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의 정원·너른 들엔 황금빛 일렁···질곡의 역사 보듬어주다
비옥한 땅에 도시 번성···쌀 수탈의 아픔도
적산 가옥·도정공장 등 근대로 과거여행
동화 속 정원 온듯 메타세쿼이아 길 장관
백제의 고도라고 불리는 익산은 사실 일제강점기에 번성한 도시다. 익산은 전라북도에서 전주·군산에 이어 일본인들이 가장 많이 살던 도시 중 하나였다. 일본인들이 익산에 관심을 둔 것은 광활한 호남평야 때문이었다. 그 중심에 미곡 수탈을 위한 전군가도와 호남선·전라선 철도가 깔리기 시작했고 대규모 농장과 이민촌이 들어섰다. 익산이 근대 도시로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근대 익산의 등장은 일제가 만경 평야에서 수탈한 쌀 수송을 위해 솜리(이리의 옛 지명)에 기차역을 세우면서 시작된다. 익산이 지난 1995년 이리와 통합되기 전까지 지금의 익산역은 이리역이었다. 만경 평야에서 구릉이 져 멀리서 보면 속으로 움푹 들어간 모습이라 솜리라는 이름으로 불렸고 이를 한자로 옮겨 쓰면서 속리, 이리(裡里)가 됐다고 전해진다. 철도가 개통하면서 열 가구 남짓하던 솜리는 인구 3,400명의 대도시로 발전했다.
호남의 교통 중심에서 두 번의 폭발사고까지…철도와의 질긴 인연
익산 여행의 출발도 근대사의 상징인 익산역에서 시작한다. 경부선의 중심이 동대구역이라면 호남선의 중심은 익산역이다. 익산역은 호남·전라·장항선에서 운행하는 모든 열차가 지나는 유일한 역이다. 지역 규모에 비해 유동인구가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기차역은 익산에 발전을 가져다 준 동시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 미군 폭격기의 ‘이리역 오폭사건’과 1977년 폭약을 실은 열차가 폭발한 ‘이리역 폭발 사고’까지 두 번의 사고로 역사는 물론 주변 도심이 쑥대밭이 됐다.
폭발 사고의 흔적은 옛 역사 바로 앞에 세워진 ‘1950년 미군의 이리폭격 희생자 위령비’와 선로 한쪽에 자리한 ‘이리역 폭발사고 희생자 추모탑’이 전부다. 현재의 익산역은 1978년에 이어 호남고속철도 개통에 따라 2014년 세 번째로 지어진 신역사다. 역을 빠져나오면 왼쪽에 자리한 흰색 건물이 폭발 사고 이후 새로 들어선 옛 역사인데 지금은 익산철도경찰센터와 철도노조사무실·이발소 등으로 쓰이고 있다. 그 앞으로 희생자들의 이름이 새겨진 위령비가 서 있다.
역 건너편 중앙동은 구도심이다. 이리가 철도를 중심으로 번성했던 시절 은행·백화점 등 주요 상업 시설들이 집결해 ‘작은 명동’으로 불렸다. 폭발 사고와 도시 개발로 당시의 화려했던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게 됐지만 과거 도시 형태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는 건물들이 곳곳에 남아 있다.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된 ‘구 삼산의원’과 ‘구 당본백화점’ ‘구 익옥수리조합’ ‘익산 주현동 구 일본인 (대교)농장 사무실’이 대표적이다. 모두 1910년에서 1930년도 사이에 지어진 적산 가옥들이다.
문화예술의거리에 자리한 구 삼산의원은 독립운동가이자 의사인 김병수가 1922년 세운 병원 건물로 이국적인 포치와 아치형 창문, 전면의 화려한 장식 등 근대 초기 건축물의 특징을 볼 수 있다. 구 삼산의원은 2019년 해체 후 현재의 자리로 옮겨와 익산근대역사관으로 새롭게 문을 열었다. 내부에 전시된 사진·기록물 등을 통해 일제 강점기의 수탈, 항일운동 등 익산의 변천사를 차례로 만나볼 수 있다.
