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고 또 걷다 보면 세상 시름도 지더라
와온전망대에서 마주한 와온 갯벌의 해넘이 장면. 길을 걷다 이런 순간과 마주한다면 누구라도 풍경의 정수로 데려다준 자신의 발을 칭찬하지 싶다. 사진 가운데 갯골을 기준으로 왼쪽은 사기도, 오른쪽은 꼬막채묘장이다. |
‘애정하는’ B급 영화가 있다. ‘감자 심포니’(2009)란 영화다. 강원도의 한 폐광 마을에 사는 인간 군상들의 삶을 들여다본 영화다. 여러 명장면 가운데 특히 기억에 남는 건 주인공 중 한 명인 ‘절벽’(전용택 분)이 영화 끝자락에 남긴 근사한 독백이다. “매일매일 걷고 또 걷다 보면 수많은 생각들이 오고갑니다. 그리고 이내 상념이 잦아들면서 몸안에 있던 기억들이 투명하게 떠오르는 시간이 찾아옵니다. 무엇이 진실이었고, 무엇이 변명이었는지가 명확히 보이는 순간들이 찾아옵니다.” 나도 길을 걸으면 그런 생각들을 떠올릴 수 있을까. 싸움질이나 하며 소모적이고 패배적인 삶을 살던 ‘절벽’에게 극적 변화를 가져다준 것 같은 순간들을 나도 만날 수 있을까. 그런 특별한 생각들이 떠오르길 기대하며 전남 순천과 경남 사천의 ‘남파랑길’을 걸었다.
일반적인 여행과 걷기는 성격이 다소 다르다. 여행이 점을 찍는 것이라면, 걷기는 선으로 이어진다. 여러 명소들을 효율적으로 살피지 못한다는 단점은 있지만, 점 찍듯 다녔던 여정에선 볼 수 없던 평범한 것들과 만나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 게다가 자연스레 거리두기와 비대면이 지켜지니 코로나 시대에 맞춤한 여행 방식인 듯하다.
남파랑길 표지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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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해남까지 남쪽 해안선 따라 1470㎞
남파랑길은 남녘 바다를 옆구리에 끼고 걷는 길이다.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가 공들여 조성 중인 코리아 둘레길의 남해안 버전이다. 코리아 둘레길은 나라 전체의 걷기길을 하나로 연결하는 것이 목표다. 2022년 완료 예정이다.
남파랑길의 양 끝은 각각 부산과 전남 해남이다. 지난 10월 말 공식 개통했다. 거리는 1470㎞. 앞서 완료된 동쪽 해파랑길(부산~강원 고성) 750㎞의 두 배에 가깝다. 복잡하게 들고 나는 해안선을 따라 길이 났기 때문이다.
코스는 90개다. 길이도 9.9㎞부터 27.4㎞까지 다양하다. 하루 한 코스씩 걷는다 해도 꼬박 석 달을 걸어야 완주할 수 있다. 이번 여정에선 순천과 사천의 일부 코스를 돌아보기로 했다. 그리도 보고 싶던 순천 와온해변의 해넘이, 새해맞이 이벤트로 제격인 사천의 해돋이를 두루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너른 갈대밭 너머로 이른바 ‘모세의 기적’이 펼쳐져 있다. 여수와 경계 지점인 와온삼거리 주변 모습이다. |
너른 갈대밭·철새가 수놓는 순천만 습지
순천을 지나는 남파랑길은 61, 62코스다. 그 가운데 61코스를 중심으로 걸었다. 61코스는 여수와 경계인 와온삼거리 정거장에서 별량면 화포까지 이어진다. 저 유명한 순천만 습지가 이 코스에 포함돼 있다. 전체 거리는 15.6㎞다. 흑두루미 등 겨울 철새들이 몰려오는 10월 말에서 4월까지는 순천만 일부 코스가 폐쇄된다. 대신 61-1코스로 우회해야 한다. 거리는 13.4㎞로 더 짧아진다. 우회하더라도 코스의 핵심인 용산전망대까지는 다녀올 수 있다.
코스의 공식 진행 방향은 와온이 시점, 화포가 종점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반대로 걸었다. 해넘이로 유명한 와온해변을 저물녘에 만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길은 역시 발의 임자가 이끄는 대로 걸어야 제맛이다.
