면 성격이 좀 많이 신중해서 때때로 냉정해지는? 너무 자기 포장인가. (웃음) 어쨌든 저도 하기 싫다고, 죽어도 안 할 거라고 몇 번씩 거절했다가 나중엔 마음이 흔들렸던 적도 있어요. 아무리 거절해도 끈질기게 계속하자고 하니까, ‘이 사람들이 왜 이러지? 미쳤나? 싶다가도 나를 이렇게 원하는데’ 하고 마음이 움직이더라고요. 이것도 나이를 먹어서 그런가 봐요. 런던에서 서울로 돌아왔더니 한 번에 두 살을 먹어서 벌써 서른다섯이 됐다니까요! 아직 만으론 서른셋이지만. (웃음)

 

그런데 <빨래>가 왜 그렇게 좋아요?

우리가 살아가는 오늘을 얘기하는 진짜 좋은 작품이니까요. 저는 2008년 공연으로 <빨래>를 처음 봤는데, 그때 굉장히 오묘한 기분이 들었어요. 떨리고 행복한 기분. 그래서 바로 나도 하고 싶다고 졸라서 다음 시즌 공연을 했던 거예요. 작품 배경이 요즘에는 많이 사라진 달동네라 현실보단 과거 얘기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주위를 조금만 둘러보면 이건 그냥 우리 얘기예요. 너무 바쁜 마음에 앞만 보고 사느라 정작 놓쳐버리게 되는 소중한 것들에 대한 얘기죠. 보잘것없는 하루가 힘들더라도 힘을 내자고 말하는 이 작품의 따뜻함이 저는 정말 좋아요.

'빨래' 홍광호

고집스럽게 천천히

이번에 <빨래>를 하게 된 이유 중 하나가 <미스 사이공> 웨스트엔드 공연에 참여하는 동안 이방인으로 런던에 머물면서 솔롱고의 마음을 이해하게 됐기 때문이라고 들었어요.

쑥스러운 고백인데, 이번에 연습에 들어가기 전에 집에서 혼자 소리 내서 쓱 대본을 읽어보다가 운 적이 있어요. 저 원래 눈물이 많지 않거든요. 근데 갑자기 런던에서 힘들었던 생각도 나고, 솔롱고가 너무 안쓰러워서 눈물이 터지더니 감정이 주체가 안 되는 거예요. 혼자 막 엉엉 울었어요. 

 

뭐에 그렇게 감정이입이 됐는데요?

런던에 있는 동안 마음 한 편이 늘 불안했거든요. 물론 거기 사람들은 정말 친절하고 좋았어요. 모두 저를 잘 받아들여줬죠. 그런데 아무리 무리에 섞여 있다 해도 어쩔 수 없이 느껴지는 불안 같은 게 있었어요. 예를 들면 한국에서는 교통사고가 나더라도 그 일을 해결할 수 있는 어느 정도의 자신감이 있잖아요? 그런데 런던에서 교통사고가 난다면? 상상만으로도 머리가 새하얘지죠. 원래도 조심성이 많은 성격인데, 모든 걸 더 조심히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삶에서 항상 긴장감을 느꼈어요. 합법적으로 외국에 체류하는 나도 이렇게 불안했는데, 불법 이주 노동자들이 느끼는 불안함은 어느 정도의 크기일까. 얼마나 외로울까.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물론 공연 때는 자기 연민에 빠지면 안 되겠지만요.

 

런던에서 제일 외로울 땐 언제였어요?

연습하고 공연하는 건 정말 좋았어요. 더 바랄 게 없이 좋았죠. 근데 공연이 끝나고 극장에서 나와 다음 날 다시 극장에 갈 때까지 할 게 없는 거예요! 그렇다고 극장에 24시간 있을 수도 없고. (웃음) 런던에서 제일 외로웠던 때는… 거의 매일 밤? 거기서 공연 끝난 후의 생활 패턴이 어땠나면요, 극장에 가기 전에 한국 음식점에 들러 “오늘은 비빔밥이랑 김치찌개요” 하고 이따 먹을 밥을 미리 주문해 놔요. 그런 다음 공연이 끝나면 가게에 가서 음식을 픽업해 자전거 앞 바구니에 싣고 집에 가 혼자 데워먹는 거죠. 그러다 문득 아, 외롭다. (웃음) 사실 그다지 사교적인 편이 아니라 한국에서도 혼자 밥 먹고 그럴 때 많거든요. 근데 갑자기 전화해서 만날 수 있는 마음 통하는 친구, 언제든 밥 먹으러 갈 수 있는 부모님 댁이 없다는 게 사람을 참 외롭게 하더라고요. 요즘에도 아침에 눈 떴을 때 내가 지금 한국에 있다는 사실에 안도하고 그래요. 꼭 엊그제 제대한 애처럼 ‘아, 여기 우리 집이었지!’ 하고 히죽. 아직도 가끔 그래요. 