다음으로 들러야 할 곳은 요즘 ‘금괴 매장설’로 유명세를 타고 있는 ‘익산 주현동 구 일본인 (대교)농장 사무실’이다. 소문의 요지는 일제강점기 익산에서 농장을 경영하던 일본인 대지주가 광복 이후 미처 가져가지 못한 재산을 금괴로 바꿔 사무실 지하에 묻어뒀다는 것이다. 매장된 금괴 양만 2톤, 시가 1,400억 원에 달한다고 전해진다. 소문이 돈 후 사무실 바닥을 누군가 파헤친 흔적이 발견됐고 이달 초 30대 남성이 대교농장 사무실에 침입하는 사건까지 발생했다.
진위 여부와 관계없이 지역과 얽힌 옛 이야기는 여행에 있어 또 다른 재밋거리다. 대교농장의 주인 오하시 요이치는 일제강점기에 99만 2,000㎡에 달하는 농지를 소유한 대지주였다. ‘금괴 매장설’이 나온 데는 이런 배경이 영향을 미쳤다. 오랜 시간 화교협회 소학교와 창고로 쓰이던 건물은 몇 년 전 천주교 전주교구에서 매입했다가 항일독립운동 기념관 건립을 위해 지난해 익산시로 소유권을 넘긴 상태다. 현재는 사무실에 폴리스라인이 쳐 있다.
100년 전 풍경 그대로···일본의 계획도시 춘포(春浦)
‘금괴 매장설’은 익산이 미곡 수탈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계획도시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 만경강과 만경 평야는 농경지로 최적의 조건을 갖춘 곳이었다. 대교농장을 포함해 당시 익산에 일본인이 운영하던 농장만 13곳. 일본인 지주들은 익산뿐만 아니라 이웃 완주와 전주·김제·군산까지 만경강을 따라 수백만 평의 농지를 관할하며 막대한 재산을 축적했다.
그 흔적을 춘포에서 찾아볼 수 있다. 대장촌(大場村)으로 불리던 춘포면 춘포리는 요즘으로 치면 대규모 농업을 위해 만들어진 신도시다. 면 소재지인 대장촌리는 당시 수리조합과 경찰주재소·학교·병원·신사까지 갖춘 도시였다. 지금의 마을 규모와는 어울리지 않는 도로와 네모반듯하게 구획 정리된 가옥들, 대규모 도정 공장 등에서 그 흔적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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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포가 한때 쌀 수탈의 전진기지라는 대표적인 증거는 전라선 춘포역사다. 1914년 개통된 전라선은 일제의 수탈 계획에 따라 이리-구이리-대장(춘포)-삼례-전주 구간을 운행했다. 열차는 일대에서 수확한 쌀을 군산항까지 실어 날랐다. 광복 이후 쌀 대신 학생들을 실어 나르던 기차는 1997년 끊겼고 2011년 전라선 복선전철화 사업으로 폐역이 되면서 선로마저 뜯겨나갔다.
역으로의 기능은 상실했지만 춘포역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간이역이라는 가치를 인정받아 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미닫이문 너머 아담한 역사의 벽면에는 대장역 시절 이곳을 오갔던 학생들의 교복과 기차 시간표, 사진이 빼곡하다. 역사 주변으로는 기차 조형물과 포토존이 설치돼 있고 고속열차가 새로 깔린 전라선 위를 수시로 오간다.
일직선으로 난 도로를 따라가면 춘포면의 중심인 일본인 마을이다. 당시 마을에서는 다사카·이마무라·호소카와 3개의 농장을 중심으로 일본인 지주가 고용한 일본 이주민들과 소작농, 농장에서 일하던 한국인이 함께 어울려 살았다. 마을에는 일본인 가옥이 여럿 남아 있다. 패망 후 본국으로 돌아가면서 한국인들에게 넘겨주거나 버리고 간 곳들이다.