화포해변은 남도의 해변치고는 독특하게 해돋이로 이름난 곳이다. 순천만, 와온 등에 견줘 이름값은 떨어져도 이른 아침 풍경은 빼어나다. 너른 화포 갯벌, 서정적인 화포선착장, 소의 머리를 닮았다는 화포전망대 등에서 저마다 다른 새벽의 모습과 만날 수 있다.
순천만은 따로 설명이 필요 없는 명소다. 너른 갈대밭과 용산전망대, S자 수로 등 볼거리들이 주렁주렁 매달렸다. 이맘때 만날 수 있는 최고의 풍경은 철새다. 흑두루미와 재두루미, 가창오리 등 겨울 진객들이 겨울 하늘을 수놓는다.
순천만 대대포구 인근에서 겨울 진객 가창오리의 군무가 펼쳐지고 있다. |
봄날 꽃보다 아름답다던 ‘와온해변’ 해넘이
와온(臥溫)해변은 누운 소 형상의 산 아래로 따뜻한 물이 흐른다 해서 지어진 이름이란다. 순천만의 동쪽 끄트머리에 있다. 박완서 작가가 생전에 “봄날의 꽃보다도 더 아름답다”고 했던 갯벌이 바로 여기다. 해변 길이는 3㎞ 정도. 대단한 볼거리는 없지만 너른 갯벌과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일상의 찌든 때가 벗겨지는 느낌이다.
늦은 오후가 되면 결정의 순간이 찾아온다. 어디서 장엄한 해넘이와 마주할 건가. 이 구간은 거의 전부가 해넘이 명소다. 그 가운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엄지 척’ 꼽는 곳은 용산전망대다. S자 수로를 붉게 물들이는, 저 유명한 순천만 낙조를 볼 수 있다. 그런데 너무 유명한 것이 마음에 걸린다. 멋진 사진을 얻을 순 있겠지만 어딘가 기시감이 들지도 모른다. 자신의 카메라에 뭔가 특별한 기억을 담고 싶은 이들이라면 과감하게 와온해변에서 승부를 거는 것도 좋겠다. 서정적이면서도 장엄한 바다 풍경을 담을 수 있어서다.
현지인이 귀띔해 준 곳은 와온해변 일몰전망대다. 현지에선 와온전망대라 줄여 부른다. 와온마을에서 용산전망대 방향으로 1㎞ 정도 올라간 곳에 있다. 여기는 사진작가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꼬막채묘장과 연결된 소로, 실뱀처럼 뻗어나간 갯골, 너른 갯벌에 혼자 떠 있는 사기도(상섬, 모자섬, 학섬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 등이 적당한 간격을 두고 배열돼 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젊은이들에게 유명세를 얻은 곳은 와온마을 앞의 콘크리트 저수조다. 갯일을 마친 어민들이 장화나 갯것 등을 씻는 곳이다. 해가 저물면 붉은 기운이 저수조 물 위에 그대로 반사된다. 이때 저마다의 포즈로 사진을 찍는 게 유행이다. 이런 구조물은 해변 곳곳에 있다. 모름지기 ‘인싸’(인사이더)라면 종전과 다른 장소에서, 다른 앵글을 구사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와온마을과 여수의 경계 지점에는 갈대밭이 있다. 여기도 느낌이 좋다. 운이 좋다면 큰고니(백조)들의 군무와 만날 수도 있다. 썰물 때는 갯벌 위로 길이 난다. 흔히 ‘모세의 기적’이라 부르는 현상이다. 썰물 때만 드러나는 길을 따라 걷는 것도 도시인들에게는 참 생경한 경험이다. 와온공원도 너른 갯벌을 굽어보기 좋다. 어르신이나 유아들과 함께 온 가족 여행객이라면 와온공원이 편하고 안전할 수 있다. 와온 일몰전망대와 와온방파제 사이에 있다.
문체부와 한국관광공사가 만든 ‘두루누비’ 앱을 내려받아 가면 현지에서 요긴하게 쓸 수 있다. 코스 지도, 화장실 등 편의 시설, 맛집, 내 위치 등 온갖 정보를 쉽게 확인할 수 있다. 홈페이지(www.durunubi.kr)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글 사진 순천 손원천 기자 angler@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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