'빨래' 홍광호

어떻게 보면 런던에 가면서 누구나 아는 배우에서 어느 날 갑자기 사람들이 모르는 배우가 된 셈이잖아요? 여러 배우들 중 한 명이 되는 기분은 어땠을까. 그게 외롭지 않았을까 생각했는데.

음, 한국 사람들도 많이 보러 와서…. (웃음) 저는 어떤 면에선 배우로서 부담이 덜해서 좋았어요. 한국에선 공연하는 동안 아프면 안 된다는 강박 같은 게 있거든요. 아마 저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배우들이 그런 부담을 느낄 거예요. 캐스트가 바뀌면 환불 사태 같은 곤란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으니까요. 그런데 런던에서는 아프면 비교적 부담 없이 쉴 수 있어요. 출연진이 바뀌어도 관객들이 크게 신경 쓰지 않거든요. 극장 사람들한테 여기도 출연진이 변경됐을 때 환불이 되는지 궁금해서 물어봤더니, 포스터에 배우 사진이나 이름이 있는 경우엔 환불해주기도 한 대요. 근데 아시다시피 거기 포스터는 헬기 하나 그러져 있고, 가면 하나 그려져 있고 그러잖아요. (웃음) 배우 때문에 환불되는 경우가 아주 드문 거죠.

 

또 다른 문화적 충격을 느낀 게 있어요?

공연 하면서 쓴 소리를 한 번도 안 들었던 거요. 문화적 차이일 텐데, 우리는 단점을 하나씩 깎아서 원을 만든다면, 거긴 장점을 덧붙여가면서 둥글게 만들어요. “넌 이게 판타스틱(Fantastic)해, 이건 패뷸러스(Fabulous)하고, 이래서 어메이징(Amazing)하고, 이런 점은 어썸(Awesome)이야!” 이런 식이죠. 거기선 별걸로 다 칭찬을 들었어요. 근데 그게 기분이 참 좋았어요. 스스로 좀 더 소중해지는 기분이었거든요. 내가 이렇게 칭찬만 받으면서 작품 하는 날도 오는구나, 혼자 막 감동받았죠. 누구나 편하게 자기 의견을 얘기할 수 있는 자유로운 분위기도 좋았고요. 그래도 제일 충격적이었던 건, 1년 365일 관객이 들어찬다는 거예요. 아까 말했듯이 배우 중 누군가 아파서 출연진이 변경된다고 해도 객석이 가득 차죠. 그게 좀 놀라운 광경이었어요. 물론 그게 옳다는 얘기는 아니에요. 거긴 프로듀서, 그러니까 작품 자체에 파워가 있고, 우리나라는 배우들의 힘이…. 아, 힘이라는 표현은 좀 그런데.

 

배우 중심의 시장이죠.

런던과 우리나라를 놓고 보자면, 저는 선뜻 어느 쪽이 옳거나 그르다고 얘긴 못 하겠어요. 거기 배우들에게 한국 얘기를 해주면 깜짝 놀라요. 와! 나도 한국 갈래! 어떻게 하면 한국에서 활동할 수 있는 거야! 막 난리가 나요. 솔직히 작품에 누가 나오든 상관이 없다는 건, 배우 입장에서는 불행할 수 있는 일이잖아요. 어느 한 쪽이 옳다고 할 순 없지만, 다만 제가 뮤지컬 배우로서 시기를 잘 타고났다는 생각은 하죠. 그게 지금 제가 누리는 가장 큰 축복이라고 생각하고요. 

 

물론 이렇게 활동할 수 있는 건 축복 없인 힘든 일이죠. 그래도 이 축복을 계속 누릴 수 있도록 스스로 노력하는 게 있을 거예요.

제가 가장 크게 노력하는 건, 자기 타협을 하지 않는 거예요. 스스로 하고 싶지 않은 작품을 다른 외적인 이유로 하지 않으려고 하죠. (웃음) 그 대신 하고 싶은 걸 할 때는 정말 열심히 해요. 맹세컨대 제가 할 수 있는 만큼의 최선을 다해요. 그렇게 해왔기 때문에 지금의 제가 있다고 믿죠.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니까, 나중엔 생각이 달라질 수도 있겠죠. 하지만 지금 당장은 하고 싶은 작품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좀 더 지속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 싶어요. 아주 천천히 가더라도요. 

 

글 배경희, 사진 표기식, 스타일링 박만현, 헤어 한송, 메이크업 이창은(Brand M)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50호 2016년 3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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