이 가운데 가장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는 곳은 호소가와 농장 주임관사이던 김성철(6·7대 국회의원) 가옥이다. 호소카와 농장의 직원이던 김 씨는 광복 이후 일본인에게 집을 넘겨 받아 평생을 이곳에서 살다 생을 마감했다. 일본식 정원까지 갖춘 대저택에는 현재 그의 가족들이 살고 있다.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구 호소카와 농장가옥’은 농장 관리인이던 일본인 에토의 집이다. 1940년께 지어진 2층 건물로 나무판자를 잇댄 일본식 가옥인데 사유지로 집 내부까지 둘러볼 수는 없지만 마당에서 구경하는 것은 가능하다.
일본인 농장주 입장에서 마을의 핵심 시설 중 하나는 수확한 쌀을 정미하는 도정 공장이다. 구 호소카와 도정공장(대장공장)은 1914년 춘포 대지주였던 호소카와 모리다치가 세운 곳이다. 공장은 12대의 정미기를 보유한 대규모 시설로 기록에 따르면 호소카와는 만경강을 따라 삼례부터 김제까지 850정보(842만여㎡)의 농지를 소유한 것으로 전해진다. 여의도 면적의 3배에 달하는 규모다.
공장은 광복 이후 대한식량공사가 운영하다 1998년 폐업하면서 거의 버려지다시피 했다. 최근 땅을 매입한 개인이 대장공장이라는 이름을 그대로 이어받아 전시 공간 등으로 활용하고 있다. 양해를 구하면 도정 공장 내부를 둘러볼 수도 있다. 정미기를 제외한 도정 공장의 옛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다.
일본인이 빠져나간 춘포리는 여느 시골 마을과 다름없는 한적한 풍경이다. 마을을 한 바퀴 돌아 둑방 위로 올라서면 호남의 젖줄, 만경강 상류와 만난다. 만경강 역시 경작지를 넓히기 위해 곡강을 직강화한 일제 수탈의 아픔이 서려 있는 공간이다. 끝없이 펼쳐진 억새를 배경으로 물길을 따라가면 완주부터 김제·군산까지 일제 수탈사를 만나볼 수 있다.
원로신부가 가꾼 비밀의 정원···50년 만에 열리다
익산에서 요즘 여행지로 가장 핫한 곳을 꼽으라면 황등면 율촌리 아가페정양원이다. 정원이나 수목원 목적이 아니라 고(故) 서정수 알렉시오 신부가 1970년대 노숙인을 먹이고 재우던 곳이다. 설립 초기 운영 자금을 대기 위해 키워 팔다 남은 나무들이 자라 숲을 이뤘고 정식 노인 복지 시설이 된 후에는 시설 내 노인들을 위한 정원으로 조성됐다.
아가페정양원은 지난 50년간 외부에 개방하지 않아 ‘비밀의 정원’이라고 불리다 익산시의 요청으로 올해부터 일반에 무료로 개방되기 시작했다. 총 11만 5,000여㎡ 규모의 부지에는 향나무·꽝꽝나무·소나무부터 오엽송·섬잣나무·공작단풍 등 17종, 1,416주의 나무가 자라고 있다. 계절마다 수선화·튤립·목련·상사화 같은 꽃들도 만나볼 수 있다.
특히 담장을 대신해 심은 메타세쿼이아 500여 그루가 40m 높이로 자라 장관이다. 그 사이로 단풍나무길, 포멀가든, 은행나무 산책길 등이 이어지고 동화 속에 나올 법한 정원이 펼쳐진다. 정원 한가운데 놓인 숲속 한평 도서관은 누구나 책을 꺼내 읽고 싶게 만든다. 50명의 노인이 거주하는 노인 복지 시설로 운영되는 만큼 방문객들의 배려는 필수다.
글·사진(익산)=최성욱 기자 secret@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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